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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언어 경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9. 21. 10:51

 

시와 언어 경제

 

박태일 (시인. 경남대 교수)

 

1.

 

시는 관습이며 말놀이다. 그런 까닭에 지켜야 할 것도 있고 고칠 것도 있다. 시인은 그 일을 즐기고 문학사는 그것을 기록한다. 시문학 사회는 세상살이 가운데서 그런 일을 누리는 다채로운 영역과 양상을 지닌다. 그러면서 스스로 다른 문학 갈래와 견주고 티내면서 사회적 정합성을 가다듬어 왔다. 그 모습은 언어권마다 다르고 문화권마다 다르다. 한글로 써서 출판해 읽는 문자시로서 우리 근대시 또한 지난 한 세기 동안 한시문을 멀찌감치 뒤로 제쳐두고 여러 길로 자라왔다.

시가 관습적인 말놀이인 만큼 규칙은 따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동네 아이들 놀이에도 그것이 있는 바와 같다. 그 가운데 핵심이 언어 경제의 원칙이다. 일반 경제학에서 사람은 합리적으로 돈을 쓰고 물건을 소비하는 존재다. 그래서 돈은 적게 들이고 이익은 최대로 얻으려 애쓴다. 이러한 실물경제의 전제는 시의 언어 경제에서 그대로 맞물린다. 다만 시인이나 시문학 사회가 소비하고 유통시키는 것은 돈, 상품보다는 무형적인 상징 재화에 더 초점이 놓인다.

따라서 턱도 없는 일에 시인은 목매고, 돈 되지 않을 곳에 엄청난 노력과 돈을 즐겨 붓는다. 이러한 상징 재화의 소비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으뜸 특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의 언어 경제는 현실 경제와 다르지 않다. 이른바 최소 비용에 최대 효과다. 다만 시에서 최소 비용이란 다름 아니라 언어를 뜻할 따름이다. 이런 원칙을 배우고 익히지 못하면 좋은 시 쓰기란 틀렸다. 비유컨대 마구잡이 주먹을 날리는 동네 깡패 쌈질과 권투 선수의 운동 경기 사이의 차이가 이런 데서 비롯된다.

오랜 세월 서정시는 이러한 놀이 규칙을 빌려 다른 문하 갈래와 나뉘는 특성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 때 최소 언어로 최대 효과란 멀리 보면 시인과 작품의 평판이 지니는 시간적 지속과 공간적 확산이라는 외적 문맥과도 맞물린다. 다시 말헤 오래 넓게 되읽히는 힘이 그것이다. 말은 말이되 짧게 줄인 말인 탓에 특별한 쓰임새, 무거운 모습으로 존재해 온 것이 시다. 길게 말을 푸는 소설과 달리 말을 억누르면서 오히려 많은 말을 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고자 하니 시는 처음부터 암시적인 말, 역설적인 말로 살아왔다.

그래서 시 쓰기의 처음은 무엇보다 이러한 언어 경제를 배우는 일이다. 시 읽는 버릇 또한 그 일을 잘 헤아려 챔질해 생각하고 느끼는 훈련이 있다. 시인이 언어 경제에 눈 뜨지 못하고, 언어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다른 갈래 작가와 다를 바 없다. 아예 시인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이 일은 근본 역량과 관련하는 자질이다. 여름 철 시들을 읽으며 그런 점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우리 당대 시의 고질 가운데 하나다. 그 겉만이라도 한번 짚어 보기로 한다.

2.

 

언어 경제란 쪽에서 볼 때 가장 눈에 많이 띄는 문제 경향은 한 편의 작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나 사건을 품으려는 과욕에 빠져든 경우다. 그러다 보니 마구잡이 말을 흩어 대다 낭패를 겪는다. 다른 한 문제 경향은 이와 거꾸로 시의 낱말밭이 거기서 거기인 채로 한 골짜기 안에 좁직하게 몰려 앉은 경우다. 전자를 말이 퍼진 시라 하고, 후자를 말이 몰린 시라 일컬을 수 있다. 낱말밭의 얼개 짜기라는 점에서 볼 때, 모든 시는 이 둘을 끝으로 한 사이 어느 자리에 놓인다.

 

수면제를 사 모으던 겨울이 있었다

제발 아침이 오지 말기를!

