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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의 비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0. 21. 18:18

어떤 시의 비밀 / 송재학

 

1. 역설이란 비밀

    시가 비밀을 품은 보석상자란 건 이 업의 종사자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보석상자를 여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열었다손 하더라도 그 보석의 꼴과 무늬를 풀어 헤치기는 지난하다. 말로 옮길 때 줄어드는 감각의 현저한 감소 이외에도 그건 몸으로 익혀야하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의 비밀이야말로 시인이 언젠가 말해야 하는 또는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가깝다.

 

    먼저 역설이란 비밀! 이건 사실 비밀이랄 것도 없는 공공연한 시적 전략이다. 이른바 낯설게 하기, 뒤집기, 오버랩 등의 문학체험이 여기에 해당된다.

 

열린 창이여, 나는 너를 통해 아무 것도 내 보낸 것이 없는데 이렇게 많을 것들이 물밀듯이 밀려 오는구나

-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4」에서

 

    창은 환기와 채광을 위한 구조물이다. 그 구조물은 건축물이 시작된 이래 점차 제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쌓아가기 시작하여 안과 밖의 매개처의 역할을 하였지만, 언제나 안에서 밖으로 향한 시선이 창의 주체이다. 이성복의 창은 그 시선을 바꾼 것이 아니지만 대상으로서의 창이 능동적 정서를 가진다. 밖의 사물이 안의 시선에 붙잡힌 것이 이제까지의 창이 쌓아놓은 상상력의 축적이다. 이성복의 창은 그 축적된 상상력에 의문을 가지는데 있다. 보라! 밖의 사물은 창이 스스로의 의지로, 능동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멕베드에 등장하는 움직이는 ‘버넌의 숲’을 안으로 끊임없이 밀어준다. 화자가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창이 ‘버넌의 숲’을 이끌고 온다. 그 ‘버넌의 숲’은 안이 가진 주체에 대한 의심이며 평면적 삶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너를 통해 아무 것도 내 보낸 것이 없는데’라는 창에 대한 자괴감은 세상에 대한 자괴감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창과 전혀 다른, 보태준 것 하나 없는 세상이 이토록 많은 것을 주다니!란 탄식하는 이성복의 창이 나왔다. 이성복이 삶에 대한 태도를 사랑으로 바꾼 흔적이 ‘이렇게 많은 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구절에 각인되어 있다.

 

2. 시, 사물의 본질

    경주의 향토사학자 윤경렬 씨는 경주 남산의 부처에 대해 “석수장이가 돌을 쪼아 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돌 속에 있는 부처님을 찾아 돌을 쪼고 있다는 시인 청마의 노래 구절”이 가장 적절하다고 강조한다. 청마의 시는 경주 남산의 석불에 대한 경외감이 만든 수사적 차원의 고백일까. 시의 비밀은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한 수사적 차원일까. 수많은 시인들은 사물의 본질이 바로 시라는 것을 증명해왔다.

 

밤 소쩍새의 울음엔 부리가 있다 그대 뚫어줄 힘이라고는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고 울음으로 울음 뚫는 부리가 있다 몸이 있다 속이 다 상해서 軟骨이다.

- 정진규의 「속이 다 상해서」부분

 

    새의 부리가 가진 뾰족한 외양이 그대로 소쩍새의 본질인 슬픔으로 치환되었다. 그 핵심에 도달한 시인에게 뾰족한 소쩍새 부리야말로 슬픔 그 자체이다. 사물의 외양이 사물의 본질이라는 이 방식에 주목한 시인은 많다. 사물의 외양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가장 합리적이고 사물의 존재에 가장 적합하게끔 진화되어 왔던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시인이 사물의 외양에 관심을 두는 것이야말로 사물에 가장 빨리 접근하는 것이다라는 건 신기할 것도 없다.

 

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 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유리잔의 본질이란 바로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라는 인식이다. 깨어지기 쉬운 유리의 성질을 이토록 잘 표현한 시가 있었던가.

 

    이렇게 본다면 사물의 외양과 사물의 본질은 서로 관통하는 부분이 있다. 본질이 외양을 만든 것이다. 시의 외연과 내포가 서로 수미일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시는 사물 스스로 내뿜는 능동적 기운인 것이다. 이미 여기에 주목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조선 시대 윤춘년(1514~1567)의 성율론이 참고할 만하다.

