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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조건, 시인의 조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9. 22. 16:33

 

시의 조건, 시인의 조건

 

박태일 (시인. 경남대 교수)

 

1.

 

시 전문지나 시 마당이 강세다. 서점 한 자리에, 누리집 곳곳에 얹혀 있는 그들을 보면서 우리 시가 놓인 현주소를 아낌없이 느낀다. 이름도 어슷어슷한 것이 어깨를 부딪치며 자신을 웅변한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이가 그것을 골똘히 찾아 읽을 지는 알 수 없다. 한 해 시가 2만 편 넘게 발표된다는 통계도 이제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매체 과잉에다 시인 과잉이라 말해 보아야 호들갑일 따름이다. 한 매체가 나오기까지 그 자장 안에 모이고 얽힌 사람들 이해관계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시도 취향문화 가운데 하나다. 사진 동우회나 산악회처럼, 쓰는 이도 매체도 많을수록 좋다. 그만큼 시가 살아갈 향유층이 두텁다는 뜻 아닌가.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문학 사회 안에서마저 읽히지 않는 시 동창회 하듯 안쪽 결속만을 목표로 삼는 문단 조직, 고교 문예반 학생 높낮이에도 미치지 못할 솜씨를 한껏 떠벌리는 시인, 발간 목표가 말글을 빌린 창조 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데만 있는 듯싶은 매체, 게다가 기꺼이 그 둘레를 강아지마냥 돌 따름인 시 비평. 시가 나날살이 마당 곳곳으로 내려서는 길은 매우 바람직스럽다. 그러나 싸구려 공산품 찍어 내는 듯한 매체와 작품만 거기를 채운다면 거듭하는 사회적 낭비도 그에 더할 바 없다.

 

밤새 불친절한 시를 읽으면

내 못 가본 도시 리스본이

지구의 어느 끝에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막 리스본에 도착한 아침이 마가렛꽃을 밟으며 어느 집 안뜰로 걸어가고

오래 참은 강물이 당나귀 울음소리를 낸다

읽을수록 면도날 소리를 내는 리스본

이로써 나는 불친절한 시를 읽다가

모르는 나라 수도를 떠올린 이유를 말한 셈이다

 

- 이기철, 「불친절한 시」(『시와 사상』, 2011. 겨울) 부분

 

시인은 “밤새 불친절한 시”를 읽는다 했다. 그러난 그런 시를 밤새 읽을리는 없다. 두어 줄 읽다 던져 버릴 시들에 질린 시인의 ‘불편한’ 심기가 ‘밤새’ 읽는다는 경과 표지를 짐짓 가져다 놓게 했을 따름이다. 시인은 그런 “시를 읽으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포르투칼 서울 ‘리스본’을 떠올린다고 의뭉스럽게 말한다. 왜냐하면 한 번도 못 가본 곳일 뿐만 아니라 “지구의 어느”모를 땅 끝에 있을지라도 이즈음 나도는 시를 읽는 일보다는 훨씬 값어치 있을 인인 까닭이다. 게다가 리스본이라는 이름씨는 “읽을수록 면도날 소리를”낸다고 하지 않는가. 설마 남의 시나 시집을 면도날로 잘라 버리기야 하랴만은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불편한 마음만은 아낌없이 드러낸 셈이다. 시인은 ‘불친절한’ 시라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시 같지 않은 시들에 대한 심히 불편한 심기를 지리적 원거리와 면도날 이미지를 빌려서 ‘시적’으로 표현했을 따름이다.

 

2.