어둠을 갈던 먹밤이 있었다

결국 내 손으로 끊지 못했던 질긴 나이가 있었다

어머니의 통곡 소리에 폭삭 늙어 버린 슬픈 귀가 있었다

백지로 돌아가기 위해 그 해 눈은 내리고 또 내리고,

사람들은 하늘이 미쳤다고 했다

 

- 「폭설」( 『시와 시학』 여름호) 전문

 

이 작품은 월 반복을 빌린 작품이다. ‘폭설’ 내린 ‘겨울’에 겪었을 법한 삶의 파란을 담고자 했다. 그것을 몸말과 풀이말이 ‘무엇이 어떠하다’라는 월로 네 차례나 거듭하고, 마지막에는 ‘무엇이 어찌하다’는 겹월 하나를 뼈대로 삼아 짰다. 그 ‘무엇’에 걸리는 것이 ‘겨울’, ‘먹밤’, ‘나이’, ‘귀’다. 그런 다음 마지막 겹월에서 보이는 ‘눈’과 ‘사람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받는 그림씨는 ‘있었다’와 맨 마지막 월의 움직씨 ‘내리고’와 ‘했다’다. 아래서 밑줄 친 자리다. 낱낱의 월은 다시 꾸밈 요소를 모두 하나씩 무겁게 얹었다. “수면제를 사 모으던‘과 같이 아래서 진하게 표시한 부분이다. 모두 다섯 군데다. 그것을 그려 보이면 아래와 같다.

 

수면제를 사 모으던 겨울이 있었다

제발 아침이 오지 말기를!

어둠을 갈던 먹밤이 있었다

결국 내 손으로 끊지 못했던 질긴 나이가 있었다

어머니의 통곡 소리에 폭삭 늙어 버린 슬픈 귀가 있었다

백지로 돌아가기 위해 그해 눈은 내리고 또 내리고,

사람들은 하늘이 미쳤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이 지닌 월 짜임과 됨됨이를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어떤가 ①에서 ⑤까지 꾸밈 요소 다섯 군데의 말들을 끌어 잡은 자장이. 길지 않은 시임에도 유기적인 맥락을 떠올릴만한 암시 공간을 만들고 있는가? 그저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을 경험에 대한, 그리 낯설지 않은 표현들을 산만하게 끌어다 놓은 모습은 아닌가? ①에서 ⑤까지 꾸밈 요소가 분명 고통의 크기를 암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한 줄기로 꿰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있었다’라는 그림씨로 뒷받침한 시줄로써 떠올릴 수 있는 시의 공간 또한 막연할 따름이다. 폭설내린 정황에 대한 범상한 표현을 늘어놓으면서 그 겨울에 겪었을 법한 가족의 고통에 대한 필연성 없는 암시에 그치고 말았다. 힘주어 담고자 했을 경험 현실에 시인의 입이 못 따라가고 있는 맵시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간 가족의 고통을 읽는 이에게 오롯하게 되돌려주기 위한 언어 조율 능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더 엄밀하고도 독자적인 낱날밭을 지닌 시로 손질을 할 일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길은 뜻밖에 간단하다. 꾸밈 요소를 풀어 버리기. ‘있(었)다’라는 존재어를 동태어로 바꾸면 훨씬 나아질 것이다. 보기를 들어 ①에서는 ‘ 겨울’을 몸말로 내세워 ‘겨울’이 수면제를 사 모았다는 풀이말로 바꾸고, ②에서는 ‘먹밤’을 몸말로 내세워 ‘어둠이 먹밤을 갈았다’와 같은 월로 바꾸는 길이 그것이다. 나머지도 비슷하게 되쓰는 일이 가능하리라. 좋은 시인이라면 겉멋에 빠져 말을 낭비하지 않고 낱말 하나하나가 적확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얼개를 짜야 한다. 말을 늘어놓았음에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그 말 거래는 망친 장사다. 손해를 봐도 한참 본 게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됨됨이가 이 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니 문제다. 이와 거꾸로 아래 경우는 말이 몰려 앉아 시를 죽이고 있는 전형적인 본보기다.

 

 

바람도 얼어붙은 고요한 날

눈 쌓인 계곡과 벌판을 흐르는

겨울 수심을 알고 싶다

저 중심에도

겨우내 크고 작은 눈발 분분히 날리고

날선 혹한도 수없이 다녀갔으리라

멀리 외등 아래 흔들리는 강촌마을

깊고 푸른 침묵에 들고

흘러 더 푸른 겨울 물빛

강가의 느티나무 앙상한 가지에 걸려

비로소 흐느껴 울다

 

저 산맥 너머 어디선가 발원하여

쉼 없이 솟아오르는 맑은 슬픔

차마 알지 못하고 흐르는 겨울

오늘 밤, 그 깊은 수심과 몸을 섞고 싶다

 

- 「겨울 강」(『시안』 여름호) 전문

 

* 밑줄과 짙은 글씨는 글쓴이가 했다.