 

내가 궁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궁소리가 외부의 궁소리에 상응하는 것이며, 내가 상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상소리가 외부의 상 소리에 상응하는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려는 의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저절로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 윤춘년,「文斷序」『文斷』(안대희,『韓國漢詩의 分析과 視角』,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년)

 

까마귀가 울지만 내가 울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날 것이 불평하며 오장육부를 이리저리 헤집다가 까마귀의 희노애락을 흉내내는 것이다 까마귀를 닮은 동백 숲도 내 몸 속에 몇 백 평쯤 널렸다 까마귀 무리가 바닷바람을 피해 붉은 은신처를 찾았다면

개울이 흘러 물소리가 들리는게 아니다 내 몸에도 한없이 개울이 있다 몸이라는 지상의 슬픔이 먼저 눈물 글썽이며 몸 밖의 물소리와 합쳐지면서, 끊어지기 위해 팽팽해진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와 내 안의 모든 개울과 함께 머리부터 으깨어지며 드잡이질을 나누다가 급기야 포말로 부서지는 것이 콸콸콸 개울물 소리이다 몸 속의 천 개쯤 되는 개울의 경사가 급할수록 신열 같은 소리는 드높아지고 안개시정거리는 좁아진다 개울물소리를 한 번도 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개울은 필사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졸시,「사물A와 B」전문

 

    윤춘년의 성율론은 일종의 시의 리듬에 대한 성과이다. 이것을 그대로 사물의 외양과 성질이 사물의 본질과 일치한다고 한 내 주장에 대입시킬 순 없지만, 소리/사물에 대한 윤춘년의 자각은 확실히 음미해볼만 하다. 졸시, 「사물A와B」는 그 성율론에 바탕을 둔 일종의 시론인 셈이다.

 

3. 언어와 언어 사이

 

창경궁 식물원에는 소사나무 한 그루 있네/나는 가끔씩 그 소사나무驛에서 구름의 삼등칸을 탄다

 

    박정대의「구름의 삼등칸」(『현대시』7월)을 읽으면 소사나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진다. 어찌해서 소사나무가 驛站이 되고 어찌해서 소사나무가 구름을 부르는지 자못 궁금하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소교목이다. 주로 해안의 산지에서 자라는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왕소사나무나 섬소사나무의 이종도 있다. 내가 본 소사나무는 모두 분재들 뿐이다. 소사나무는 교목이어서 그것들이 분재화분 속에서 장엄함을 뽐내려면 역시 눈속임에 가까운 성장기를 보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소사나무들은 모두 불쌍하다.

 

    두 행의 짧은 이 시는 그마저 쉼표로 연결되어 더 짧은 듯하다. 이 시를 읽고 가진 생각을 정리한다면 먼저 왜 소사나무에 역의 이미지를 보내었는가. 둘째 소사나무역에 왜 성층권이 생성․ 소멸되는가 하는 것이다. 두 개의 의문은 아마 서로 같은 고리를 가지고 있을 터이다. 소사나무에 대해 더 알아보자. “작은 가지와 잎자루에 털이 밀생하며 턱잎은 선형이다. 잎은 어긋나고 난형이며 끝이 뾰족하거나 둔하고 밑은 둥글다. 잎 길이는 2~5㎝로서 겹톱니가 있고 뒷면 맥 위에 털이 있다. 한국 특산종으로 제주 등지에 자란다. 잎과 열매이삭이 크고 큰 나무로 되는 것을 왕소사나무라고 하며, 옹진과 백아도에서 자란다. 한 꽃이삭에 꽃이 많이 달리는 섬소사나무는 한국 특산종이며, 인천 근처의 섬과 거문도에서 자란다.”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뒤적여 보지만 겨우 “한 꽃이삭에 꽃이 많이 달리는” 섬소사나무에서 구름의 이미지를 희미하게 읽어볼 뿐이다. 지식이란 이럴 때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차라리 소사나무라고 입말로 읽을 때 혀와 구개와 목젖에 두 번 씩이나 작은 파도처럼 부딪치는 시옷 음가가 구름을 불렀다고 생각하는 게 더 즐겁다. 아니 시옷 음가는 부딪치디 않고 부드럽게 혀와 구개와 목젖에 일렁인다. 그의 구름 시 중 다른 한 편은 이렇다.

