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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왜 감동이 없는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1. 11. 21:36

 

한국시 왜 감동이 없는가

 

우리시의 현황과 감동의 문제/김윤정

 

 

1. “오늘의 한국시가 감동적이지 않다”라는 명제

‘우리 시가 감동적이다’라는 명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우선 시가 갖춰야 할 규준들이 상정되어 있어야 하고 특정 시들이 이 틀에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할 때 ‘시가 감동적이다’라는 말이 성립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규준들은 개개인마다 모두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특정 시에 감동받는다고 해서 그 시가 모든 사람에게 감동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감동이란 경험과 의식이 공유됨으로써 대상과의 정서적 전이가 이루어질 때 빚어지는 현상인 까닭에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기실 어떤 사람이 특정 대상에 열광한다고 해서 그 현상이 누구에게든 납득될 리는 없다. 감동은 특정 개인의 감정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고 시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개인이 상정하고 있는 규준에 합치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시가 감동적이지 않다’라는 명제를 단호하게 내릴 수 있는 데에는 현재의 한국시의 경향들에 대해 성찰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의 한국시가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 규준과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명제이다. 즉 오늘의 한국시가 시로서 지녀야 할 주요 가치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혹자는 ‘모든 좋은 시가 감동적일 필요는 없다’라는 말로 대립할 수도 있겠고, 많은 감동적인 시를 제시함으로써 ‘이 명제는 거짓이다’를 주장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시를 향한 열정을 지극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명제 자체가 시인들에 대한 모욕이라고까지도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반론들은 모두 타당성을 지닌다. 이들 반대 논거들에는 충분한 근거들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시가 감동적이지 않다”라는 명제를 거짓이라 하여 버리는 대신 이것의 의미역을 찬찬히 궁리해 간다면 의외로 우리는 오늘날의 시에 관한 적지 않은 진리를 길어올릴 수 있을 듯하다. 이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하고 그 안에 깔려있는 대전제와 논거들에 대해 따져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쩌면 오늘날 우리시가 안고 있는 중요한 한계 및 문제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한국시의 시적 감동을 위한 대전제들

