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跋文> 송선애 시집 『시간화석』
자연의 뼈로 음각한 낭만적 서정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시집은 모름지기 시의 집(家)인 까닭에 시마다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고 그러면서도 그 다채로움의 요소들이 하나로 가지런히 엮이는 화이부동 和而不同의 집(集)이 될 때 비로소 큰 시 - 시인의 명징한 세계관 - 한 편으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크고 작은, 수많은 돌들의 집적 - 편편의 시 - 이후에 드러나는 만고풍상의 탑처럼 조각조각들의 다채로움과 함께 옹골찬 하나의 심상, 하나의 메시지로 독해되는 시집을 만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가까운 기대감이 송선애의 첫 시집 『시간화석』을 감상하면서 충족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파스Octavio Paz Lozano의 정의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시간화석』은 매 편마다 한 장씩의 풍경을 담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그 풍경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고 들어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얼핏 보아 그 이야기들이 단순히 화자 話者의 감에 불과해 보일지라도 그 화자의 독백은 ‘존재’ 자체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임을 간과할 수 없다. 한 편의 시에 담긴 에피소드는 세상에 떠도는 풍문일지도 모르고, 이미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상식일지도 모르지만 『시간화석』은 그렇게 보잘 것 없이 버려진 것, 잊혀진 것들에 대한 탐문을 통해 정답이 없는 삶에 대한 희망을 지독한 절망으로 치환하여 보여주는데 인색하지 않다. 이는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행위인 까닭에 지루한 동어반복의 독백으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무모해 보이지 않는 것은 『시간화석』에 숨어 있는 시인의 정체성이 치열한 사색과 시작 기법의 실험으로 부단히 갱신되어 왔다는 점에서이다. 이는 『시간화석』을 둘러싸고 있는 얼개와 뼈대를 살펴봄으로서 충분히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화석』의 구조적 특성을 간략하게 추려보면 꼭 시인이 아니더라도 한 개인(시인)의 일반화할 수 있는 사회적 성장사를 보여준다는 점, 시 작법에 있어서 시류를 좆지 않고 일관된 시법 詩法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 자연을 사유의 대상이 아닌 경전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시집을 통독함에 있어서 굳이 눈여겨보지 않아도 될 점은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시간의 흐름과 그 시간 속에 각인된 시들의 관계를 연계하는 일이지만 송선애의 시는 애별리고 哀別離苦의 낭만적 서정으로부터 개인을 둘러싼 인간과 사회현상의 현실적 비판, 더 나아가서 쇠락해갈 수밖에 없는 삶의 잔상에 이르기까지의 선연한 발자국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다. 숨기지 않고 드러나는 시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성장사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더한다고 볼 수도 있다.
눈꽃처럼 피었다가 // 당신께 닿지 않은 편지//결빙 속 응결된 고백입니다// 아직 발송하지 못한// 한 움큼, 차가운 사랑입니다//겨울 밤,//뜨거운 문장을 기억하는 심장이 있습니다
- 「눈꽃 보관함」 전문
시설은 알처럼 완벽하다//
모든 생산라인의 자동화설비/옴짝달싹 못한 채/밤낮으로 가동되는 알공장//
백열등은 닭의 눈을 뜨게 하고/ 항생제는 생명줄을 연장시켜/ 특별, 특대, 무정란을 제조하는/ 알의 천국//
공장에서 식탁으로, 입안으로,/자동 공급되는 죽은 목숨//
충혈의 무정란을 트럭에 싣고/ 살은 듯 죽은 듯/황급히 공장을 빠져나가는//
콜럼버스의 알/ 도저히 식탁에 세울 수 없다
- 「 콜럼버스 알」 전문
