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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아이러니와 화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18. 13:10

 

현대시의 아이러니와 화자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머리말

 

흔히 서정시의 원리를 동일성으로 설명한다. 주체가 자기 밖의 세계를 자아의 세계로 동일화해내는 문학적 양식이 서정시라는 것이다. 조동일이 서정 장르를 ‘세계의 자아화’1)라 규정하는 것이나, 김준오가 서정시의 본체를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나 ‘자아와 세계의 일치감’2)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바로 대표적인 견해들이다. 또한 에밀 슈타이거는 서정적인 것들의 속성을 ‘회감’(Erinnerung)이라 파악하고 이 “회감은 주체와 객체의 간격 부재에 대한 명칭일 수 있으며 서정적인 상호융화에 대한 명칭일 수 있다.”3)지적하고 있는데 이 또한 같은 견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서정시 역시 이런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지는 의심해볼 만하다. 시를 통해 자아와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루카치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별을 보고 길을 찾던 행복한 시절’에나 가능했던 문학적 존재 양식이다. 적어도 보들레르 이후 현대시에서는 주체와 객관세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통일적으로 아우르는 절대적인 일원론적 세계관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의 시에 있어 자연은 절대적인 완전한 세계상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러한 자연과 인간 주체와의 행복하고 조화로운 통일도 불가능하게 된다. 보들레르의 유명한 시 「만물조응」(Correspondence)은 상징을 통한 자연의 비의(秘意)에의 도달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비의와 같은 그 완전한 세계상이라는 것이 불안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의 감각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야우스는 보들레르가 갖는 이러한 문학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제부터 현대적인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자연에 따라서 혹은 자연처럼 창출할 수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이전에 낭만주의자는 숲의 복판을 자연의 천장과 성당으로 느꼈으며 그 숲의 나무들의 살랑이는 소리에서 신비스러운 산스크리트의 음조들을 듣는다고 생각했다면, 이제 현대적인 시인은 그러한 숲의 한가운데서 도시의 한층 더 놀라운 시를 생각하게 된다. .......(중략)

 

그 시(악의 꽃)는 자연에 대한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뀜으로써 생겨난 현대의 서정시 및 미학에 있어서 최초의 도발적인 정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첫째, 그 마지막 미적 형태로 존재하는 자연의 이상성, 다시 말해 숭고함으로 드러나는 자연미의 소멸 단계에 있는 자연의 이상성에 대한 거부. 둘째, 자연과 문명의 루소적 반립명제, 즉 인간은 본래 선한데 사회화로 인해 타락해버렸다는 신념의 배척. 셋째, 주체와 자연, 감각적 경험과 초감각적 경험의 낭만적․감상적인 교감의 포기 등이다.4)

 

 

 

이렇듯 근대 이후의 시는 주객의 통일성이나 동일성의 원리에 의하기보다는 타자성의 인식 그리고 주객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5)김소월의 「산유화」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러한 통일성의 상실이다. 그것을 ‘청산과의 거리’6)로 보건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7)으로 보건 자연이라는 보편적 세계 속에 일치감을 찾을 수 없는 근대적 존재의 외로움과 소외감의 표현이다.

 

지향해야 할 절대적 가치나 의거해야 보편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채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그것 사이의 긴장의 경험은 아이러니라는 미학적 태도로 나타난다. 아이러니는 거리두기이다. 단일한 믿음이나 하나의 가치관으로 자기 자신이나 자기 밖의 세계를 환원하지 않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폐기하여 허무주의에 자신을 내맡기지도 않은 채, 모든 사고와 가치들이 가진 허위와 억압성을 끊임없이 들춰내고 부정하여 그것들 사이에 혹 존재하는 진실을 끝까지 찾아나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아이러니의 방식은 예술이 절대적 가치나 영원불변의 원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들에게 끊임없이 반기를 드는 근대적인 미적 자율성과도 관계가 있다.