시에 있어서의 감동의 문제를 풀기 위해 우선 한국시가 걸어온 자취를 따져보는 것이 유효할 듯하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한국시가 그간 어떠한 역할들을 했었는가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오늘날의 시에 대해서도 이러한 규준을 하나의 기대치로 부여하는 일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것은 시의 인식적 기능 및 사회 비판적 기능과 관련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우리시가 당대 사회의 성격 및 부조리를 인식하고자 하였고 그에 기반하여 현실을 개혁해나가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주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우리 시사에서 시의 이러한 기능이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역능의 시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한 순간도 배제되지 않았다. 그것은 매 시기의 역사성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모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시의 기능은 그 전통이 공고한 까닭에 기실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오늘날의 시들을 향해서도 그 기능을 하나의 시적 규준으로서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시에 대한 우리의 의식 가운데에는 당대 사회가 어떠하든지, 어떻게 변화하였고 얼마나 복잡하든지 간에 시는 의당 사회의 구조를 인식하고 사회의 문제를 파악하며 이를 타개해 나가기 위한 열정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시가 다른 매체와 달리 인식성을 고유 권한으로 지니고 있으며 그 정신에 있어서 숭고함을 추구한다는 데서 비롯되는 요구에 해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시는 다른 예술들과 달리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것, 또한 그러하되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매체들, 특히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전자매체의 언어와 매우 다른 위치에 그 본령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우리는 ‘시가 어떠해야 한다’와 관련된 다른 전제를 또한 상정해 볼 수 있다. 시는 그 무엇에 대해서 굳이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울 권리가 있으며 대상에 대한 책무를 지니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를 비판한다거나 이를 해결하려하는 것은 시에 부과된 의무일 수 없다는 관점이 이와 관련된다. 더욱이 언어란 대상을 명명하는 순간 대상과 분리되는 운명을 지니는 까닭에, 즉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이며 서로 비껴가고 미끄러지는 관계에 있으므로 시에 인식의 기능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인식론 대신에 시는 미학적 기능을 지녀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시는 예술의 일종이므로 언어에 의한, 언어를 위한, 언어의 축조물을 지향하는 것이 시의 본질적 가치라는 입장이 여기에 놓여 있다. 실제로 우리 시사에서 언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경향 역시 시의 주요 축으로서 존재했었고 이것이 서구적 모더니즘 사조로, 해체시로, 그리고 오늘날 소위 미래파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시적 경향은 대상보다는 언어 자체를 중시하게 되고 인식적 기능보다는 미학적이고 기교적인 기능을 추구해 왔다. 시의 자율성과 미학성에 기반하는 이러한 경향은 역시 그 시대의 미학적 조건에 따라 양식을 변화시켜왔지만 시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시사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참여시와 순수시로 대립하여 왔던 이들 전제들 외에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다른 경향 한 가지는 소위 서정시와 그 전통에 관한 것이다. 서정시는 대상과 자아의 융합을 추구하는 동일성 미학의 대표적 장르이다. 그것이 우리 시사에서  가장 중요한 축의 하나를 담당하였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서정시라는 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시들과 함께 말하기에는 다소 애매모호한 범주임에는 틀림없다. 관습적으로 보면 서정시는 반리얼리즘시로 규정되거나 반모더니즘시로 규정되곤 하였지만 엄밀히 말해 서정시는 앞의 두 경향들을 포함하는 상위 범주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리얼리즘도 서정을 추구할 수 있고 모더니즘시 역시 그것을 구현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서정시적 경향을 우리는 대상에 대한 인식적 기능을 인정하되 그 대상을 사회나 혹은 그와 관련된 현실비판적인 것으로 설정하지 않는 시, 대상에 대한 인식을 옹호하되 사회가 아닌 개인에, 외면보다는 내면,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나아가 보이지 않거나 명료하지 않은 세계까지도 인식하고자 하는 시라고 보면 위의 경향들과 구분이 될 듯하다. 다시 말해 서정시적 경향은 인간의 존재론적 지대를 탐색하려 하였고 또한 이 지대를 가능한 확장시키며 전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경향은 우리시사의 가장 큰 흐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범박하나마 경험적인 국면에서 우리가 “오늘의 한국시에는 감동이 없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대전제가 될 수 있는 명제들을 살펴보았다. 정리하면 우리가 시에 요구할 수 있는 규준들은 첫째, ‘시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둘째, ‘시는 언어미학적 예술성을 추구해야 한다’, 셋째, ‘시는 인간의 존재론적 지대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이다. 물론 개개인에 따라 다른 다양한 전제들 또한 가능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앞서도 말했듯 우리는 우리가 시에 대해 설정한 가치 규준에 기대어 시를 정서적으로 전유한다는 점일 터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체로 이 세 가지 규준들에 의해서 시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게 마련이다. 시가 현실에 대해 민감한 촉수를 드리우고 이에 팽팽한 긴장을 드러낸다면 이를 좋은 시로 여기는 이가 있을 터이다. 지난 7,80년대와 같은 리얼리즘시가 더 이상 주목받지 않는다고 해서 시에 인식과 비판의 기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얼마 전 문단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시의 정치성에 관한 논의가 뜨겁게 이루어졌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반면 시가 다른 목적성에 종속되는 것에 반대하며 시의 해방과 시적 언어의 진보를 추구하는 경우 이를 시의 가장 가치 있는 규준이라 여길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언어의 실험성이 최대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의 내용이나 대상 지시성과는 상관없이 독자에게 흥미와 만족을 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시에 관한 대전제가 그러하다면 이러한 시들에서 쾌감과 희열을 느끼는 일은 당연히 가능하다. 그것이 설사 난해하여 소통을 외면하고 언어 유희 및 자기 만족적 세계에 탐닉해간다 해도 이런 대전제에 동의한다면 그러한 시는 독자에게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다. 오늘날 소위 미래파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그러한 경향 자체가 아니라 시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 없이 유행과 문단권력적 마력을 추종하는 허약한 아류시들임은 물론이다.

