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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영화적 표현 방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19. 23:00

 

현대시와 영화적 표현 방식

 

황정산(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1. 들어가며

 

1895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파리에서 최초의 영화 시사회가 열린 이후 100여년의 기간 동안 영화는 성장을 거듭하여 오늘날 현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예술로 자리잡고 있다. 이미 하우저는 그의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20세기를 영화의 시대라고 명명한 바 있다.

 

사실 초기의 영화는 마술이나 신기한 눈요깃감 등으로 여겨졌다. 그 후 일정한 예술적 형식을 갖추었을 때도 문학이나 연극 등 기존의 예술의 영향 하에 놓여 있었다 할 수 있다. 초기 영화의 많은 작품들이 세익스피어 등 중요한 연극 작품을 영화화 했다거나 톨스토이 등 주요 작가의 소설 작품을 영화화 한 것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미 사태가 역전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의 주요 성과들이 문학을 포함한 다른 예술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공한 영화가 문학 작품으로 발간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소설 작품이 미리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창작되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점은 우리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0세기 초 처음 우리에게 영화가 소개된 후 1920년대 들어 본격적인 영화작품이 만들어지면서 『춘향전』, 『운영전』, 『벙어리 삼룡이』 등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고 7,80년대까지도 <문예영화>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이는 영화가 문학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영화가 훨씬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화의 대중적인 영향력이 어떤 다른 예술보다도 엄청나다는 점은 물론이려니와 영화에서의 새로운 성과들이 다른 예술 장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화가 이제는 다른 예술들을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영화의 시대에 글쓰기 역시 ‘영화적인’ 글쓰기가 되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영화는 장르상 서사예술이다. 때문에 그것은 소설과 가장 많이 닮아있는 예술 장르라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영화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는 대부분 그 대중성을 영화가 가진 서사성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관객에게 계속된 긴장을 요구하는 잘 짜여진 플롯, 현란한 액션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다각적인 눈 이 모든 것들은 서사예술의 특징을 최대한 살린 기법들이다. 그러면서도 서사예술의 대표적인 장르인 소설보다도 더 자유롭고 풍부한 효과를 내고 있어 이제 영화가 소설을 대체해나갈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마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가 가진 시간적 한계와 감상의 순간성이라는 조건 때문에 소설의 서사적 깊이를 담기 힘들다. 『전쟁과 평화』나 『닥터 지바고』 등의 대작 장편소설을 영화한 작품들이 원작의 감동을 재현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소설에 비해 저급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화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고 그것은 서사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시적인 상상력 또는 시적인 감수성이 이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명백히 영상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영화적 개성을 표방하는 작품들, 이를테면 <시네 포엠 Cine Poeme>이나 <포에틱 필름Poetic Film>이라고 불리는 것들(예를 들어 한국영화로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같은 영화)에서는 물론이겠지만 아주 일반적인 극영화에서도 사실은 서사적 요소 말고도 시적인 감성과 상상력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을 따져보고 그것이 지금의 우리시의 상상력에 어떻게 작용하여 어떠한 새로운 시적 표현을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시사에서 영화의 영향이 감지되는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1930년대 모더니스트 시인들인 김기림, 이상, 김광균 등의 시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사진과 영화 등 현대의 기술복제예술에 대한 언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서구의 풍물이나 현대적 생활 풍습 등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시에 있어 영화의 영향이 좀 더 본격적이고 광범위하게 논의될 수 있는 것은 1950년대에 와서이다. 김규동, 박인환 등이 결성한 『후반기』 동인들의 시와 그 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김수영의 시에서는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후반기』 동인들은 영화에 큰 관심을 가져 박인환 같은 이는 영화 평론을 직접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시들에 있어서 영화가 이들 시인들의 감수성의 한 원천일 수는 있었으나 영화의 형식이나 표현이 시작의 표현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그때까지도 아직 예술에서의 문학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영화의 영향을 받은 시 작품들이 창작된다. 황지우, 하재봉, 장정일 등의 시인들이 영화적 형식이나 영화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썼다. 이들 시인들은 영화의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를 구사하거나 마치 시나리오처럼 영화의 장면 개념을 시에 도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에서 영화의 영향이 시적 표현을 새롭게 변화시켰다고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영화라는 장르를 도입하여 기존의 시적 표현을 낯설게 하고 또 소재의 확대를 기하기는 했지만 아직 영화가 시의 형식과 표현을 변화시켰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시에 있어서 영화는 아직 소재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시 작품들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영상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시인들이 문단에 새롭게 등장하면서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 그리고 시적 표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들 세대에게는 영화를 비롯한 영상매체가 중요한 문화적 경험으로 등장한다. 때문에 그들에게 영화는 문학 작품 창작을 위한 감수성과 상상력의 원천으로까지 작용하기도 한다.