 

앞에서 본 바와 같은 불만은 이기철 시인 개인의 것이 아니다. 단순히 취향이나 안목 차이에서 비롯한 판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른바 ‘등단’을 했으니 시인이고, 시인이라는 이가 시라고 쓴 작품이니 시임이 틀림없다. 매체와 시인이 유유상종, 못 살릴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문제는 그런 현상이 시문학 사회 모두에 걸쳐 있다는 점이다. 작품 높낮이나 매체 상호 긴장이 엷어진 지도 오래다. 전문시나 대중시, 또는 교양시 어느 자리 없이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게 그것일 따름이다. 내집단 구성원끼리 움직이는 소리만 부산스럽다. 그런 가운데서 더욱 망가지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던 사회적 정합성이다. 우리 시가 예술문화계의 단순한 가장자리가 아니라, 어느덧 시민사회의 건전한 문화 역량이나 품격마저 왜곡시키는 주범으로 몰릴 지경으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기준이란 지나고 보면

언제나 그들만의 문법이 되어

화무십일홍의 흉흉한 시절도 가고

아직도 험한 시간의 그늘이 남아 있네.

-「시간의 그늘」 ( 『문학과 창작』 2011. 겨울) 부분

그러나 대지의 음경 같은 둔중한 추가 내 안에 있어

버짐처럼 번진 사막으로 머리채 끌고 가 내동댕이치는 깊은 밤

파르스름한 초승달의 칼 같은 눈초리 안에서

- 「내 영혼의 개와 늑대의 시간」(『유심』, 2011 11/12월) 부분

 

뜻밖에 아픈 사랑을 이해한다는 장력은

유사한 오해를 혹은 상해까지 함의하듯

조각 편, 편 당신이 모자로 쓴 주어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혀를 맛보지 못한 당신은 무수한 혀를 낳고

코를 맡아보지 못한 당신은 무량한 냄새를 낳아

색을 먹고 향을 먹은 이미지를 산란한다

 

- 「미식가」( 『시와 사상』, 2011. 겨울) 부분

 

옮긴 시 ①은 “ 세상의 기준”, “그들만의 문법”, “화무십일홍의 흉흉한 시절, 그리고 ”시간의 그늘“이라는 네 말마디를 중심으로 한 토막을 이루었다. 그런데 네 마디 모두 외연이 너무 큰 말들이라, 무슨 뜻을 담고자 한 것인지 읽는 이가 맥락을 잡을 수 없다. 시는 신문 기사류나 그로 말미암은 소박한 객담 토로와는 다르다. 굳이 시라는 형식을 빌려서 내놓아야 할 만큼 뜻 있는 생각이었을까라는 의심을 벗기 힘든 시줄이다. 읽는 이 마음에 울림을 줄 구체 체험이나 그것을 담아낼 표현력을 갖추지 못하다 보니, ‘의’ 토씨를 거듭 네 차례나 되풀이하며 생각을 어름하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마지막 ”시간의 그늘“이라 한 데서 그나마 감각적 어릉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 흔해 빠진 표현이어서 막연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시인은 자신이 쓴 이 토막에서 토씨 ‘의’를 네 번이나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살피지 못한 채 작품을 내놓았으리라.

 

②는 젊은 시인의 것으로 보인다. 외연이 큰 말을 마구잡이 굴리는 버릇에서는 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다만 ①과 달리 비유적 자질을 빌려 시의 표현성을 드높이겠다는 뜻이 뚜렷하다. 그러다 보니 ②는 세 가지 비유 층위로 짜였다. 첫째가 ‘둔중한 추가 머리채 끌고 가 내동댕이치다’라는 의인법 층위다. 가장 바닥에 놓이는 것이다. 둘째가 “ 음경 같은 둔중한 추”, ‘버짐처럼 번진 사막“, 그리고 “칼 같은 눈초리”로 이어진 직유 층위다. 셋째가 “대지의 음경”과 “초승달의 칼”이 꾸며 주고 있는 은유 층위다. 가장 높은 자리다. ②는 이러한 세 층위에서, 모두 여섯 개에 걸친 비유 표현을 빌려 “깊은 밤”과 나의 정황을 담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세 겹에 걸친 비유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울림을 지닌 것이 없다. 그들이 복합적으로 엮어내는 표현 가치라 할 만한 것을 엿보기란 더 어렵다. 다만 “초승달의 칼 같은 눈초리”라는 시줄에서 ‘초승달’을 ‘눈초리’로 본 데는 그럴싸하다. 그런데 그것조차 근대시 전통으로 볼 때 이미 1950년대부터 쓰인 데다, 서정주도 시 「동천」에서 잘 써먹은 관습 표현에 머물 따름이다. 따라서 ②는 비유 자체가 겉돌아 ①에 견주어 장식적이라는 힐난까지 받을 처지에 놓였다.