 

아이러니란 원래의 의도를 숨기고 반대로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영리하고 똑똑하나 겉으로는 약하고 무식하고 우스꽝스럽게 가벼워 보이는 에이론이 힘세고 진지하고 잘난척하는 알라존을 이긴다는 데서 온 말이다. 에이론이 알라존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가 상반되는 두 태도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8) 알라존이 자신의 힘과 신념을 맹신하는 데 비해 에이런은 약함과 강함, 영리함과 미련함이라는 두 가지의 대립을 알면서 거기에서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알라존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이러니는 단순한 가장만은 아니다. 동물의 보호색처럼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적에게 일격을 가하는 수사적인 장치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또 표현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아이러니는 균형잡힌 넓은 시야를 성취하게 하고, 삶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불일치의 공존이 삶의 구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아이러니는 근대적 예술이 가지는 전복성과 불온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예술적 방식이고 태도이기도 하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아이러니는 거리두기의 방식이다. 하나의 통일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하나의 가치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태도가 아니라 대립적인 것들을 상대화하고 그것들에 거리를 두는 태도가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이러한 거리두기는 시에서는 주로 시적 화자의 태도를 통해 나타난다. 주객의 통일이나 동일성으로 서정시를 규정했을 때 시적 화자라는 말은 불필요한 개념이다. 말하는 사람이 곧 서정의 주체이기도 하고 그 시를 읽는 독자 또한 이들과 크게 분리되지 않는다. 시인이나 시 안의 시적 주체나 독자나 모두 시에서 구현된 통일된 세계상 속에서 행복한 재회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시 속에서 표현된 정서의 주체와 그리고 또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분리되고 서로 거리를 가지게 될 때 거기에서 화자라는 개념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는 아이러니적 방식과 태도를 가장 잘 활용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온 김수영과 황지우의 몇 편의 작품을 통해 현대시에서의 아이러니의 개념과 의의를 살피고 그것이 작품 속에서 화자를 통해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2. 김수영의 「눈」에 나타난 아이러니와 시적 화자의 성격

 

김수영 시적 지향이나 시적 태도의 단초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그의 초기시 「달나라의 장난」을 들 수 있다.

 

팽이가 돈다

어린 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 중략 ....................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레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달나라의 장난」 일부

 

 

 

이 시에 대해서 유종호는 “퓨리턴한 반속정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지적하고9) 염무웅은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마음 가짐으로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도덕적 각성을 보여준 시로 평가하고 있다.10) 왕성한 생활인인 뚱뚱한 주인으로 표현된 너절하지만 그러나 강고한 일상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달나라의 장난’ 같은 순수한 꿈이나 이상의 세계를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정신적 지향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정신적 지향을 ‘서서돌고 있는’ ‘팽이’로 표현한 이 시의 핵심적 사항에 대한 지적을 놓치고 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돌아가는 팽이는 나태와 안주를 거부하는 정신의 표현이다. 어떤 절대적인 가치나 완전한 세계에 몸을 의탁하고 정립된 완전한 신념체계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고 또한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단일한 세계 파악의 태도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긴장의 세계이다. 팽이처럼 움직이는 삶의 구체성 속에서 세상의 모습을 똑바로 보려는 그런 정신적 자세와 그것의 표현이 바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의 정신적 태도를 이해하면 그의 시 작품들에서 좀 더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눈」을 살펴보자.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눈」 전문

 

 

이 작품은 보통 순결함과 생명의 회복을 주장하는 시로 해석되는 것이 정설로 되어 왔다. 김흥규는 “눈을 향하여 기침을 하는 행위는 일상적 생활의 굴레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진정한 영혼과 육체를 되찾는 행위가 된다. 눈의 한없는 순수함, 차거움, 신선함을 통해 김수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추악함을 씻어낼 수 있는 순결성을 생각하였던 것이다.”11)라고 설명하고 있고, 유종호는 “살아 있는 눈을 향해서 하는 기침은 살아 있다는 신호의 전달이다. 그것은 마당을 덮고 있는 순백의 눈을 향한 시각적 지음의 전달이고 공명의 동작이다. 그리하여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고 할 때 그것은 도덕적 순결과 무구함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정화의 의식에의 권유가 된다.”12)고 지적한다. 또한 김현승은 “특히 마지막 연에서 신선한 눈과 더러운 가래침의 이미지를 통하여 시인이 사는 울적한 현실과 동경의 청신한 세계와를 효과적으로 대조시키는 뛰어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13)고 말하고 있다.