임의로 뽑아 본 위의 두 편의 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의 토로 (「눈꽃 보관함」)와 「 콜럼버스 알」에 보이는 전위적 문명비판의 거리와 간격은 매우 멀다. 「겨울사랑」, 「제부도 폭설」, 「까치밥」, 「남산 가는 길」 등이 전자 前者 계열의 시들이라면 「전단지」, 「홍살문이 서 있는 풍경」, 「뻐꾸기 엄마」, 「바람의 통증」, 「난장이꽃」 등은 후자 後者 계열에 속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전자 계열의 시들이 감상자의 동감을 요구하는 보편적 서정에 한정되어 있는 형국이라면 「콜럼버스 알」이 보여주는 대량생산과 소비 시대에 마주하는 무정란의 탐욕과 생명경시에 대한 통열한 자각은 보다 넓은 세계인식으로 확장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지점 사이는 그저 멀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전통적 서정에서 출발한 시적 자아가 현실 비판의 관찰자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 속에는 추체험된 인연으로 얽힌 장삼이사들의 아름답지 않은(?)이야기와 산다는 일에서 파생되는 존재의 괴멸과 환멸의 통로가 이어져 있다. 이는 시인 송선애의 시작 詩作이 단순한 기호 嗜好나 여적 餘滴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는 곧 시인의 생활사와 정신사의 궤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시 창작 상의 선후를 따지기 전에 개인에서 타자에게로, 타자에서 보다 큰 공동체로 이행되어가는 시인의 자각은 투명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후자의 시들에서는 냉철한 관찰자의 시각만이 존재하고 시인(화자)의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사상 捨象되어 있다. 보드리야르 J.Baudrillad가 말한 바와 같이 욕망을 소비하는 시대에 놓인 채 서로를 소비하는 전단지로 전락한 현대인의 슬픔은 “불빛에 젖은 알몸이/집을 나설 때부터 먹잇감을 노렸지만/ 한 놈도 걸려들지 않는다// 손톱 밑에서 핏물이 묻어날 뿐”(「전단지」부분)이라는 자조적 탄식으로 변주되고 뉴타운의 신기루 뒤에 숨은 달콤한 깃발이 ‘담벼락의 붉은 선혈로 몸부림치고’(」「바람의 통증」 부분)‘마을이 통째로 절려나가는’( 「새살이 돋는다」 부분)현실에 놓이게 된다. 전단지도 되지 못하고 불도저와 포크레인에 밀려난 사람들은 은장도를 버리고 ‘늙은 청상과부 아낙이/붉은 네온사인 모텔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거나 (「홍살문이 서있는 풍경」)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나이트 클럽에서 일하는 천형의 난장이이거나( 「난장이꽃」),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식을 버린 못나고 모진 여자( 「뻐꾸기 엄마」) 로 전락한다. 음지식물처럼 구석에서 마른 울음을 삼키는 사람들도 시간의 그물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쇠락과 죽음의 운명을 거역하지 못한다. 시집의 표제 시이기도 한 「시간화석」을 읽어보자.
천수요양원은 정지화면으로 고정되었다
천수를 누리게 해준다는 건지
세월을 되돌려준다는 건지
한걸음도 뗄 수 없는 화면 속
노파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기처럼 웃었다
시간을 걷어내면
어두운 화석이 환해질까
사소한 기억도 재생하지 못하고
빈혈의 햇살이 쌓였다
거울이 늙은 여자를 끌어안았다
장수長壽는 복福중의 복이지만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삶은 행복하지 않다. 화석은 과거의 흔적이지만 시인에게 인간은 미래의 화석이다. ‘사냥을 나섰다가 폭설에 묻힌 얼음사내가 오천삼백 년 만에 걸어 나왔다// 눈 덮인 산맥에서/결빙의 시간을 견뎌낸/ 빙하기 해후// 폭설에 파묻힌 비닐하우스에서/ 귀농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빙하기」 부분)에서 보듯이 오천삼백 년 전의 알프스의 사내나 비닐하우스 속에서 걸어나오는 사내나 화석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기능을 상실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를 과거로 밀어 넣으며 몸과 마음을 화석화 시킨다. 시인은 그래서 과거로의 여행을 꾸린다. 왕릉이나 무덤 속의 벽화들, 패망한 나라의 사적지는 ‘살아지는’ 수동적 삶이 ‘사라지는’ 삶에 다름 아님을 깨닫는다.