③ 을 쓴 시인은 재미있는 시법을 구사한다. 어떤 맥락을 순조롭게 만들어가기 보다 오히려 그것을 흩어 버리려는 듯한 말씨다. 그것을 위해 서로 의미 연관성이 큰 낱말이나 쉽게 연상되는 것을 고르지 않고, 생뚱한 낱말을 가져다 놓았다. 시는 크게 보아 말장난이다. 그러나 뜻있는 말장난이다. 그럼에도 이 시인의 시에서 엿볼 수 있는 뜻을 찾기란 어렵다. “ 뜻밖에 아픈 사랑을 이해한다는 장력”은 그렇다고 치자. ‘장력’이라는 물리어에 대한 정감적 이해가 없는 내 무지를 탓하면 될 일이다. 그 ‘장력’이 “유사한 오해를 혹은 상해까지 함의하듯”으로 치달으면서는 더 오리무중이다. ‘오해’ 다음에 ‘상해’를 끌어온 소리 되풀이는 말맛이라도 조금 있다. 그것조차 ‘함의’라는 무거운 낱말과 이어지면서 사그라진다. 다음에 이어진 “혀를 맛보지 못한 당신은 무수한 혀를 낳고/코를 맡아보지 못한 당신은 무량한 냄새를 낳아”라는 시줄은 낱말 바뀌치기를 했다. 이 시줄도 뜻을 찾아보고자 하나 ‘무수한’과 ‘무량한’이라는 부풀림에서 닫혀 버린다. 그러니 “색을 먹고 향을 먹은 이미지를 산란한다”는 마지막 시줄은 아예 벌말이다. 아마 이 시인은 막연하나 외연이 큰 한자어를 뒤섞으면 시성 詩性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로는 표현력 부족으로 말미암은 말 조합으로만 여겨지니 딱하다.

앞에 든 세 작품은 손쉽게 골라낸 본보기다. 단순 진술에서, 비유 표현, 그리고 낱말죽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시법으로서는 다 필요하다. 다만 이들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무엇인지를 시인 스스로 헤아릴 힘이 엷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작품이 오늘날 큰 매체, 작은 매체 할 것 없이 뒤섞여 나도는 데 있다. 화가는 빛깔을, 음악가는 소리를 빌려 자기 가능성을 극대화 시킨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말로써 말 많은 세상을 제 식대로 살고자 하는 이다. 그러니 말에 대해서만은 어느 사람보다 감각이 윗길이어야 할 일이다. 이 점은 나이나 작품 경향과는 관계없다. 그럼에도 말 다루는 첫 자리에서부터 의심스러운 시들이 마구잡이 나돈다.

 

 

아침에 쓰레기통을 열고

생각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시 원고를 구겨 버리는데,

훅,

 

 

과일 향기가 진동한다

아득하다, 멀리서 새소리 들려온다

세상의 모든 통은 그냥 통이다

 

썩은 과일, 귤, 사과 몇 조각 버렸는데

쓰레기통을 과일 바구니로 만들어 버린다

 

넌 무얼 담았느냐

쓰레기통이 나를 묻는다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군다

멀리서 나뭇잎 하나 떨어진다

 

- 원재훈, 「쓰레기통」 (『시와 시학』, 2011. 겨울) 부분

 