 

눈의 깨끗함과 가래로 표현된 현실의 더러움을 대비하여 순수하고 가치있는 것을 지향해가는 낭만주의의 이분법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시를 해석한 위의 견해들은 분명하고 단정해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들이 맞는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먼저 김수영의 다른 시들을 놓고 볼 때 김수영의 이 시가 위의 해석들에서처럼 순결이나 생명의 가치와 같은 절대적인 원리를 단박에 승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절대적인 가치 속에 함몰하여 안주하기보다는 그런 세계를 끊임없이 상대화하고 거부하면서 팽팽하면서 불안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김수영 시의 태도이다.

 

또한 위의 해석들과 같이 생각했을 때 3연의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위의 해석들에서는 ‘영원한 생명력’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침까지 눈이 ‘살아있다’ 해도 쉬 사라질 눈을 영원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납득하기 곤란하다. 이 시에서 눈은 영원한 생명력을 추구하는 존재들에게 애써 자신의 순수한 생명력을 가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대상은 죽음을 넘어서거나 죽음이 없는 영혼과 육체가 아니라 ‘죽음을 잊어버린’ 육체이다.

 

마당에 떨어진 눈은 천상의 것이 세속화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깨끗하거나 영원할 수 없다. 하지만 눈은 마치 자기가 영원하고 순결한 생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 양 아침까지 살아서 깨끗함을 과시한다. 그런데 시인은 가래를 뱉어 이러한 순수함에 오칠을 한다. 이런 기침을 하는 행위나 가래를 뱉는 행위는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는데 위의 해석들에서처럼 그것이 곧 눈의 순수함을 되찾는 행위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보통 2연의 ‘눈더러 보라고’라는 구절과 4연의 ‘눈을 바라보며’라는 구절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반대로 눈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행위임을 말해주는 근거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시는 위의 해석들처럼 눈을 통한 자기 정화라든가 깨끗한 이상 세계의 지향을 보여주기보다는 반대로 그러한 세계의 가능성이나 존재를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눈의 깨끗함을 보고 시인은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가래침을 뱉어 더럽힘으로써 희열을 느끼고 있고 눈에 가래침을 뱉듯 종이 위에 글자를 뱉어내는 시적 행위를 통해 시인은 자유를 실천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이 시가 눈으로 표상되는 깨끗함과 변치 않는 생명력을 가진 어떤 초월적 세계를 단순히 부정하고 현실적 가치를 주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시가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현실과 이상, 깨끗함과 더러움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 대립이다. 이 시는 현실이나 이상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둘 사이의 긴장 속에 놓여 있다. 가슴에 가래가 고이는 현실의 고통 속에서 시인은 새벽에 마당에 쌓여 있는 눈의 깨끗함에 환희를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를 어떤 완전한 세계의 모습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 정신적 안주나 지향점을 찾지 않는다. 그것은 잠시 죽음을 잊은 허상의 세계임을 시인은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현실의 속악함을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그것으로 벗어나 어떤 깨끗한 세계에 안주하지 못한다.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 있다. 시인은 더러운 현실의 세계에서는 깨끗한 눈을 바라보고 있지만 또한 깨끗한 눈을 보면서는 쉬 사라지고 더럽혀질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을 바라본다. 이 시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이 시의 화자를 분석해 보면 좀더 쉽게 파악된다. 이 시의 화자는 2연과 4연에서 “ --하자”라고 권유적 진술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화자만이 아니다. 눈을 보고 신기해 하고 거기에 가래를 뱉고 싶은 충동을 가진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즉 시 속에 표현된 정서를 느끼고 있는 서정적 주체이다. 대부분의 시에 있어서는 이 서정적 주체가 곧 화자이지만 이 시에서는 이 둘이 분리되어 있다. 권유적 진술을 하고 있는 화자는 1연과 3연에서는 숨어 있다. 화자는 작품 밖으로 밀려나 있고 서정적 주체가 가지는 눈에 대한 느낌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두 인물을 통해 서로 상반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2연과 4연의 권유적 진술을 하고 있는 화자는 경험적 화자라고 할 수 있다. 독자와 시인들에게 ‘--하자’라고 말하는 인격을 가진 한 개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1연과 3연의 화자는 내포적 화자이다. 삼인칭 소설의 화자처럼 작품에서 빠져 있다. 이러한 화자에 의해 말해지는 1연과 3연의 정서는 한 개인을 넘어 좀더 일반화된다. 눈의 살아있음에 신기해하고 거기에서 어떤 순결한 정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서정적 주체는 2, 4연의 경험적 화자인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시인이 권유하는 대상인 젊은 시인들이기도 하고 독자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시는 기존의 해석과는 좀 달리 해석된다. 시인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눈을 보고 순결함이라는 초월적 세계를 꿈꾸지만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세계가 가능하겠냐고 계속 딴지를 걸고 있다. 경험적 화자와 일반화된 서정적 주체가 서로 상반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을 통해 현실과 이상 그 어느 곳에도 진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지 않은 채 세상을 바라보려는 팽팽한 긴장과 그 긴장을 유지하며 세상의 어둠과 허위를 드러내고 신성화된 신화들에 먹칠을 하는 것이야말로 시를 쓰는 행위의 의의임을 지적하고 있다.