『시간화석』의 두 번째 얼개는 이와 같은 시간과 존재에 대한 질문과 그로 말미암은 통증과 관련이 있게 된다. 일부 몇 편의 시를 제외하고는 『시간화석』의 시들은 대부분짧고 간명하다. 오늘의 한국시의 주류가 산문화되고 리듬이 배제된- 여기서의 리듬은 격식화된 운율과는 변별되는 것으로서 내재적 감흥에 의해 발산되는 노래로 이해된다. - 탈논리, 과도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폭력적 은유의 응축 경향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송선애의 시들은 짐짓 퇴행적이고 호흡이 모자란 작품으로 오해 받을 여지가 있다. 아마도 시인은 이런 지적과 우려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 앞에서 예외로 언급한 몇 편의 시가 이와 같은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사꽃 청춘」, 「그대에게 들다」, 「난장이꽃」, 「씨 뿌리는 사람」, 「회귀」등의 시편은 서사적 구조를 지니면서도 진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문장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넉넉한 가락과 품새를 지닌 성공적 작품으로 모자람이 없다. 송선애의 일관된 시법은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는 시간과 그 시간의 와류 속에서 화석화 되어가는 존재의 당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 모색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20 세기 위대한 사진작가인 브레송 Henry Cartier Bresson 의 사진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브레송은 찰라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그 찰라의 미학을 일상성 속에서 찾아낸 작가이다.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랬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 이었다"는 브레송의 언명은 시인이 인지하고 있거나 아니거나와는 무관하게 『시간화석』의 시편을 관류하고 있는 시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찰라야 말로 하이데거의 현존재(Da Sein)이며 화석화 되기 전의 온전한 자아를 구현한다. 『시간화석』의 시들이 도덕적 판단이나 행동의 결과를 배제한 채 하나의 풍경을 제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에포케 epoche(판단중지)라기 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더 많은 명상의 여백을 제공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 여백에 시인이 다시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표지이기도 하다. 시인이 리듬을 버리고 개인적 정조 情調를 버릴 때 시는 보다 명징한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방울이 추락할 때마다
동굴은 수 만 년 전
잠에서 깨어난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우주의 시간을 세우고 있는
석순과 종유석
어둠의 단애를 생각하다
의표를 찔린다
낙숫물 소리를 듣다가
슬쩍 시간을 이어 붙이는
물 한 방울,
순간과 영원의 물의 순환이다
- 「낙숫물 소리」 전문
시간을,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그리하여 지나가고 난 후에야 그 발자국을 헤아리게 되는 시간을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내는 이 작품은 석순과 종유석처럼 하나의 물방울이 순간과 영원을 잇는 시간임을 탁월하게 인식하고 있다. 물방울은 시간이면서 석순이고 종유석이며 화석화된 시간을 잇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는 시인의 직관은 그의 여타의 모든 시를 용서하고 껴안기에 충분하다. 시간은 마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들러붙어 생멸을 거듭한다는 깨달음은 송선애의 시들이 더욱 더 뚜렷한 하나의 풍경으로 압축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 까닭에 풀이 돋는 일조차도 시인에게는 ‘시간이 돋는’ 무한재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삶의 불투명성과 불안은 소멸하는 존재의 아픔으로 채색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튼튼한 시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여타 시인들과의 변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현실참여, 감성/이성, 이성/탈이성, 자연/문명의 경계에서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시인들은 무수히 존재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검토해보고자 하는 자연의 문제도 이미 심도 깊은 사유와 각성의 족적이 길을 이룬 상태이어서 여간해서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영역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근대를 지탱했던 자연과 인간의 대립적 구조는 바야흐로 생태 生態의 영역으로 들어섰지만 인간이 원시적 생태의 세계로 회귀하기란 난망한 일이다. 작게나마 자연의 섭리를 최소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방편으로 위안 삼는 시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앞서 “자연을 사유의 대상이 아닌 경전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시간화석』속에서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 것인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자연은 존재의 우주이다. 생노병사의 사고 四苦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여전히 인간은 영생을 희구한다. 숲을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은 식물들의 치열한 삶을 보려면 겨울 숲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구상에 존재한 4천여 종의 나무들은 제각기 부여받은 능력을 다해 삶을 영위한다. 광릉수목원의 어느 메티세콰이어 나무는 앞에 자리 잡은 참나무 때문에 남쪽으로 가지를 내지 못하고, 어린 엄나무는 천적을 피해 날카로운 가시를 돋운다. 전나무는 피톤치드를 내뿜어 발밑에 풀들을 얼씬 못하게 하고 왕성하게 자라나던 아카시는 때가 되면 다른 나무에게 자리를 내준다. 숲에는 죽음은 있으나 비통함은 없다. 송선애의 시들은 이와 같은 자연의 메시지를 자신의 경전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①
숲에서 베어낸 쌍골죽
....중략
새들을 불러 모은다
- 「대숲의 노래」 부분
②
불덩어리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쇠망치를 내려친다
축제를 벌이는 칼날 사이로
꽃잎들이 떨어진다
수없이 피고 지는 칼꽃
시원始原의 물에 잠기며
명검으로 태어난다
대장장이 혼을 숨기고
- 「칼꽃」 부분
③
대나무에 소금을 가득 채우고
황토로 밀봉한다
...