 

본고는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두 시인의 작품들을 통해 영화가 시적 언어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두 시인은 진은영과 김민정이다. 그런데 왜 이 두 시인을 대상으로 했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겠다. 두 시인 모두 2000년대의 한국 현대시를 이끌어가고 있고 또한 최근 우리 시의 주조적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인들이다. 하지만 두 시인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김민정이 요설적인 경박한 언어와 엽기적이기까지 한 해체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신세대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시인이라 한다면, 진은영은 훨씬 전통적인 시작법의 문법에 충실한 시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경향의 신예 시인들의 작품에 드러난 영화의 영향을 분석하여, 영화적 표현과 영화적 감수성이 몇몇 시인들의 전위적이고 고립된 작업에서 나타난 지엽적인 경향이 아니라 현대시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고 있는 뚜렷한 추세라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2. 영화적 시점과 새로운 시적 진술 형식

 

영화는 카메라의 예술이다. 카메라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영화의 시점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시점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영화는 문학, 특히 소설과 상당히 닮아 있다. 그러나 소설이 대체로 한 편의 소설에서 통일된 시점을 보여주는 것에 비해 영화는 다양한 시점이 동시에 사용된다. 카메라를 멀리 위치하여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눈을 대신하여 그 인물의 주관적 경험과 정서를 표현하기도 한다. 보통 전자를 롱숏(long shot)이라 하고 후자를 클로즈업(close up)이라 한다. 전자는 소설에서 제한적 전지 시점 또는 관찰자 시점에 해당하고 후자는 일인칭 시점이나 인물시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는 여기에다 전지 화자를 등장시켜 전지적 시점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런데 보통 시에 대한 논의에서는 시점을 중시여기지 않는다. 시, 특히 서정시는 시인의 주관적 정서의 표현이기에 그것은 당연히 일인칭 주인공 시점일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에서도 시점과 화자가 중요하게 논의되기도 한다. 특히 이는 우리 시에서 이야기시를 논의할 때 주로 거론되는 개념이다. 시에 서사적 요소가 도입되고 그것을 통해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강화하려는 이야기시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리얼리즘 시 논의에서 시적 화자의 문제가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리얼리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인 소설 문학의 영향력이 시에 미친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하여간 이 경향의 시에서는 시적 화자와 시적 주인공은 분리되고 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점이 중요한 시적 장치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이야기 시들에서 시점은 제한적 3인칭 시점이거나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이는 근대적 원근법의 시점이다. 그리고 이는 합리적 이성을 통해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근대적 사고의 반영이기도 하다.

 

다음 인용한 백석의 「여승」이라는 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女僧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平安道의 어늬 山 깊은 금덤판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年이 갔다지 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여승」전문

 

이 작품은 지금 <여승>이 된 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철저히 객관적인 화자를 통해서이다. 시적 화자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그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녀가 처한 현실의 가혹함을 독자들에게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이러한 객관적 인식을 통해 우리의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만들고 있는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근대적 과학적인 사고가 이 시의 시점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쓰여진 다음 시에서는 기존의 서정시나 이야기시와는 전혀 다른 시점을 볼 수 있다.

 

 

 

유리창 밖으로 붉은 눈발 날린다

커다란 칼을 들고 다정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수소를 힘껏 내리치던

때가 있었지, 요즘엔 아무 일도 없다

냉기로 달아오르는 난로 옆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천장에 오래 켜놓은 형광들이 깜박인다, 칼은 녹슬었고

 

... 중략 ...