 

 

3. 황지우의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의 아이러니와 화자의 성격

 

 

김수영과 마찬가지로 황지우의 시에 있어서 두루 관철되는 시적 방식은 아이러니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비롯한 초기 시작에서부터 아이러니는 그의 시에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끼룩끼룩 세상을 떠매고 날아가는 새들을 보다가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는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이 작품은 세상의 속악함과 세상에의 환멸을 표현하는 낭만적 아이러니와 아주 닮아있다. 낭만적 아이러니가 환멸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이상화된 세계에의 지향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반해 그의 아이러니는 삶을 억압하는 현실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낭만적 아이러니가 가진 효과와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게눈 속의 연꽃」도 아이러니로 읽혀진다. 이 시는 뻘밭을 기며 고군분투하는 게의 모습과 수직으로 상승하여 하늘에 올라 별자리가 된 게의 모습을 대조시켜 현실과 이상, 삶의 질곡과 그것의 벗어남의 관계를 말하고자 한다. 현실과 이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곡이 바로 해탈임을 아이러니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 초기나 중기시들에 나타나는 아이러니는 지극히 수사적인 차원의 것들이다. 수사적 아이러니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대비해서 시인의 생각을 보다 확고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웨인 부스(Wayne C Booth)는 이를 확정적 아이러니(stable irony)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14)아이러니를 통해 확실한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고, 반대의 태도를 드러냄으로써 보다 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는 그런 아이러니이다.

 

이에 비해 하나의 사고에 포섭되거나 단일한 원리로 환원되지 않으려는 대립물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태도를 불확정적 아이러니(unstable irony)라고 말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김수영의 시적 태도를 포함해서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기도 하고 그것을 형상화해내려는 시적 방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황지우의 후기시 역시 이러한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수 있는가, 이리라

 

-「어느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전문

 

 