비우고 비워내고
채우고 채우기를 아홉 차례
절개의 기운이 서린
불길 속에서
자수정 죽염이 태어난다
- 「죽염」 부분
④
베란다 화단에 억새를 심었네
...
억새는 들판을 잊지 못하네
가을하늘을 잊지 못하네
- 「본성」 부분
⑤
손목에 힘을 주면 줄수록
고구마의 비명 한 움큼씩 뽑힌다
심지 굳다는 것,
고집스럽다는 것,
내일, 내일은 뿌리내릴 수 있어?
나에게 묻는다
- 「나에게 묻는다」부분
위의 시들은 필자가 눈에 짚이는 대로 골라본 작품이거니와 송선애의 시작에서의 모티브는 자연 현상, 동, 식물, 어류, 광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주체와 객체의 1:1의 대칭은 대상의 의인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지만, 주체로서의 대상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명민하게 포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상이 의인화 되는 순간에 그 대상의 특성이 휘발되어 버리기 때문에다. 그러나 송선애는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순간에 섬광처럼 번쩍이는 다양한 존재의 실체가 하나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①은 휘어진 대나무가 대금 大笒이 되는 과정을 통해 새(자연)를 부르는 순간을 ②는 쇠가 수없는 두드림과 녹음 속에서 보검이 되는 과정을 통해 대장장이의 혼이 담기는 순간을 ③은 대나무 통 속에서 불길을 참아내며 자수정 죽염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베어지는 대나무는 제 속성을 그대로 지닌 채로 대금으로 환생하며, 쇳덩이는 불구덩이 속에서 두드림과 담금질을 통해 보검으로, ③은 속성이 다른 대나무와 소금이 만나 정제된 자수정 소금으로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새로운 존재의 탄생은 죽음과 시련의 과정을 건너 뛸 수 없으며 생략되지도 않는다는 정언명제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④와 ⑤는 진정한 존재는 죽음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정언명제를 망각할 때 빚어지는 고통의 순간을 증언한다. 우리는 가끔 욕망의 한계를 넘거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 후의 참담한 결과는 어떻게 될까? 「복사꽃 청춘」의 화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한 사내에게 순결을 뺏기고 거리의 여자로 전락한다. 그러나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여자는 자신의 삶을 짓밟은 사내를 원망하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대신 첫 사랑 기태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 「복사꽃 청춘」은 타자 他者에 의해 삶의 행로가 바뀌거나 핍박받을지라도 결코 마음이 간직한 순수한 사랑은 빼앗을 수도, 뺏길 수도 없다는 메시지를 은유한다. 감상 感傷에 기울어 있던 자아의 애별리고가 이렇듯 강건한 꿈의 승화로 전회하기까지 앞에서 살펴보았던 시적 도전과 실험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던가! 상상력의 극대화를 포기하는 대신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간과 존재의 연계 속에서 절망적인 삶을 직시하며 증언하는 동안 시인은 낭만적인 슬픔을 즐기는 존재로 한껏 아름다워진 것은 아닌가? 여기까지 오고 보니 「해금」은 존재의 무상함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된다. 삶에 대한 포기는 두려운 일이지만, 울지 못하는 삶은 더욱 끔찍한 일이다. 두 줄의 현을 가진 조그만 악기가 들려주는 노래는 슬퍼서 아름답다. 필자는 이 시를 그래서 마지막에 한 번 더 소리내어 읊었다.
두 갈래의 심장이
달빛 물결로 속삭이다가
갯벌에 아른거리는 노을이다가
혈관 속으로 여울지다가
불꽃으로 사그라지다가
불길로 타오르다가
하늘의 소리가 된다
울림의 줄을 놓지 못하는
화살 같은 울음
바람 끝에서 숲에서
새처럼 울다가
내 귀의 뒤쪽에 앉는다
공명에 닿는다
- 「해금」 전문
이 글의 서두에서 시들의 다양성과 시집의 통일성이라는 과제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대체로 첫 시집은 다양한 시들을 맛볼 수는 있으나 하나의 세계관으로 집약되는데에는 어려움이 있는 까닭에 『시간화석』에 거는 기대는 각별하였다. 이제 이 글을 마치면서 그런 기대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남겨둔다. 『시간화석』은 시인 송선애의 사유의 깊이와 너비를 숨김없이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시간화석』을 도약대로 삼아 더 왕성하고 치밀한 시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또 하나의 기대를 독자들과 함께 누리고 싶다.