 

유리창 밖 풍경은 거대한 얼음 창고 안에 갇혀 있다

눈보라 속 나무들이 공중에 냉동고기처럼 검게 달려 있고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가며 그녀는 바라본다

붉은 눈송이들이 녹아 흐르며

피범벅된 송아지 같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물렁물렁한 세계를,

미리 갈아놓은 칼로 겨울의 탯줄을 끊어야 한다

길고 부드러운 혀로 떨고 있는 어린것을 핥아 주는 일

 

여자가 성에 낀 유리창을 활짝 연다

눈이 그치고 맑은 하늘에 토막 난 붉은 구름 떠간다

 

- 진은영, 「정육점 여주인」 부분

 

이 시에서는 화자가 본 그녀의 모습과 함께 그녀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이는 영화의 시점과 크게 닮아 있다. 객관적인 카메라의 눈으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위를 보여주다가 다시 카메라가 인물의 눈이 되어 거기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의 표현 방식이 이런 시적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시적 주인공(정육점 여주인)과 시적 화자(시인)가 분리되어 있다. 전통적인 서정시의 표현이라면 시인은 시적 주인공인 정육점 여주인의 퍼소나를 뒤집어쓰고 그녀의 목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드러나지 않는 화자의 입을 통해 시적 주인공인 정육점 여주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는 3인칭 시점이고 객관적 카메라의 눈으로 대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에는 그런 시점으로만 일관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시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등장인물의 시점이다. 시에서 그려진 유리창 밖의 모습이나 첫 번째 연 마지막 행의 ‘깜박이는 형광등’과 ‘녹슨 칼’은 바로 시적 주인공인 정육점 여주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모습이다. 마지막 연은 이를 좀 더 선명히 보여준다. 성에 낀 유리창을 활짝 여는 여자의 모습은 객관적인 눈으로 즉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본 그녀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뒤에 바로 놓이는 하늘과 구름의 모습은 그녀의 눈에 비친 풍경이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인의 주관적 눈으로 ‘세계를 자아화’하는 서정시는 주관과 보편을 통일하려는 동일성의 세계를 지향한다. 반대로 합리적 이성의 눈으로 세상의 객관적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리얼리즘 소설의 시점은 파편화된 세상의 경험들을 끌어 모아 세상에 대한 총체성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 시의 흔들리는 시점은 보편적인 세상 경험의 상실과 연관되어 있다. 시를 읽는 우리가, 아니면 시를 쓴 시인이 바라보는 정육점 여주인의 모습은 그 여주인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과 겹치면서 끝없이 파편화된 인식으로 쪼개지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때문에 이 시에서 현실의 모습은 이 시의 표현대로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물렁물렁한 세계”로 나타난다.

 

다음의 시에서의 시점은 좀 더 복잡하다. 그리고 이 역시 영화적 시점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브래지어를 벗어던졌다. 나는 팬티도 벗어던졌다. 나는 콘택트렌즈와 치아교정기에 인조 속눈썹까지 자꾸만 벗고 또 벗어던졌다. 곤약같이 껍질 벗긴 흰 살점 덩어리, 이마저도 체증이 일어 나는 펄펄 끓는 기름 솥단지 안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백 살 노파의 미주알처럼 겹겹의 허물이 벗겨졌다 입혀지고 까졌다가 딱지 앉더니 유면위로 샛노란 튀김옷의 그녀가 솟구쳐오르는 것이었다. 그녀가 딸깍, 층층서랍으로 계단이 난 제 문을 따고 들어가자 화살표처럼 질주해나가는 앙상한 들개들이 있었다. 그녀가 출렁, 젖꽂지를 새순 삼아 양팔 벌린 젖나무가 되었을 때 가지마다 치렁치렁 늘어진 포대자루처럼 젖을 빨아대는 투실투실한 들개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손이 없는 고등어 부인이 날개 같은 지느러미로 비질을 끝냈을 때 쓰레받기 위에는 말린 고추처럼 고부라진 황금빛 열쇠들로 수북하였다.

