정미숙 한국가구박물관장이 곳간채 바깥에 서 있다. 서울 마포에 있던 명성황후 사촌 오라버니 집에서 서까래·기와 등을 가져와 다시 세운 건물이다. 곳간은 조선시대 부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그 뒤로 박물관의 중정(中庭)이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건 편견이었다. 일종의 시기심이었다. 경관 뛰어난 서울 성북동에 멋들어진 박물관을 짓다니…. 호사스러운 취미가 아닐까. 지난달 초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내외가 방문해 유명세를 타고, 일반인에겐 ‘비원(秘苑)’처럼 감춰진 곳이니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웠다. 2011년 CNN방송이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소개하고, 한국을 찾은 외국 귀빈들의 ‘필수코스’처럼 여겨지는 곳이니 말이다.
하지만 편견은 일순간에 무너졌다. 6일 오후 서울 성북동 330번지 한국가구박물관. 정미숙(67) 관장은 부끄러운 듯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본인보다 박물관과 가구를 내세워달라고 연신 부탁했다. “노인네 얼굴을 찍어 무엇에 쓰냐”며 도리질도 쳤다.
정 관장의 일성은 “죄인”이었다. 전국 여기저기에 있던 한옥을 제자리에 보존하지 못하고 이곳에 옮겨온 것에 대한 자책이었다. 옛 선인의 멋과 미를 내팽개쳐온 우리들 전체에 대한 채찍 소리로 다가왔다.
한국가구박물관은 서울 한복판에서 자연 가득한 쉼터를 만난 듯 반갑다. 대지 7000㎡(약 2100평)에 궁채·곳간채·사대부집 한옥 10채가 정갈하게 들어서 있다. 그 안에는 함·반닫이·뒤주·서안(書案)·약장 등 조선시대 목가구 500여 점(소장품은 2500여 점)이 오순도순 자리 잡고 있다. 집과 가구, 민화(民畵)가 한 몸처럼 어울린다.
① 시진핑 중국 주석 내외가 식사했던 궁채 내부. ② 박물관 전시장. 먹감나무로 만든 이층장·문갑 등이 보인다. ③ 소나무로 만든 뒤주. 쌀·팥·책 등을 보관했다. ④ 오동나무 책함(冊函). 확장성·이동성이 좋다.
- 지난달 21일 포르투갈 영부인도 다녀갔습니다. 외국 정치인이나 각국 대사, 그리고 브래드 피트, 마사 스튜어트 등 대중스타들도 앞다퉈 찾아왔습니다.
“가구박물관 주변에 있는 외국 대사관만 38곳입니다. 그들이 한국의 생활상을 느낄 만한 곳이 적습니다. 우리는 한복을 버리고, 한옥은 훨씬 전에 잃었습니다. 남은 것은 김치 정도일까요. 제가 만난 외국 대사들은 똑같은 말을 합니다. ‘한국 가정집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요. 반만년 역사에서 지금이 가장 잘사는 시대일지 몰라도 우리 문화재는 가장 많이 잃어버린 시대일 수 있습니다.”
- 1995년부터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지금 형태를 갖추는 데 15년이 걸렸습니다. 한 채 한 채 조각보 깁듯 한옥을 늘려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조상을 잘 만난 덕이죠. 제가 만든 가구가 하나도 없잖아요. 원양어업을 했던 시아버지님께서 땅을 내주셔서 감당할 수 있었고요.”
- 일반인에겐 아직 생소한데요.
“박물관의 기틀을 잡기 전까지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간 마사지나 사우나 한 번 받은 적이 없습니다. 2년 전부터 100% 예약제로 일주일에 닷새(화~토요일) 문을 엽니다. 하루 최대 150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9월까지 대기인원이 찬 상태죠. ‘콧대 높은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절대 오해입니다.”
- 가구는 언제부터 모았습니까.
“대학생 때부터입니다. 미대에서 추상화를 전공했는데, 여윳돈이 조금 생기면 바로 인사동으로 나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값이 정말 쌌어요. 젊은 아가씨가 관심을 보이니까 거저 주시는 분도 많았고요. 소장품의 80%는 결혼 전에 수집한 겁니다.”