◆ 언급된 시들
새살이 돋는다
유행 지난 비디오테이프를 쌓아놓고
창고대방출을 벌이더니
마을 풍경이 하나, 둘, 잘려나갔다
밤늦은 귀가 시간
형광등 불빛을 안고 있던
비디오마을이 통째로 사라졌다
낭만의 시간으로 덮여있던
추억이 흩어졌다
이야기가 끝나도
다시 돌려보고 싶은 기억들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풍경의 새살이 돋는다
나에게 묻는다
차일피일 미루다 고구마 밭에 나가보니
바랭이가 밭고랑을 점령하고 있었다
줄기를 흔들어도, 심문하듯 캐물어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손목에 힘을 주면 줄수록
고구마의 비명 한 움큼씩 뽑힌다
심지 굳다는 것,
고집스럽다는 것,
내일, 내일은 뿌리내릴 수 있어?
나에게 묻는다
눈꽃 보관함
눈꽃처럼 피었다가
당신께 닿지 않은 편지
결빙 속 응결된 고백입니다
아직 발송하지 못한
한 움큼, 차가운 사랑입니다
겨울 밤,
뜨거운 문장을 기억하는 심장이 있습니다
본성
베란다 화단에 억새를 심었네
중랑천변 억새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데
우리 집 억새는 날이 갈수록 생기가 없네
나는 힘겨워도 살아보라 하고,
억새는 버겁다고 하고,
길들이지 말았어야 했네
억새는 들판을 잊지 못하네
가을하늘을 잊지 못하네
시간 화석
천수요양원은 정지화면으로 고정되었다
천수를 누리게 해준다는 건지
세월을 되돌려준다는 건지
한걸음도 뗄 수 없는 화면 속
노파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기처럼 웃었다
시간을 걷어내면
어두운 화석이 환해질까
사소한 기억도 재생하지 못하고
빈혈의 햇살이 쌓였다
거울이 늙은 여자를 끌어안았다
복사꽃 청춘
열여덟 복사꽃 필 때 였는디요 고향엔 모다 서울로 떠나벌고 나도 오늘 밤같이 뽀얗게 떠오른 보름달 꿈을 안고 집을 떠났당게요 이십년도 넘은 얘기여요 기차역에서 그 남자만 만나지 않었드라도 팔자가 요로코롬 돼불지는 않았을 것인디 아마도 지가 집을 나온 처녀같이 보였덩게벼 낭중에 안 일이지만 처녀인줄만 알았드라도 여그다 나를 팔아 묵지는 않었을거라고 하드라만서도 고것이 이제와 뭔 소용이 있것어요 냅다 가로채 갖고 물어다가 어두침침헌 뒷골목에 내팽개친 사내놈한티 첫 순정 몽땅 바쳐버린 내 청춘이 서럽고 서럽당게요 내 몸뚱어리 짓밟힌 꽃값 받어들고 텅 빈 하늘 봄서 하염없이 하염없이 울었당게요 나도 늙었는지 고향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자운영 꽃빛에 서러워지고 복사꽃이 환하게 반기는 꿈을 꾼당게요 어릴 적 친구 순자, 영숙이, 정순이……
우리 엄니가 자주 뵈는디 썩어 문드러진 이 몸이 무신 낯짝으로 고향산천에 얼굴을 돌리것어요 여그 들어와서 한 번도 나가불지 못허고 인연 끊고 산지가 수십 년이 됭께 인자는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고렇게 반갑고 고맙당게요 썩은 몸뚱어리 탐내는 손님을 보믄 피붙이 같어 허한 가심 안어주고 싶기만 한디 연극 같은 고것이 가당키나 헌 소리다요. 근디 이상허다요 허망한 시상 말라붙은 가심에 차마 떠올리기도 아꺼운, 손 한 번도 잡아 벌지 못 헌, 생각만 혀도 삐비꽃물이 달착지근허게 입안에 괴는 그 사람이 보고싶당게요 그 오살놈 말고, 내 첫사랑, 손 한 번도 못 잡아 벌고 가심만 뛰던 기태 말이랑게요 그 손 한번만 잡어보고 죽어도 원이 없것느디……
바람의 통증
마을을 밀어내고 신도시를 세운다는
깃발이 곳곳에 펄럭였다
담벼락엔 붉은 선혈이 몸부림쳤다
전봇대마다 저당 잡힌 목숨들이 푸드덕 거렸다
육중한 바퀴는 숨통을 점점 조여 왔고
선산도, 농지도,
포클레인은 한 번 물면 놓지 않았다
신도시에 밀려난 동네가 피로 물들고