 

그녀가 내뿜는 담배연기는 잘 마른 영혼, 활엽수의 잎사귀 같네/나는 그것을 보고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를 한 편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네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전문

 

    박정대의 구름은 어딘가로 가고 싶은 생각, 무언가 즐거운 생각, 마음의 폐부를 찌르는 칼날 등이다. 그야말로 원래 시인이었던 사람이 쓰는 시의 질료로 구름이 선택된 것이다.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에서 시인은 ‘그녀’가 내뿜는 담배연기를 보고 있다. 그 담배연기는 ‘그녀’의 젖은 영혼을 위로해주며 다시 바깥으로 나온 ‘그녀’의 일부이다. 앞에서 말한 ‘구름’인 것이다. 원래 구름이었던 ‘그녀’와 구름의 일부로서 ‘담배연기’는 이제 쌍둥이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사나무에 걸린 구름은 소사나무 아래 추억이 있었다는 것, 어딘가 가고 싶은데 소사나무 아래의 추억과 함께 가고 싶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그야말로 경계를 넘어버린 것, 오히려, 이 시를 읽고 앞서 말한 두 가지 의문, 어찌해서 소사나무가 驛站이 되고 어찌해서 소사나무가 구름을 부르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시작노트를 뭉개버린 시인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시의 비밀 중 하나인 비의이다. 이것은 신비로운 언어의 사원 깊숙이 저장된 보석상자이다. 이건 사실 말로 설명되기 보다는 눈으로 마음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4. 시의 논리

 

하루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릿속엔 손바닥만한 고기들이/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믿었을 거네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곧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 이윤학,「저수지」전문

 

    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저녁의 풍경이다. 이윤학의 시에 등장하는 풍경의 차림새는 이처럼 단순하다. 시인의 눈에 붙잡히는 사물들은 먼저 저수지, 그 밖에는 오리떼가 놀고 안에는 고기들이 논다. 어두운 산들이 저수지에 프린트 되어 있고, 문득 화자는 돌을 던진다. 돌이 저수지에 빠지자 저수지는 곧 시인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낸다, 까지가 이 시의 산문적 행간이다.

 

     오리떼는 저수지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눈 속에서 헤맨다. 마찬가지로 고기들은 물속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수사로만 볼 것인가. 아마도 이 시의 초고는 “내 눈이 붙잡은 오리떼……”였을 것이다. 어찌하여 그것이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로 바뀌었을까. 가만히 보면 오리와 고기뿐만 아니라 어두운 산들도 마찬가지이다. 저녁의 저수지는 산들이 프린트 되어있는데 시인은 그 어두운 산을 저수지로 인식하고 있다. 그 인식에는 아마도 시인의 삶이 밀접하게 간섭했을 터인데, 내가 몇 번 만난 시인은 삶을 마치 방기한 사내처럼 보였다. 삶이 그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삶을 버린 것. 그것은 시대의 잘못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잘못된 탄생처럼 선험적인 것처럼 보인다. 문득 못가의 사람이 습관처럼 던지는 저 돌은 청개구리한테 달려가는 아이들의 장난처럼 저수지에 빨려 들어간다. 이 화자의 상처투성이는 아무렇게나 던진 돌에도 아프다. 그리하여 그 돌은 진흙 속-그것이 대뇌피질의 상징인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에 파고 들어가 결석처럼 늘 머리를 아프게 한다. 여기까지 오면 이 저수지란 바로 시인의 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몸의 눈에는 오리가 놀고 머리 속에는 고기가 들락거리는 평화로운 곳인 듯 싶지만, 자세히 보면 눈에는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 있고, 온 몸은 상처투성이, 시인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수사적으로도 이 시는 재미있다. 1연의 오리와 고기떼들, 2연의 거울과 저수지의 비유-그것은 죄없는 자의 죄의식이 아닐까. 저수지에 던져지는 돌에 파문의 괴로움으로 표현한 것도 그 돌이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간 것도 모두 시인과 너무나 닮았다.

 

5.

시 속에 비밀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 비밀은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주파수를 가지는 것도 분명하다.

― [문학마당](2011.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