우리는 끝으로 존재론적 시적 경향에 대해서도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시가 존재의 명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다루어내었을 경우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언어로 붙잡기 힘든 정서의 빛깔을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시를 보고 경탄에 빠져보지 않고서 시에 입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련한 대상을 향하여, 인간의 내면에 드리워지는 세계와 자아의 아슬한 겹침의 장면들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이를 절묘하게 명명하는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내면에 새겨지는 세계의 상들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이들은 흔히 서정시라 일컬어졌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동일성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이러한 시들이 가장 보편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도 이들이 지니고 있는 동일성의 미학 구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시 역시 언제나 상투성을 경계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그것이 내면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대신 안이한 소재 및 규범적 인식에 매몰될 때 서정시는 시로서의 긴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이미 고투를 잃은 서정시라면 그것이 제아무리 공통의 경험을 유도하고 제아무리 정서를 겨냥하여 쓰여진 시라 하더라도 독자에게 감동으로 다가오기는 힘들다.

각각의 세 가지 경향들을 구분하였지만 실재의 시들은 이들의 경향 사이를 가로질러서 서로 혼재되기 마련이다. 당연히 하나의 시 속엔 세 가지 성격들이 일정 정도씩 혼합되어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리얼리즘의 시이면서 언어의 형식미가 추구될 수 있으며, 또한 내면에 새겨진 자본주의적 체험들은 실존에 관한 중요한 문제 제기로 나타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미래파의 시들에 현실 인식이 거세되어 있다는 관점 역시 편협한 사유라 할 수 있다. 진지한 젊은 시인들의 시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어떤 규정된 문법보다도 이들의 언어에 투쟁적인 현실 인식이 가로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이들의 언어 형태 자체가 첨예한 현실 감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문법의 파괴와 언어의 유희를 보이지만 이 속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감성들의 실존적 번민을 읽는 것 역시 낯선 일이 아니다. 요컨대 모든 시들은 각각의 경향들을 각기 정도를 달리하며 가로지르며 공유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어느 특정한 시의 경향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접근하는 일이 얼마나 무익한지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경향들에 대해 권력을 부여하고 자신의 세계나 스타일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맹종하는 일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들 경향 사이에 이념의 벽을 세우고 세대 간의 간격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시의 소통을 가로막는 일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진보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허위적 장애를 허물고 다원주의를 긍정하는 진정한 포용의 자세를 보일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경향이 옳은가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인의 시가 어떤 양태를 보이는가를 종합적이고 귀납적으로 검토하는 일이고 이 속에서 시인이 얼마나 철저한 자기 인식과 시에 대한 감수성을 구현하고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시에 열린 자세를 취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보다 많은 시에서 감동을 얻게 될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시는 한층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3. 감동을 주는 근작시들

어느 일본 기의학자가 생명의 본질을 엔트로피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흔히 무질서, 혼돈으로 알려져 있는 엔트로피는 그의 말에 의하면 ‘더러움’이다. 인체가 물질과 에너지의 대사를 한 후 발생하는 부산물로서의 더러움이 엔트로피이다. 때문에 인체가 건강해지려면 이 엔트로피를 버려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을 비우고 또 비워내야 건강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 안에 엔트로피가 가득 차게되어 결국 인체는 죽음에 이른다는 이론이다. 그의 이론은 동양의 비움의 철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면서 인체에서의 에너지 운용의 중요성을 손쉽게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를 다루는 시에도 이를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과잉되고 흘러넘치는 언어는 시의 생명력을 훼손한다. 절제된 언어, 군더더기 없이 다루어지고 있는 언어, 효과적으로 콘트롤되는 언어는 그 자체가 에너지로 기능한다. 그러한 시는 무겁게 처지지 않고 생생하며 우리의 정서를 한 순간에 자극한다. 이는 시적 언어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것이자 팽팽한 힘으로 살아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이 산문시이든 혹은 그것이 언어유희의 시이든 시적 정황에 맞게 언어가 잘 컨트롤되고 있다는 것은 독자에게 즉각 인지된다. 시의 훌륭한 호흡이자 좋은 숨결이라고도 할 수 있을 언어의 이와 같은 형식은 그것 자체가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바로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시적 감동을 일으키기 위한 첫 번째 요인이라 믿는다. 모든 시는 가장 우선적으로 이를 고려해야 하고 뛰어난 시인은 바로 이를 잘 다룰 줄 아는 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그러한 사례들을 다음 몇몇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서 확인해보자. 유안진의 시에는 한 치의 군더더기도 허용하지 않는 시인의 철저한 언어 운용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시는 마치 동그란 구슬이 입 안에서 구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시는 모난 사물을 그녀의 언어로 둥글게 둥글게 다듬는 과정을 재현하는 듯하다. 마치 조각가가 거친 바위덩어리를 가져다가 이를 자신의 세계에 맞추어 모양을 내고 곱게 다듬어가듯이 시인은 그의 언어의 연장을 세심하게 다룬다.   