철바퀴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경계를 모르는 새들은
울타리 낮게 날아다녔다
골목엔 깃발이 팽팽하고
마을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대에게 들다
능주 영귀산 기슭에 천년 넘게 숨어 있는 운주사 있다기에 백운白雲 청운靑雲 층계 내려서면 옹기종기 바위 곁에 석불 있다기에 코도 없고 입도 문드러지고 귀도 짝짝이인 석불이 있다기에 천 년 전부터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와불이 있다기에 천 개의 부처 천 개의 탑을 하룻밤에 세운 곳이라기에 소문 듣고 찾아 갔지요 하늘에 박혀있던 북두칠성이 칠성바위 별자리로 내려왔다는데 기대고 싶은 마음 구름보자기에 싸서 갔지요
천불천탑 벌써 구름에 실려 떠났고 남아있는 부처와 탑만 서있었지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부처에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푸념을 하고 왔는데요 와불 위로 눈이 서슴없이 쌓이고 소문에는 노을도 천년 넘게 스며들었다는데 바람도 끊이지 않았다는데 왜 마음은 간데없고 풍경소리만 들리는 걸까요? 무뎌진 가슴에 눈이 사르락 사르락 쌓입니다
죽염
담양 산 왕대를 샘물로 씻어
서늘한 그늘에 말린다
대나무에 소금을 가득 채우고
황토로 밀봉한다
소나무 장작에 불을 붙인다
상처를 덮어주던
송진이 타들어간다
비우고 비워내고
채우고 채우기를 아홉 차례
절개의 기운이 서린
불길 속에서
자수정 죽염이 태어난다
미증유未曾有의 결정체
수직의 바다를 품는다
칼꽃
불꽃이 이글거리는 대장간
열기로 가득하다
화덕에 달궈진 쇳덩어리에서
보검을 벼린다
불덩어리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쇠망치를 내려친다
축제를 벌이는 칼날 사이로
꽃잎들이 떨어진다
수없이 피고 지는 칼꽃
시원始原의 물에 잠기며
명검으로 태어난다
대장장이 혼을 숨기고
빙하기
해발 삼천이백미터 알프스산맥에서
석기시대 사내가 발견되었다고 석간신문이 알려왔다
사냥을 나섰다가 폭설에 묻힌
얼음사내가 오천삼백 년 만에 걸어 나왔다
눈 덮인 산맥에서
결빙의 시간을 견뎌낸
빙하기 해후
폭설에 파묻힌 비닐하우스에서
귀농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내들이 활자 속에서 웃고 있다
낙숫물 소리
물방울이 추락할 때마다
동굴은 수 만 년 전
잠에서 깨어난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우주의 시간을 세우고 있는
석순과 종유석
어둠의 단애를 생각하다
의표를 찔린다
낙숫물 소리를 듣다가
슬쩍 시간을 이어 붙이는
물 한 방울
순간과 영원의 물의 순환이다
콜럼버스 알
시설은 알처럼 완벽하다
모든 생산라인의 자동화설비
옴짝달싹 못한 채
밤낮으로 가동되는 알공장
백열등은 닭의 눈을 뜨게 하고
항생제는 생명줄을 연장시켜
특별, 특대, 무정란을 제조하는
알의 천국
공장에서 식탁으로, 입안으로,
자동 공급되는 죽은 목숨
충혈의 무정란을 트럭에 싣고
살은 듯 죽은 듯
황급히 공장을 빠져나가는
콜럼버스의 알
도저히 식탁에 세울 수 없다
홍살문이 서있는 풍경
늙은 청상과부 아낙이
붉은 네온사인 모텔 앞에서
비를 맞고 서있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서릿발 같은 세월 지났네
꽃 피어나듯
절개가 백발이 되어
가슴 빗장을 질렀는데
허리춤 은장도는 온데 간데 사라졌네
홍살문이 서있는 봄동네
모텔도, 십자가도
봄이 왔다고 구석구석
멀리 붉은 사인을 보내네
씨 뿌리는 사람