과일 쓰레기를 담은 ‘쓰레기통’도 하찮은 자신을 ‘과일 바구니’처럼 만들어 제 몫을 다한다. 하물며 시인이라고 이름을 내걸고 세상에 나돌고자 하는 이는 어떤 생각, 어떤 말로 이 ‘세상 통’을 채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제 ‘몸통’ 하나라도 무슨 마음을 담으며 살고자 하는 것인가. 원재훈 시인이 「쓰레기통」에서 말하고 있는 시 쓰기에 대한 깊은 자기 성찰은 한 개인의 탄식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날밤을 새우지 않더라도, ‘ 시 원고’를 ‘만신창이’까지 만들지 않더라도 시인일 수 있을 조건을 보다 넓고 멀리 헤아려 봄직한 일 아닌가. 도대체 귀한 밥 먹고, 넌 세상에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하고 우리 모두에게 되묻는 죽비 소리 짱짱한 시가 「쓰레기통」이다.

 

4.

 

관록이란 말이 있다. 몸에 갖추어진 위엄이나 권위를 뜻한다. 긍정적인 느낌만 주는 말은 아니다. 창작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관록은 아무렇게나,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록이 있다는 이도 속을 들여다 보면 엉망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세상이 허명을 씌어 놓은 경우다. 때로 전혀 관록이 붙을 세월이 아니라고 여긴 이에게서 누구 못지않은 당당한 관록을 느끼기도 한다. 관록이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단순한 세월 축적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 셈이다. 남달리 끝없는 열정이 뒷받침되었을 때 얻을 수 있을 어떤 질적 상태가 관록이다. 그런데 시 마당에서 관록이란 무엇일까? 화려한 이름을 내건 이런저런 문예지 목차를 휙휙 넘기다 그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곤, 굳이 작품을 펼치게 이끄는 힘일까? 나아가 그 작품을 읽고 나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만족감을 드러내는 다른 말일까?

 

낙엽을 밟으며 화장실에 다녀온 듯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이 발을 털며 들어와 마주 앉는다

표정을 보니 한 손금 위의 두 점,

향 날아가는 커피 앞에 놓고

둘 다 말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아, 지겨워, 어디 다른 손금 한번 타볼까?

그거 좋지, 콩깍지에서 콩알이 탁 튀어 날듯.

헌데

서둘러 전조등 켠 성급한 차들도 가라는 데로만 달리는 고속도로,

튈 곳은 어디?

 

- 황동규, 「늦가을 저녁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시안』 2011. 겨울) 부분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늦가을 저녁 고속도로 휴게소’ 정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졌다. “화장실에 다녀온”듯한 두 사람이 커피를 마주 놓고 앉는다. 그 둘의 낯빛이나 커피 향 날아가도록 말없는 행동거지로 보아 어느 새 데면데면하게 바뀐 사이다. 세월은 사람을 늘 그렇게 이끈다. 뜨겁게 타올랐던 대상도, 자신이 몸 바쳤던 일도 익으면 모든 게 예사롭다. 이 시는 그런 관계, 곧 서로“튈 곳”을 요량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둘이 ‘창밖을’보며 속으로 씹었을 성싶은 속말 대화를 직접 인용한 자리가 눈이다. “ 아 지겨워”부터 “탁 튀어 날듯”까지, 말하고 다시 받는 두 월이 그곳이다. 다른 관계, 다른 만남을 얻고자 하는 속내를 “다른 손금”타기와 “콩까지에서 콩알이” 튀어 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어떤가. 쉽고도 적확하지 않은가. 아무나 이룰 수 있을 솜씨가 아니다. 이런 경우, 관록이란 늘 싱싱하게 현실과 맞닥뜨리기 위해 애쓰는 시인의 가뭇없는 열정에 붙이는 다른 이름이다.

 

지리산 칠선계곡

거친 눈보라 속을 나는 헬리콥터는

몇 시간 동안 지상과 통신두절이 된다.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겹겹이 쌓인 눈 헤집고 사투를 벌이는 이들은

사료와 낱알갱이 수십 톤씩을 공중에서 뿌려가며

먹이를 다 줄 때까지 교신을 끊는다.

혹시나 들짐승들이 얼음계곡에 미끄러져

먹이를 놓치면 어쩌나.

식량을 찾지 못해 굶어 죽으면 어쩌나.

