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첫 궁궐인 경복궁 내 근정전. 경복궁은 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과 함께 조선 5대 궁궐이다. 중국 자금성에 비하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조선의 궁궐은 ‘절용애민(節用愛民)’ 정신에 따라 재원을 절약해 작게 지어졌다. 김춘식 기자 |
그렇다면 궁궐에 대한 한국인과 중국인의 시각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산정책연구원 아산서원 알럼나이 소모임 팀이 7월 14·16일 경복궁을 방문한 한국·중국인 각각 100명, 기타 외국인 50명 등 250명을 대상으로 간이 조사를 하자 확연히 달랐다. 한국인 61%가 “경복궁이 크다”고 한 반면, 중국인의 91%는 “작다”고 했다.
유럽 관광객들은 뜻밖에 “서양과 달리 넓게 퍼져 있고 문과 건물이 많아 크다”고 한 사람이 96%였다. ‘크다’고 한 한국인의 46%는 “왕의 권위 때문에 웅장하게 만들어서”라고 답했다. ‘작다’는 이유는 “나라가 작아서”라는 답이 36%로 가장 많았다. ‘작다’고 답한 중국인은 “중국의 속국이어서” “조선이 작아서” “돈이 없어서”라고 했다.(30%) 중국인 응답자 전부 “중국 자금성은 크다”고 했는데, 이유로는 “역사가 길고 인구가 많고 국력이 강해서” “속국이 많아서” “황제는 백성과 달라야 해서”와 같은 답이 나왔다.
중국인은 한국의 궁궐을 작게 보고, 한국인은 ‘왕을 돋보이게 할 만큼은 크지만 진짜 큰 건 아니다’라는 상대적 관점이다. 한국은 중국인이 생각하듯 나라가 작고 힘이 없어서 중국보다 궁궐을 작게 만든 것일까. 서울 도심의 조선왕조 5대 궁궐(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에 그 답이 있다.
조선의 한양 첫 궁궐은 경복궁. 태조 때 10개월 걸려 지었다. 짧다고 날림공사는 아니다. 규모는 내전(대전·중궁전) 173여 간, 외전(정전) 192여 간, 행랑 등 전체 755여 간이었다. 공사에 14년 걸린 자금성에 비하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조선의 왕이 권위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은 “궁궐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존엄을 보이게 하고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감동받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춘추』에 ‘백성의 힘을 중히 여기고 토목공사를 삼가라(重民力謹土功)’ 했으니, 임금이 백성을 괴롭히면 되겠습니까”라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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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정책연구원 함재봉 원장은 “왕은 호화·사치한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궁궐도 왕으로서 최소 위엄을 지킬 정도 이상의 건물은 허용되지 않았다”고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했다. 경복궁의 ‘근정전’이란 이름에도 ‘아침엔 정사를 듣고, 낮엔 어진 이를 찾고, 저녁엔 법령을 닦고, 밤엔 몸을 편안하게 하라’는 뜻이 담겼다. 모든 건물이 다 그렇다.
조선 초, 막강 권력의 태종도 궁궐보다 백성 사랑을 생각해야 했다. 태종 1년(1401), 왕이 궁궐을 새로 지으려 하자 “절용애민(節用愛民)의 도가 아니다”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나라의 재원을 아끼는 것이 백성 사랑이라는 것. 태종은 “본래 궁을 작게 지으려 했다”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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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경복궁 건물의 평균 평수는 146.45㎡(44평)로 ‘겸손’하다. 민본 정신을 담은 경복궁은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돼 200여 년의 막을 내린다.
임란이 끝나고 궁궐 중건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인력과 물자가 부족하고 ‘풍수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에 창덕궁 중건으로 기울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에 지어졌지만, 광해 7년(1615)에 중건되며 300년 창덕궁 시대를 열었다. 실질적인 정궁(正宮)이 된 것이다. 경복궁은 방치돼 조선 후기의 학자 김상헌(1570∼1652)의 『청음집』에 따르면 폐허가 됐다.
경복궁의 절용애민 철학은 창덕궁에도 이어져 기본 골격엔 변화가 없었다. 인조는 후원을, 효종은 인정전의 서북쪽에 만수전·춘휘전을 세웠다. 하지만 소실된 뒤 복구하지 않았다. 숙종도 신축건물을 세우고 대보단을 만들었지만 후원 확장 수준이었다. 창덕궁은 정조 때 변화를 겪었다. 후원에 규장각과 이문원·수강재가 들어섰다. 중희당도 세웠다. 언덕 높은 곳에 2층 주합루를 세워 왕권을 과시했다. 건물들은 당당했지만 크지 않았고 지나친 장식은 피했다. 궁궐은 검소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김동욱, ‘조선 정조조의 창경궁 건물구성의 변화’)
정조는 왕세자 시절 『경희궁지』에 “궁궐은 군주가 거처하고 다스림이 나오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보고 신민이 흠모하는 곳인즉 부득불 장엄하게 하고 존엄을 나타내야 한다”고 쓰면서도 “사치하지 않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규장각 건설 때 “집을 세우는 것이나 단청을 하는 것에도 검약하라”고 명했고 “선왕들이 궁을 낮추고자 하는 덕을 보였으니 극진히 검약하고 부지런함을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국의 궁궐엔 크기나 장식으로는 넘볼 수 없는 깊이와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다.