 

이 작품은 적지 않은 시인이 즐겨 글감으로 삼아 온 ‘겨울 강’을 내세운 작품이다. 그런데 낱말밭은 몇 개 유사어에 머물렀다. ‘강’과 ‘강가’, ‘물빛’, ‘수심’이라는, 이미 제목에서 내세운 바와 같은 강의 지극히 평범한 연상어, 그리고 ‘슬픔’과 ‘흐름’이라는 소박한 앎에 그쳤다. 달리 말해 비슷한 의미 자장을 가진 낱말들을 한자리에 포개 놓고 있을 따름이다. 시의 낱말밭이 옹색하다. 그러니 ‘겨울 강’에 대한 새로운 앎이나 상상적 즐거움이라 할 만한 것은 한 곳도 담아내지 못했다. 흔한 글감인 만큼 더욱 활달한 언어 구사가 필요했다. 이렇듯 말이 몰린 시들은 오랜 세월 우리 시마당에서 이른바 시어로 자주 등장했던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 늘어놓기만 해도 맍들 수 있다. 아예 체험의 질을 논의할 단계 이전에 머문 시다.

앞에 올린 두 작품을 빌려 오늘날 우리 당대 시에 드러나고 있는 바, 낱말밭이 퍼진 시와 모인 시, 사뭇 맞선 두 경우를 살폈다. 한쪽은 경험에 말이 못 따르는 듯한 부풀린 모습을 보이고, 다른 한쪽은 말이 경험을 아예 못 따라가는 듯하다. 언어 경제로 볼 때 둘 다 체험 결핍을 연출하고 있는 점에서는 같다. 시인의 말 장사 솜씨가 문제다. 무겁고도 창의적인 말놀이로서 시는 시인에게 더 신중한 언어 통제력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스스로 자신의 시를 읽는 이 입장에서 떼어 놓고 볼 수 있는 냉정한 눈길을 갖추는 일이 급선무다.

 

3.

 

올 여름 우리 문학사회에 시 전문지가 새로 들어앉았다. 『발견』이 그것이다. 한 매체가 나돌려면 상상하기 어려울 사람 품과 돈 품이 든다. 그럼에도 시 전문지 발행이 멈추지 않는 현상을 보노라면 경탄스럽다. 작품을 살피니 시인 선정에 애를 쓴 느낌을 받았다. 평소 몰랐던 시인을 새로 만날 수 있는 일도 창간호의 즐거움이다. 그만큼 준비에 공력을 들인 흔적이리라. 그럼에도 『발견』에는 오늘날 시의 당/부당한 모습은 어김없이 껴안고 있는 작품이 나란하다.

언어 경제라는 쪽에서 볼 때 낱말밭의 얼개를 어떻게 짤것인가라는 문제가 중요하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다. 흩는 시와 모으는 시, 거기다 낱말밭 안쪽을 어떻게 다듬을 것인지가 다른 문제로 떠오른다. 이 경우에 흔히 문제를 일으키는 본보기가 볼썽사나운 관념어를 마구 내돌리는 현상이다. 시가 구체적인 감각에 기대는 체험의 문학임을 모르는 듯, 어름어름하고 막연한 머릿속 이름씨(명사)를 마구 뱉어 놓는다. 이런 본보기는 뜻밖에 널렸다. 감각시와 관념시의 견줌이 그로부터 말미암는다.

 

 

불행하게 태어난 아이들의

어찌할 수 없는 선함처럼 너를 믿었다. 증오한다.

기록된 것은 기억들보다 위대하기에

무덤들 위에 아무것도 모르고 집이 생기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집은 불타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그 위에 누워 울다가 말라붙는다고 해도

나는 단지 너의 말을 내 몸에 받아 적을 뿐이다.

어느 미친 새들은 나무가 불타도 울지도, 그 나무를 떠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때론 선함이고, 순수함으로 기록된다.

(...중략 ...)

실성한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는 아이들의 순수함처럼

모두가 선한 싸움을 할 뿐이다.

각자의 선함들이 만드는 것은 기껏해야 누군가에는 악,

실은 미치지 않고서야 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너는 얼마나 미쳤기에 나를 밀칠까.

미치지 않고서야.

나는 여전히 너의 나무에서 말라 붙고 있을까.