서울시립미술관 고흐전에서 백 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씨 뿌리는 농부를 본다
작열하는 태양아래서 넘실거리는 보리밭을 배경으로 진초록 꿈을 펼치는 풍경을 지난다
초록의 붓을 잡고 벌판을 달려가는 사람을 지난다
엄동설한 눈 딛고 일어선 밭고랑에 붓으로 씨를 뿌리는 손끝을 본다
눈부신 가을 만상萬象을 화폭에서 수확하는 농부를 만난다
뻐꾸기 엄마
젖도 떼지 않은 핏덩이를 내던진
어미가 목젖을 떨며
탄식을 한다
젖 물릴 시간이면 젖가슴이 붓는다고
피울음을 토한다
해외로 입양되었다가
어미 찾는 자식을
못 본 척,
귀가 어두운 척,
운명을 외면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가
뻑꾹 뻑뻑꾹 울고 있다
해금
두 갈래의 심장이
달빛 물결로 속삭이다가
갯벌에 아른거리는 노을이다가
혈관 속으로 여울지다가
불꽃으로 사그라지다가
불길로 타오르다가
하늘의 소리가 된다
울림의 줄을 놓지 못하는
화살 같은 울음
바람 끝에서 숲에서
새처럼 울다가
내 귀의 뒤쪽에 앉는다
공명에 닿는다
전단지
밤새도록 유혹을 찾아 헤매다
빈 몸으로 돌아오는 새벽
불빛에 젖은 알몸이
집을 나설 때부터 먹잇감을 노렸지만
한 놈도 걸려들지 않는다
손톱 밑에서 핏물이 묻어날 뿐
욕망의 몸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전단지가
길바닥에 나뒹군다
하수도구멍으로 떠밀려가다가
다시 달려드는
짐승의 악착,
발목에 감긴다
회귀
여자가 구름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녀 곁에 구름으로 숨 쉬는 사내가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있다
사내의 의식은 구름보다 높이 있다 의사는 사내를 지상에서 포기한 상태다 여자는 사내를 땅으로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
낮은 구름이 병실 유리창에 부딪히자 사내가 눈을 깜박인다
티브이에선 눈동자만으로 대화를 나누는 여자와 사내가 클로즈업 된다
여자가 사내의 눈빛을 심장에 집어넣는다
심장 속에서 천둥, 번개가 친다
봄의 의식불명은 구름에 있다
대숲의 노래
숲에서 베어낸 쌍골죽
구부러진 소리를 잡으려고
불속에 들어간다
물소리와 새소리
목청을 곧게 세운다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신가
창공으로 흐르는 대금소리
새들을 불러 모은다
난장이꽃
난쟁이사내 낮이면 철공장에서 구슬땀으로 분꽃을 피우고 있다 조롱 섞인 소리는 날카로운 기계소리에 묻히고 요란한 매미 소리에 파문이 인다
해질녘 꽃대에 치장을 하고 사내가 집을 나선다 나비넥타이가 나이트클럽 문간에서 손님들을 불러들일 때마다 차가운 시선들이 날을 세운다 불빛 설움을 꾸역꾸역 삼키다가 새벽 단칸방으로 돌아온 사내 입을 다물고 말이 없다
오늘도 밥상머리에서 아이들이 야무진 얼굴로 말을 주절거린다 빨랫줄에 빛바랜 러닝셔츠가 후줄근하게 걸려있다 사내가 만든 철대문이 안전화 발자국에 녹슬어 있다 까만 눈망울들 낮은 키로 노을을 넘어가고 있다
'내가 쓴 시인론·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도를 사랑하다 독도가 되어버린 한 시인의 기록 (0) | 2014.02.02 |
---|---|
문학은 더 외로워져야 한다 (0) | 2013.12.15 |
우주를 향한 몸의 환유 /황희순 시집 『미끼』 (0) | 2013.11.21 |
삶에 깃든 자연의 섭리를 찾는 시들 (0) | 2013.10.05 |
허금주 시집 『비자림에 가고 싶다』: 기억이 주는 통증과 치유의 기록 (0) | 2013.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