 

쉬운 걸 굳이 어렵게 말하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참말만 하며

당연하지 않다고 의심해보다가

문득문득 묻게 된다

 

유리벽을 지나다가

니가 나니?

걷다가 흠칫 멈춰 질 때마다

내가 정말 난가?

―유안진, 「불타는 말의 기하학」(≪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1. 7~8) 부분

 

이 작품은 짧은 구절이지만 호흡을 다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리듬을 고르는 시인의 세심한 감각은 관념과 철학으로 투박해질 수 있는 내용을 시적 상태로 이끄는 데 기여한다. 습관과 상투성에 익숙해져 있는 인식을 회의하고 있는 위 시의 시적 내용은 반복의 묘를 통해 긴장으로 이끌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는 ‘쉬운 걸 굳이 어렵게 말하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참말만 하며’ 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너무도 익숙한 우리 현대인들의 세태를 의심하고 비판하고 있다. 시인은 모두가 경험하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로 삼지 않는 현대인의 삶의 태도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시인에게 의심의 대상은 모든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나’에게로까지 이른다. ‘나’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을 유도하는 위의 시는 모든 확실하고 분명한 것에 대해 성찰의 추를 드리움으로써 우리에게 시가 지녀야 할 예민한 인식 기능에 대해 상기시킨다. 시인으로서의 철저한 자의식과 태도를 내비치는 위의 시를 통해 우리는 시인에 대한 크나큰 신뢰를 확인하게 된다.

언어의 효과적인 운용은 미래파 담론을 구사하는 젊은 시인들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서효인이 시적 언어에서 보여주는 운용의 묘는 충동적이고 유희적인 언어 가운데에도 절제와 긴장이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평화는 전투적으로 지속되었다. 노르망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인천에 닿기까지, 당신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검독수리가 보이면 아무 참호에 기어들어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포탄이 떨어지는 반동에 당신은 순한 사람이었다. 늘 10분 정도는 늦게 도착했고, 의무병은 가장 멀리에 있었다. 지혈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며 적혈구의 생김처럼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전투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통신병은 터지지 않는 전화를 들고 울상이고, 기다리는 팩스는 오지 않는다. 교각을 폭파하며, 다리를 지나던 사람을 헤아리는 당신은 정확한 사람이다. 굉음에 움츠러드는 사지를 애써 달래며 수통에 물을 채우는 당신은 배운 사람이다. 금연건물에서 모르핀을 허벅지에 찌르는 당신은 인내심 강한 사람이다. 허벅지 안쪽을 훔쳐보며 군가를 부르는 당신은 멋진 사람이다. 노래책을 뒤지며 모든 일을 망각하는 당신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서효인, 「백년 동안의 세계대전」(≪현대시≫, 2011. 9) 전문

 