 

- 「선(善)이 너무나 많지만」 ( 『발견』 1호 ) 부분

 

위 작품에서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뜻을 짐작 못할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자신이 뱉고 싶은 의도에 빠져 어름어름한 사변을 늘어놓고 말았다. ‘순수함’이니 ‘선함’이라는, 뜻이 큰 관념어로 표현할 수 있을 자리는 사실 거의 없다. 문학이란 그 ‘순수함’이나 ‘선함’이 아떤 것인지를 구체적인 이미지나 줄거리를 빌려 표상하는 행위다. 위의 작품에서도 시인은 자신을 폭풍같은 노여움으로 몰아넣었을 문제, 곧 현상적 말할 이 ‘나’와 현상적 들을 이 ‘너’ 사이에 이루어졌을 사건을 속속들이 그려 보여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문학이 굳이 철학이나 역사, 또는 사회과학과 같은 추상 수준의 기술물들과 다른 글쓰기 관습으로 나뉠 까닭이 없다. 시인은 자신이 뱉어 놓은 위와 같은 장황한 말과 아래와 같이 글쓴이가 다시 고쳐 쓴 감각적 표현을 서로 견주어 보기 바란다.

 

무덤들 사이에 집이 서고

집이 불타고

어버이를 잃은 아이들이 그 위에 누워 울다 말라붙는다

 

시가 감각적 구체성에 호소하지 않는다면 읽는 이를 체험의 깊이로 끌어들일 수 없다. 그저 막연한 ‘말’에 떨어질 뿐이다. 이 시이의 시인은 같이 『발견』에 실려 있는 아래와 같은 작품과 자신의 작품과도 다시 견주어 볼 일이다.

 

식어가는 치킨 앞에서

한 여자가 눈물을 쏟는다

여자의 머리카락에 치킨이 닿자

치킨은 낮게 중얼거린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만”

 

벌거벗은 몸뚱이가 시리다

낯선 조우 (遭遇)

 

포크로 가슴을 찌른다

껍질을 벗긴다

 

입술이 사라진다

- 송현경, 「치킨의 사생활」( 『발견』 1호) 전문

 

위에 올렸던 「선(善)이 너무나 많지만」 과 비슷하게 사람과 맺은 관계 속에서 일어났을 법한 어떤 불편한 만남의 자리를 그려 담은 작품이 치킨의 사생활이다. 작품에서는 그것을 ‘나’와 ‘치킨’ 사이“낯선 조우”라 표현 했다. 그리고 시인은 그 불편한 만남을 “식어가는 치킨”을 ‘포크’로 먹는 행위에 견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치킨처럼 달라져 버린 사람 앞에서 “한 여자”는 “눈물을 쏟으며”할 말을 잃는다.‘선함’과 ‘순수함’이라는 사변 속을 헤매면서도 표현하고자 한 뜻으로부터는 멀리 벗어나 있는 「선(善)이 너무나 많지만」 과는 완연히 다른 구체적인 표현성이 살아 있는 시다. 이제 비슷한 예를 다른 두 편의 작품을 빌려 살펴보자.

 

너도 점점 악독한 일상을 즐기는구나.

아니면 냉혹한 편지라도 쓸까?

자살문예운동을 위해서는

우리 역시 우아해질 필요가 있어.

 

나는 박수밖에 칠 수없는 운명이야.

너는 끝까지 질문이 될 거고

간만에 보는 조서는 아름다워야 해.

티끌만큼의 눈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어쩌면 젖은 행주가 삶의 원천일 수도 있다는

너의 발언은 취소된 거니?

내일 아침까지 미리 쥐어짜니까

그렇게 됐어. 미안해.

 

-- 「그렇군요 그렇지요」( 『발견』 1호 ) 전문

 

우리는 그냥 스덴이라고 부르지 또는

스뎅 스뎅 그릇 스뎅 사발 스뎅 컵 스뎅

칼 스뎅 가위 스뎅 냄비 주전자

스뎅 숟가락 젓가락 스뎅 보온병

 

스뎅은 녹이 안 슬고 무척

강하지 스뎅이니까

니켈 크롬 강철

강철이 더 강해지라고

니켈 크롬

 

스테인 리스 스틸

우리는 그냥 스뎅이라고 부르지

 

깨지지 않고 녹아 없어지지도

않고 타지도 않고 녹슬지도 않지

스뎅은 강하지 단단하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맏을만 하지 물속에서도

불속에서도

 

- 박순원, 「스테인리스 스틸」 (『발견』 1호) 전문

 