궁궐의 철학을 파괴하려 했던 왕들의 끝은 좋지 않았다. 첫 시도자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창덕궁 후원에 인양전과 서총대(춘당대)를 중건했는데 아주 컸다. 실록은 연산 12년 1월 21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임금은)인양전·서총대 공사를 마친 후 동·서로 성을 쌓을 것이지만, 성터에 큰 나무를 죽 심어 성안을 가리라고 했다. …인양전 후원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용을 새긴 돌난간을 만들었는데, 1000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는 10길이나 되었다. 이름을 서총대라 하고 그 앞에 큰 못을 팠는데, 1백 명이 감독했으며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 일하는 소리가 밤낮 끊이지 않았고 천지를 진동했다.” 서총대는 연산군 폐위로 완성되지 못했지만 영화 ‘왕의 남자’에서 궁궐 내 유희 장면의 무대로 나온다. 대규모 공사와 사치로 민심을 거슬러 폐위를 자초한 게 아닐까.
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놓고도 인경궁과 경덕궁 공사를 벌였다. 항간엔 그가 경복궁까지 복구해 인경궁과 경복궁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역시 뒤가 안 좋다.
경복궁은 조선 말, 절용애민의 철학을 어긴 공사로 불운에 휘말렸다. 흥선 대원군은 300년 방치했던 폐허 경복궁을 조선 초 755간에서 10배 이상 커진 7714간으로 중건시켰다. 그러나 복원 과정에서 불이 나고, 건설비로 충당한 당백전이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다. 궁궐에 투입된 백성의 힘을 국부(國富) 창출에 썼다면 일제침략이 그리 쉬웠을까.
민본 철학이 깃든 경복궁을 일제는 짓밟았다. 1915년 전시관 10동을 세운다고 비현각·자선당 등 동궁 일대와 궁역 동편을 전면 파괴했다. 26년엔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 관계자는 “경복궁은 고종 중건 당시 500여 동이 있었다는데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파손되어 7.2%인 36동만이 남았다“고 말했다.
다른 궁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경희궁 내엔 경성중학교가 신축됐다. 숭정전은 모대학 정각원으로, 흥화문은 신라호텔로, 회상전은 교실이나 사무실로, 흥정당은 법당으로 사용되거나 옮겨졌다.(조재모, 『궁궐, 조선을 말하다』) 궁궐 부지도 조각나 팔렸다. 덕수궁도 마찬가지다. 창경궁은 ‘우울해하는 (조선)황제’를 위로한답시고 동물원·식물원으로 만들어버렸다.
해방 뒤 40여 년 간 궁은 훼손된 채 방치됐다가 90년대 복원되기 시작했다. 경복궁의 경우 1990~2010년 1차 복원 때 1571억 원 예산을 들여 89동이 복원됐다. 일제 때 남은 것과 합하면 125동. 그렇게 고종 때의 25% 수준이 됐다. 문화재청은 2030년까지 5400억 원을 들여 254개 동을 더 복원한다. 그래도 고종 당시의 75.8%밖에 안 된다.
궁궐은 오늘날 시민의 공간이다. 창경궁 경춘전에선 오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인문학으로 배우는 궁궐’ 시민 강좌가 열린다. 10월엔 경복궁 목요특강, 덕수궁엔 ‘정관헌 명사와 함께’, 창덕궁엔 ‘후원에서 한권의 책을’ 행사가 진행된다. 지난 23일 팔기 시작한 경복궁 야간개장 티켓은 13일치가 한시간 만에 매진됐다. 시민들은 서울의 5대 궁궐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궁궐에 담긴 철학은 얼마만큼 알까. 소모임 팀은 궁궐을 찾은 관광객에게 “궁궐이 작은 것이 민본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한국인의 68%, 중국인의 69%가 ‘모른다’고 답했다. ‘안다’고 답한 비율은 한국인 8%, 중국인 7%에 불과했다. 안다고 답한 중국인 중에는 “한국 드라마를 통해 안다”고 말했다. 궁궐 가이드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없었다.
왜 그런가. 공식적인 안내 매뉴얼도 없고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회에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화재청 관계자는 “안내 내용은 가이드마다 다르다”고 한다. 운 없는 관광객은 안내를 받고도 그냥 ‘작네’ ‘크네’ 하며 겉만 보고 간다. 안타깝다.
민본이 잊힌 곳에 궁궐은 커지고, 커진 궁궐은 나라를 흔들었다. 궁의 철학을 무시한 왕들은 폐위의 길까지 걸었다. 궁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오늘날, 후손은 그런 선조의 생각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취재지원=권은율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 연구원, 변소정·신희선·이서영·이영경·최지은·홍예지 아산서원 알럼나이 소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