50이 다 된 나이에 쓰여진 시다. 이러한 연령을 반영하듯 이 시는 인생에 대한 쓸쓸한 체념이 느껴진다. 그것은 일단 어조에서도 온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어조는 다분히 주저하면서 머뭇거리고 체념하는 듯한 어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느낌은 시의 리듬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풀어진 산문체로 씀으로써 운문이 주는 박진감이나 생동감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마치 삶에 대한 기대나 바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시의 배경을 생각해 보는 것도 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시의 배경은 술집이다. 다방이나 술집이나 누군가를 만나는 곳이다. 다방에 혼자 있거나 술집에 혼자 있거나 다 불쌍하고 외롭게 보인다. 누군가 만날 사람을 못 만났거나 어떻게 해서 혼자 되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다방은 만남의 시작이다. 그러나 술집은 만남의 끝에 존재하는 곳이다. 때문에 다방에서 홀로 된다는 것,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 아직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집에서 혼자 있다는 것은 누군가 만나리라는 기대로 희망도 남아있을 수 없다. 우리가 다방에서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외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불쌍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혼자 쉬고 있다거나, 무슨 일로 상대에게 바람을 맞았지만 어느 땐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너무 처연하게 보일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곳에서 혼자 버려진 너무나 쓸쓸한 한 인간을 보는 듯이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시는 인생에 대한 열패감과 절망감을 표현한 자기 연민의 시로 읽혀진다.

 

그러나 이렇게만 이 시를 이해하고 마는 것은 이 시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 시의 아이러니는 ‘아름다운 폐인’이라는 구절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과거 70년대나 80년대를 살아왔던 것처럼 어떤 가치라든가 신념이라든가 희망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가치지향이 없는 삶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폐인이다. 그러나 신념이나 가치나 전망이 주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로 아름다울 수가 있다.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도 아녔다/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뼈아픈 후회)이라고 말한 구절처럼, 신념에 이끌린 과거의 삶이 사실은 억압과 자기기만에 다름이 아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슬픔처럼 상스럽다’라는 표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상일에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런 것이 사실은 상스러운 감상과 무어 다르겠는가 하는 인식이다. 그런 것을 벗어버린 초연함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자신의 모습을 절대화하고 미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거의 삶이 억압이고 자기 기만이지만 또한 지금의 자기 모습도 ‘뚱뚱한 가죽부대’처럼 퍼지고 주저앉혀진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폐인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목소리 높은 신념에 이끌린 바깥의 삶이나 지금 주저앉혀진 자신의 삶, 그 어디에도 진실이나 정당한 길은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사이의 끝없는 긴장과 그 사이에서의 방황에 사실은 우리의 삶이 놓여있고 거기에서 진실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적 태도는 이 시의 화자를 분석해보면 좀더 분명히 설명된다.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과 거의 거리가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다. 그런 만큼 이 화자는 단일한 경험적 화자이다. 하지만 자세히 이 시를 읽어보면 이 화자는 두 개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한 인물이지만 서로 다른 어조와 태도를 보여주는 두 목소리를 말하고 있다.

 

하나의 목소리는 과거의 입장에서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목소리이고 또 하나의 목소리는 미래의 관점과 결부된 목소리이다. 과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화자는 끔찍하고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을 느끼는 폐인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신념에 차서 세상에 대해 확고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확신에 찬 삶을 살아온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러한 자신의 삶은 이제 몰락이고 패배이고 상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목소리는 이러한 열패감과는 다른 편안한 행복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히 들어주’는 태도로 표현된다. 그것은 세상사에 대한 초연함일 텐데 그런데 그 초연함은 세상일에 무관심하려는 도피적 태도와는 좀 다르다. 세상에서 말해지는 주장들을 잡담으로 들으면서 그것을 함께 감싸안으려는 여유로운 자세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것은 폐인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시인이 이 두 목소리를 한 시 작품 안에서 하나의 화자로 한꺼번에 담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두 입장이 모두 진실일 수 있음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이런 두 입장의 아이러니컬한 대립과 긴장 속에 삶의 진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편안한 초연함 속에 안주하거나 아니면 또다시 젊음의 열정과 확신으로 고투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둘이 자신의 정신 속에 함께 들어가 있다는 것이 삶의 피할 수 없는 진실성임을 ‘술잔의 수위를 아깝게 바라보’듯 안타깝지만 바로 볼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아이러니는 단순히 시적 수사법만이 아니고 하나의 예술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지향해야 할 절대적 가치나 의거해야 할 보편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채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그것 사이의 긴장의 경험은 아이러니라는 미학적 태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시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이 본고의 기본적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고는 현대시에 나타난 아이러니의 방식과 효과를 두 시인의 시를 통해 살펴보았다.