- 특이하네요. 계기가 있었나요.
“고교 때 장학금을 받고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 교환학생으로 갔었습니다. 한국과 미국간에 전화도 안 되던 시절이었죠. 그곳 학생들이 ‘너희는 뭘 먹고, 멀 입고 사니’ 등의 질문을 쏟아냈어요. 외국인이 궁금해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식주라는 걸 알았죠. 이후 귀국해서 가구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반찬을 올려놓는 찬탁(饌卓)을 책꽂이로 쓸 정도였죠. 어머니가 쓰던 것을 물려받은 것도 많고요. 사랑채에 있는 문갑·사방탁자 등이 그렇습니다.”
- 우리 가구를 자랑한다면요.
“물건마다 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먹감나무·단풍나무·오동나무 등 재료, 책상·옷장·서랍장 등 용도, 사랑채·안채·정자 등 위치에 따라 정취가 달라집니다. 또 지역마다 이루 다양할 수가 없어요. 차로 30분 안 떨어진 곳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소반(小盤)만 해도 ‘나주스타일’ ‘영광스타일’ ‘담양스타일’ ‘남원스타일’ 등 70여 가지나 됩니다. ‘강남스타일’은 유도 아니죠.”
- 가구 먼지를 닦는 것도 큰일이겠습니다.
“제 스스로 ‘가정부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손에서 걸레나 빗자루가 떠날 새가 없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닦고, 털고, 씻어내고 여간 고된 일이 아닙니다. 손톱에 매니큐어 한 번 바른 적이 없습니다. 손끝이 갈라져 피가 자주 났고, 반창고를 달고 살았죠.”
- 그런데도 왜 계속하나요.
“우리 것에 대한 자존심 때문이죠.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순 없잖아요. 외국 전문가들도 조선시대 가구를 보고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현대미술)’라고 감탄합니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낸 절제미, 면과 선의 빼어난 비례미에 ‘원더풀(wonderful)’ ‘어메이징(amazing)’을 연발합니다. 그럴 때 늘 제가 하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We live like this)’라고요.”
- 돈이 수월찮게 들었을 것 같습니다,
“한 번도 계산해본 적이 없어요. 대부분 비싼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내놓을 수 없었겠죠. 귀한 물건은 애들 아버지가 많이 지원해줬습니다.”
- 부친은 민주화운동, 모친은 여성운동을 하셨습니다. 관장께선 문화운동을 하시는 건가요.
“운동은 무슨 운동? 문화재를 사랑할 뿐이죠. 기회가 되면 개성에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우리 문화의 3대 숨겨진 보물로 꼽는 민화·조각보·가구 장인들이 기술을 전수하고, 그 생산품을 각국 대사관 등에 보내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더 알리려고 합니다.”
- 다른 계획이 있다면요.
“전국의 고택·서원·향교 등을 되살렸으면 해요. 전북 정읍의 김동수 가옥과 경북 경주 옥산서원 정비를 마무리한 상황입니다. 성 김 주한 미국대사에게 ‘한국의 땅은 미국 워싱턴 주보다 작지만 1000개나 되는 대학(서원·향교)이 있는 나라’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곳들이 박물관이 된다면 문화관광은 절로 이뤄지지 않을까요. 한국에 볼 게 없다는 말은 쏙 들어갈 겁니다.”
-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조선 세종과 영·정조 시대에 이어 제3의 문예부흥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우선 가구박물관 주변에 있는 박물관·정원·왕릉·미술관을 묶는 문화 클러스터 조성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기업들의 후원이 필요하죠.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메디치 가문이 우리라고 없으라는 법은 없겠죠.”
정 관장이 가장 아끼는 가구는 아낙들의 손때가 묻은 뒤주다. 박물관 로고로도 뒤주를 쓴다. 우리 속담 중에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가 있다. 무엇이 없어진 다음에야 그것이 더 간절하게 생각난다는 뜻이다. 정 관장은 하나 둘씩 사라지는 우리 문화재를 아쉬워하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오늘도 염원한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