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모란당초무늬 나전경함이 15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 공개됐다. 짙은 갈색에 다양한 무늬가 별처럼 빛난다. 기품있는 형태가 아름다우며 보존상태도 좋다. [신인섭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덮고 있던 보자기를 젖히자 900년 세월을 견뎌온 짙은 갈색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과 몸통을 촘촘하게 장식한 모란당초무늬가 별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15일 오전 서울 서빙고로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 제2강의실. 전 세계에 9점뿐인 고려 나전경함(螺鈿經函) 중 하나가 처음 고향에 돌아와 자태를 선보인 순간, 귀한 손님을 맞는 국박 관계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나 관장은 “청자(靑磁), 불화(佛畵)와 더불어 고려 미술을 대표하는 나전칠기가 국내에 한 점도 없었는데 이렇게 상태가 좋은 나전경함이 들어와 기쁘다”고 인사했다. 김 관장은 “국외 소재 우리 문화재의 환수에 대한 국민 관심이 높아진 요즘, 국립중앙박물관회 노력으로 국보급 문화재를 기증받게 됐다”고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유물을 본 순간, 그 감격을 어찌….” 신성수(62·고려산업 회장) 국립중앙박물관회(이하 박물관회) 컬렉션위원회 위원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해 가을부터 고려 나전경함 상태를 조사하려 여러 번 일본 교토를 오가며 공을 들인 신 위원장은 “반드시 한국으로 가져와야겠다고 결심했다”며 어려웠던 환수 과정을 설명했다.
① 9개 잎을 섬세하게 표현한 모란당초무늬의 세부. ② 점이나 원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연주문을 확대한 모습. ③ 삼의 잎 무늬를 드러낸 마엽문. [신인섭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지난 5월 23일 국박 수장고에 들어와 이날 기증식을 열며 언론에 공개된 고려 나전경함은 높이 22.6㎝, 폭 41.9X20.0㎝ 크기에 무게 2.53㎏으로 아담하면서도 기품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뚜껑 윗부분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모죽임한 장방형으로 원만한 부드러움을 자랑한다. 특히 경함을 장식하고 있는 주 무늬인 모란당초(牡丹唐草) 무늬 외에 마엽(麻葉) 무늬, 귀갑(龜甲) 무늬, 연주(連珠) 무늬가 잘 어우러져 걸작의 기품을 풍긴다.
이건무(67·도광문화 포럼 대표) 전 국박 관장은 “일본 키타무라(北村) 미술관 소장품보다 모란당초무늬 완성도가 높고 보존 상태가 좋다”며 “불교국가에서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 신앙의 힘으로 만들었기에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용희 국박 보존과학실 부장은 “나전 조각만 2만5000개 이상 섬세하게 붙인 고된 작업의 산물로 이렇게 다양한 무늬를 지닌 나전칠기를 보게 된 건 영광”이라고 했다. 국박은 앞으로 세밀한 조사 연구를 거친 뒤 국보(國寶) 지정 등 유물등록절차를 밟아 이른 시일 안에 상설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고려 나전경함=경함(經函)은 불교 경전을 담는 용도로 제작된 함이다. 1231년 몽고에 침략당한 고려에서는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대장경(大藏經)을 만들었고 이를 보관하는 경함이 대량으로 제작됐을 것으로 보인다. 나전(螺鈿)은 당나라 때 시작돼 고려 시대에 동아시아 최고 수준을 일궜다. 나전칠기는 나무로 기물을 만든 뒤 굵은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자개를 붙인 후 옻칠을 덧입혀 반반하게 만들었다. 고려 시대 것이 주름질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다양한 색채를 쓰고 금속선을 병행해 가장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유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