 

(...중략...)

 

구름 사이로 설핏 햇살 비추고 계곡엔 선홍빛

저녁놀이 걸린 걸 보고서야

다시 세상과의 통신을 위해 떠난다.

기체를 급상승해 계곡 멀리 비행운처럼

노을을 꼬리 달고 사라지는 이들은 누구일까.

 

- 노향림, 「겨울 헬리콥터」( 『시인수첩』 2011. 겨울) 부분

 

오랜 세월 한결같이 구체적인 감각을 온몸으로 담아낸 노향림 시인의 특장이 잘 드러나는 시가 겨울 헬리콥터다. 이른바 생태시․ 생명시라며 괜스레 중언부언 젠체 하는 시들과 다른 선명한 풍경을 보여준다. 겨울 지리산, 곧 두류산 골짝 골짝을 돌면서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산림 항공기 승무원을 글감으로 삼았다. 가끔 산림항공본부에서 혹한기에 벌이기도 하는 야생조수 먹이 주기와 맞물린 일이다. 그들은 짐승들이 “먹이를 놓치면 어쩌나”하는 염려로 “먹이를 다 줄 때까지” 바깥과 “몇 시간 동안” 교신을 끊은 채 일에 열중한다. 그러한 그들의 섬세한 마음자리가 이 시의 눈이다.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간결하게 옹근 자리다. 시인은 그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숨기지 않았다. “계곡 멀리 비행운처럼/ 노을을 꼬리 달고 사라지는 이들” 이라는 아름다운 시줄이 거기서 빚어졌다. 시인이 느꼈을 놀라움과 공감이 고스란히 읽는 이의 것으로 되울리는 작품이다. 참된 생태시란 생태 문제를 짚어 대는 데서 더 나아가 예사 사람의 생태 윤리를 드높이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간단한 참을 이 작품은 증명한다. 한 편 한 편 최선을 다 해온 시인의 오랜 자긍심과 관록이 이렇듯 빛나는 풍경을 쉬운 가락에 오롯하게 담을 수 있게 한 셈이다.

 

바람에 간들간들 자지러지는 봄날

오로지 흔들리고 또 흔들일 일만 남은

보리 보러 왔다

 

아무리 밟아도 눈빛 하나 까닥 안 하는 건 괜찮아

주머니 깊숙한 곳에 영영 머물러도 괜찮아

이제까지 있던 옆구리가 오늘 없어졌어

그런데 왜 하필 보리는 보린가

 

더 이상 오갈 데 없으니

슬그머니 빠져나간 꽃들이 돌아오니 않으니

나간 자리마다 다시 새파랗게 새순 돋아도

무엇이든 죽도록 휘감고 휘감아야 한다

 

옆 구리란 말이 사라질 때까지 간들거리는

옆구리란 말을 모르고 살아도 푸르디푸른

보리 보러 간다

보리 잊으러 간다

 

- 박미란, 「보리」(『애지』 2011 겨울)

 

 

모두 네 토막으로 이루어진 시다. 글감은 보리. 시인은 ‘봄날’, “오로지 흔들리고 또 흔들릴 일만 남은” 듯한 보리를 보러 보리밭에 왔다고 말한다. 그런 뒤 보리의 생태를 두 토막에 걸쳐 일깨운다. 마무리 넷째 토막에서는 다시 “보리 보러 간다”는 월을 되풀이했다. 시인은 보리를 보러 보리밭에 갔고, 앞으로도 거듭 가게 되리라. 까닭은 둘이다. 먼저 보리나 시인 모두“ 어제까지 있던 옆구리가 오늘” 빈 외로운 상태다. 게다가 오로지 흔들릴 일만 남은 보리와 자신은 새삼스럽게 한 몸이다. 그런데 그 외로움은 깊다. 벗어나기 힘들지 모른다. 왜냐하면 “보리 잊으러” 보리밭에 가지만 보리는 언제까지나 거기서 ‘간들거리’고 ‘푸르디푸’를 것이기 때문이다. 흔한 글감인 보리를 빌려 흔한 주제인 외로움을 이처럼 오롯하게 담아내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셋째 토막에서 잠시 거슬리는 ‘죽도록’이라는 낱말마저 재치로 여겨진다. 어느새 작품 「보리」는 시창작의 핵심 조건 가운데 하나를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다. 누구나 겪는 듯이 보이는 여느 세상살이를 어떻게 내 식으로 담아낼 것인가라는 간단한 자문자답이 그것이다.