①을 놓고 볼 때 감각적인 자리는 ·닳고 닳은 말 “티끌만큼의 눈물”이라는 낡은 표현 한 곳에 지나지 않는다. 옮긴 첫 토막에 중요하게 자라집고 있는 ‘악독하다’, ‘냉혹하다’, ‘우아해지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시인 스스로도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막연한 그림씨를 들먹였다. 게다가 그 다음 토막에 나오는 ‘아름답다’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쓸데없이 뜻이 큰 그림씨는 쓰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는 작문법의 기본도 모르는 시줄이 되고 말았다. 당장 첫 시줄을 “너도 점점 일상을 즐기는구나”, 둘째 시줄을 “아니면 편지라도 쓸까?”로 고쳐 놓고 둘을 견주어 보기 바란다. 참으로 막연한 그림씨일 따름인 ‘악독한’과 ‘냉혹한’이란 말에 매달려 읽는 이들에게 시를 ‘구걸’하고 있는 모습이 금방 밝혀진다.

따라서 ①은 입말투에서 얻을 수 있는 감각적인 부분도 살리지 못한 채 관념적 모호함에 갇혀 버렸다. 이에 견주어 같은 입말투면서 ②는 시의 감각적 자질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우리가 나날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만나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글감으로 삼아, 전혀 새롭게 그것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시다. 그 새로운 아름다움을 시인은 ‘스뎅’이라는 일컬음의 발견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냈다. 비록 맨 마지막 토막에서 다소 늘어지긴 했지만, 좋은 작품이다. 다른 이의 본이나 유행을 넘보지도 않고, 대단한 삶의 참을 설파하는 양 객쩍은 허풍을 떨지도 않으면서도 낯익은 사물들에 대한 발견 자리가 독특하고도 오롯하다. 게다가 이 작품은 맥락을 달리해 읽는다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장치도 없이 살아가는 숱한 장삼이사들이 겪는 삶의 고통과 곡진한 눈물을 담아내는, 반어적 문맥까지 지녔다. 관념시와 감각시의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는 본보기가 ①과 ②다.

 

4.

 

아직 탈근대의 들머리다. 전자언어라는 전혀 새로운 말글로 사람의 소통 체계가 달라지고 있다. 겨우 걸음마 단계인 오늘로서는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상조차 불가능하다. 근대 시기 100년 남짓 맹위를 떨쳤던 한글 문학과 한글 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러한 가운데서도 뚜렷한 사실 한 가지는 한국어로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우리들 선남선녀의 오랜 추억과 지난 시간을 앞날에 올 시간도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는 점이다. 문학사회의 규약을 깨고 버릇을 과감하게 고치게 이끄는 시도 필요하지만 근본을 잘 갖춘 시도 꾸준히 나와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나라가 망하고 오랑캐의 군홧발 소리, 게다짝 소리가 요란한 속에서도 한문학 교양인 사회와 한시 백일장은 나라 곳곳에서 호황을 누리며 열렸다. 지나간 시기 나라에서 벼슬살이 길로, 세상 명리로 나가도록 이끌었던 오랜 사회적 관습을 뒤늦게 즐기고 탐하기 위해 상투를 자른 머리로 너도나도 개미 떼처럼 몰려나온 결과였다. 온 나라를 단위로 하여 묶은 근대적인 한시문 작품 선집이 서울에서, 지역에서 거듭 나왔다. 지니간 시기 한문학 교양의 마지막 퇴행을 웅변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새로운 근대 자본주의 인쇄출판 마당을 펼쳐 나가는 새 모습에 발을 디딘 것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문학 사회의 범람은 나라를 빼앗긴 일에는 아랑곳없이 명리를 좇던 그 시기 여러 한시문집에, 백일장에 몰려들던 어쭙잖은 글쟁이의 모습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시인은 사회에 공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복 받은 사람이다. 시가 말놀이라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까닭이다. 게다가 시를 읽는 이는 예전과 달리 더욱 오래 멀리까지 이어진다. 디지털 혁명이 글쟁이에게 떠넘긴 축복이며 저주가 그것이다. 모든 사람의 기억이 남고, 모든 기록이 지워지지 않을 세상 앞자리에 시인은 버젓이 나서 있다. 두려워하라. 매체를 빌린 작품 발표는 이미 공공행위다. 어떤 평가에 내몰리더라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시답잖은 말이나 끌어다 모아 놓은 좌판으로 한몫 볼 장삿속은 버릴 일이다.

 

계간 『시와 시학』 (2013년 가을호), 「계간 시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