 

김수영의 「눈」에서는 두 개의 인물이 존재한다. 2연과 4연에서 “ --하자”라고 권유적 진술을 하고 있는 시적 화자와 눈을 보고 신기해 하고 거기에 가래를 뱉고 싶은 충동을 가진 또 하나의 인물 바로 서정적 주체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시에 있어서는 이 서정적 주체가 곧 화자이지만 이 시에서는 이 둘이 분리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는 경험적 화자와 일반화된 서정적 주체가 서로 상반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을 통해 이 시는 현실과 이상 그 어느 곳에도 진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려는 팽팽한 긴장과 그 긴장을 유지하며 세상의 어둠과 허위를 드러내는 것이 시를 쓰는 행위의 의의임을 지적하고 있다.

 

황지우의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시에 있어 화자는 두 개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이 시에서 화자는 한 인물이지만 서로 다른 어조와 태도를 보여주는 두 목소리를 말하고 있다. 하나의 목소리는 과거의 입장에서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목소리이고 또 하나의 목소리는 미래의 관점과 결부된 목소리이다. 과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화자는 자신이 폐인이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지금의 삶이 신념과 확신을 상실한 몰락이고 패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목소리는 이러한 열패감과는 다른 편안한 행복감을 말하고 있다. 여유와 초연함을 찾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두 목소리를 한 시 작품 안에서 하나의 화자로 한꺼번에 담아내어 이 두 입장이 모두 진실일 수 있음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이런 두 입장의 아이러니컬한 대립과 긴장 속에 삶의 진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아이러니는 하나의 통일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하나의 가치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태도가 아니라 대립적인 것들을 상대화하고 그것들에 거리를 두는 태도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거리두기는 시에서는 주로 시적 화자의 존재 방식을 통해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시적 화자의 상반된 목소리를 통해서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는 시적 화자와 서정적 주체의 서로 다른 시각을 통해서 서로 대립적이고 상반된 가치들의 긴장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 2013년 충남시인협회 문학세미나 자료 (2013. 08.17)

 

주석

 

1)조동일, 『문학연구방법』(지식산업사, 1980), 172쪽

2)김준오, 『시론』 (문장사, 1986), 22쪽

3)에밀 슈타이거, 시학의 근본개념 ( 오현일, 이유영 공역, 삼중당, 1978), 96쪽

4)한스 로베르토 아유스, 김경식 역, 보들레르: 「반자연으로서의 예술」( 문학동네 1998년 겨울호)

5)그리고 그것을 가장 선명한 수사적 장치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낭만적 아이러니’이다. 절대적이고 완벽한 이상적인 세계상을 지향하지만 속악한 현실의 부정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어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 놓여 있는 정신적 태도와 그 표현이 바로 낭만적 아이러니이다.

6)김동리, 「청산과의 거리」, (『국문학논선 9』, 민중서관 1977), 150쪽

7)김종길,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심상』 1974년 2월호), 22쪽

8)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민음사, 1976) 참조

9)김주연, 「다채로운 레파토리」( 『김수영의 문학』, 민음사, 1983), 30족

10)염무웅, 「김수영론」(『 김수영의 문학』, 민음사, 1983), 144쪽

11)김흥규, 『한국현대시를 찾아서』 (한샘, 1994), 137쪽

12)유종호, 「시의 자유와 관습의 굴레」( 『김수영의 문학』, 민음사 1983), 255쪽

13)김현승, 김수영의 시사적 위치와 업적 ( 김수영의 문학, 민음사 1983), 59쪽

 

14)Wayne C. Booth, A Rhetoric of Irony, The Univercity of Chicago press, 197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