 

4.

 

좋은 시란, 시인 스스로 떠맡지 못할 외연 큰 낱말을 마구 휘두르며 자신도 느낌이 없을 번화한 수사로 겉칠해서 이루어질 일은 아니다. 괜스레 깊은 깨달음을 지닌 양 꾸며 보아도 마찬가지다. 말 같지 않게 별로 해대는 말을 벌말이라 하거니와 우리 둘레에 시는 많으나 그 가운데 적지 않은 것은 벌말시로 보이니 딱하다. 문제는 스스로 시인이라 하면서도 그런 사실을 헤아릴 노력을 하지 않는 데 있다. 넘쳐나는 매체의 편집망에 얹혀 끼리끼리 챙기고 몰려다녀 보았자, 좋은 시를 쓸 깜냥이 아니라면 만년 문단 머슴이나 거간 노릇일 따름이다. 시인 스스로 제 시의 주인 자격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그런 이들의 힘을 더 잘할 수 있을 다른 일로 돌린다면 자신에게나 우리 사회에 얼마나 도움이 크랴.

시인은 우리 말글의 창조 가능성에 이바지하고, 그 높낮이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러자면 열중이 최선이다. 일류시도 이류시도 삼류시도 다 필요하고, 전문시인에 대중시인에 교양시인까지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 낱낱이 자신의 자리와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싱싱한 역동을 일궈 내지 못한다면 시장 상인회 조직보다 못할 문단 이해관계 말고 무엇이 남겠는가. 기실 한 편의 시가 이룰 수 있는 일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좋은 시 한 편이 주는 위안과 행복은 시인 자신에게나 세상에 무엇보다 훌륭한 선물이다. 좋은 시는 작은 날갯짓으로, 작은 목소리로도 두고두고 되울리는 아름다운 혁명을 몸소 실천한다. 세상이 막무가내 흘러가고 취향이 마구잡이 바뀌는 것처럼 보여도 건강한 사회는 좋은 시를 포기하지 않는다. 시인의 삶은 사소할지 모르나 그가 쓰는 시는 두고두고 무거운 까닭이다.

 

한 번쯤

하루쯤

한 생 生쯤은 몸을 바꾸고 싶은

 

저 미친 외출을 시라고, 시인이라고 말해도 되나

- 이화은, 「나비」 (『시안』, 2011. 겨울) 부분

 

시인은 말한다. 애벌레가 나비로 바뀌듯 오롯이 “한 생”까지 “바꾸고 싶은” 그 “미친 외출”이 시라고, 시인이라고. 우리는 어떤가. 한 번이라도 시를 향해 미친 적이 있었던가. 미쳤던 지난날 추억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오늘이다. 그렇다. 매체과잉에, 시인과잉에, 반반한 낯빛 요란할 따름인 시마당이라도 걱정만 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자기 단련을 포기하지 않을 젊은 시인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비 한 마리는 가볍고 하찮아 보인다. 그러나 그 날갯짓은 한순간에 봄빛 환한 모든 산골짜기며, 철철이 그 둘레 마을에서 살다간 사람들이 감당했을 짙은 삶의 무게를 일깨운다. 어찌 일생일업 一生一業, 일생일편 一生一篇의 가혹한 저주를 포기할 수 있으랴. 좋은 시를 향해 “미친 외출”을 감행하는 젊은 시인이 2000년대도 열두 해째로 성큼 올라선 이 봄날 어느 곳에서 힘차게 날갯짓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 계간 『시와시학』 2012년 봄호 「계간시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