우리의 현실이 안고 있는 부조리를 생생한 실감으로 전달하고 있는 위의 시는 세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를 두고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이라는 제목처럼 지구촌에 끊이지 않는 전쟁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겠고 현대사회의 치열한 경쟁적 행태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겠다. 전시 상황에 대한 묘사를 통해 시는 주체가 놓인 불안하고 부조리한 순간을 잘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시의 인식적 기능과 비판적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시의 진정한 매력은 시인의 언어구사력에 있을 듯하다. 반복되는 “당신은 ~한 사람이었다”는 진술들은 시적 어조를 이끌어가는 주된 요소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시의 흐름에 있어서의 속도와 무게를 조절해주는 주된 장치로 기능한다. 마치 후렴구처럼 이어지는 이들 어사는 전쟁의 긴박감과 무거움을 전복시키는 데 주효한 인식적 기능을 한다. 이들 어사들에 의해 사태의 아이러니가 비판되고 폭로된다. 그리고 거듭되는 반복을 거친 뒤 결국 독자는 인간을 위한 인간다운 상태가 무엇인가에 관한 인식으로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언어의 절묘한 운용은 현실을 효과적으로 고발함과 동시에 그것이 진정으로 현실 인식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시를 통해 우리는 현실비판이 단지 억압적인 사태를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고 각성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자신 특유의 언어구사력을 통해 이러한 기능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뜨겁고도 차가운, 활기에 차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언어 사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메타포의 활용을 통해 충실한 서정성을 구현하는 사례 역시 시의 진정한 맛을 보여준다.  우리는 다음의 시에서 세계에 관한 시인의 인식과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부드러움이 시에서 어떻게 조화롭고 아름답게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닳은 구두 뒤축을 갈기 위해

구둣방에 갔는데, 늙은 수선공이

뒤축 대신 사과나무를 심어놓았다.

걸음 걸을 때마다

사과꽃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음산 옆구리의 산골짜기가 고향이라던 늙은 수선공은

4월이 되면 늑골 깊은 곳에서 사과꽃이 핀다고 했다.

그러니까 늑골 깊은 곳은, 이제

돌아갈 수도 없는 옛집 마당.

늙은 수선공은, 이 도시 거리를

천진한 웃음이 사과꽃 향기로 퍼지는 마당으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며, 뒤축 대신 사과나무를

구두에 심어놓는 불가해한 기술을 보여줄 리 없다.

―배한봉, 「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시현실≫, 2011. 여름) 부분

 

동화적 설정으로 자신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그리고 있는 위의 시에서 시를 이끌어가고 있는 핵심 어휘를 지적한다면 단연 ‘사과꽃’이다. 시에서 ‘사과꽃’은 사실 오감의 자극을 겨냥해 도입된 시어이다. 그것은 먼저 시각적 이미지로 환기되며 나아가 소리로, 향기로 그 이미지의 영역을 넓혀간다. 그리고 결국 ‘사과꽃’은 시 전체의 의미를 유도하고 시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강력한 거점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사과꽃’이 환기하고 있는 이미지는 매우 강렬한 것이다. 그것은 화사함과 사각거리는 느낌과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와 아름답고 행복한 공간으로 기억된다. ‘사과꽃’은 황폐하고 삭막한 도시 공간과 대비되는 서정적 유토피아 공간을 형상화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 구현하고 있는 언어 미학적 형식은 매우 탄탄하다. 우리는 시를 통해 진정으로 ‘사과꽃’이 점차로 피어나는 과정을 체험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피어나는 ‘사과꽃’이 향기를 발산하기 시작하고 점점 더 강해지는 향기와 자태가 천지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장소로 만드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시인에게서 언어를 통해 세계를 축조해가는 빼어난 감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시인은 ‘사과꽃’이 핀 공간을 ‘성전’으로, 구두 뒤굽 대신 ‘사과나무’를 박아넣은 ‘늙은 수선공’을 ‘성전’을 세우는 사제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물론 현실적인 것과 하등 상관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망과 꿈과, 그리고 인간의 행복한 느낌들을 잘 끌어내어 이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행복에의 우리의 보편적인 비전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인 셈이다. 더욱이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 창조력은 독창적이고 고유하다. 우리가 이 시에서 즉각적인 감동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살펴본 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시들은 그 속에 우리가 흔히 시에 요구하고 기대하는 바의 여러 전제들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들은 시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언어와 세계에 있어서 총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간 리토피아 44호(2011년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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