 

- 김민정, 「고등어 부인의 윙크」부분

 

 

이 시의 제목은 영화화되어 유명해진 마누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라는 작품 제목의 패러디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제목만이 아니라 이 시의 이미지 제시 방식은 거의 영화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환상의 공간에서 한 인물을 만나고 그 인물의 시선으로 현실 사물의 이면을 선명하고 섬뜩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러한 이미지 제시는 기존이 시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병치나 연상의 연쇄하고는 좀 다르다. 인물의 동작이 보여주는 동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미지들이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시점이 변화가 수반된다. 최초의 일인칭 시점은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변했다가 다시 인물시점으로 바뀌어간다. 그것은 그대로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의 눈으로 일상의 현실을 보여주다가 상상 속에 한 인물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다음 카메라가 다시 그 인물이 눈이 되어 그 인물의 보는 것을 보여주는 바로 그런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이 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객관적이고 분명한 확고한 세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환상 속에서 주관적 변형에 다름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인의 다른 작품은 시점의 변화에 따른 연의 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각 연은 영화의 장면에 해당하는 번호가 붙어 있다.

 

 

#1 엄마는 매일 더러워서 유한락스로 욕조 채우기 놀이를 무지 좋아했어요 변기 위에 웅크려 앉았다가 퐁당하고 욕조 안으로 뛰어들어 사포로 몸 비비기 놀이도 퍽 즐겼는데요

 

...(중략)...

 

 

#2 아내는 매일 아파서 작정하면 안 아픈 부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건강 서적을 잔뜩 사들여서는 뭐 걸릴 만 한 병이 없을까 스크랩을 해두는 게 취미였느니까요

 

...(중략)...

 

 

#3 언니는 매일 배고파서 아예 아무것도 안 먹으려 했어요 죽을 끓여가면 그릇째 다 엎어버리고 깨드득 깨드득 뻥튀기 같은 빈 접시만 깨물어대거나 교자상을 침대삼아 잠들어버리기 일쑤였지요

 

...(중략)...

 

 

#4 토끼의 배를 내리가르자 뒤엉킨 VTR용 필름이 모락모락 김을 뿜는 내장처럼 왈칵 쏟아져 나왔다 김형사가 복원시킨 테이프를 플레이시켰을 때부터 질러대기 시작한 한 여자의 비명이 방방마다 사이렌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하략)...

 

- 김민정, 「댁의 엄마는 안녕하십니까?」, 부분

 

 

한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서로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한 가정주부의 삶의 모습을 딸, 남편, 동생의 시선으로 각각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사를 등장시켜 제 삼의 객관적 시점을 보여준다. 이는 바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따라 사건을 전개해 가는 영화적 방식이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를 통해 이 시는 인물들 간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얘기해 준다.

 

 

3. 영화적 편집과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한 장면 한 장면 찍힌 필름들을 붙여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찍힌 각 컷들을 배치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바로 여기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역량과 예술성이 크게 발휘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편집 중에서도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편집방식이며 또한 가장 효과적으로 예술성을 창출하는 편집 방식으로 흔히 몽타주(montage) 편집을 든다. 몽타주는 따로 각기 촬영된 일련의 필름들을 병치시킴으로써 공감, 대조, 강조, 풍자 등의 정서적 효과를 얻어내는 영화의 편집기법을 말한다. 전쟁 장면에서 학살되는 동물들의 이미지를 병치하여 전쟁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등의 방법이 쉬운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을 완성한 사람으로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이 너무도 유명하다.

 

그런데 에이젠슈타인에 따르면 영화의 몽타주는 시의 은유에서 빌어 온 것이라 한다. 이미지들의 유사성을 통해 연결하기 때문이다. 시적 비유 중에서도 병치은유가 바로 이 몽타주 편집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의미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음의 유명한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시가 이런 병치은유의 가장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군중 속에 있는 얼굴들의 환영

축축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 모습과 검은 가지, 꽃을 병치시킴으로써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황폐하고 소외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몽타주 편집은 비록 그것이 시의 은유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시의 병치은유와는 그 쓰임과 효과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은유가 유사성에 근거하여 몇 개의 사물, 몇 개의 이미지들을 병치시키는 것에 비해 영화의 몽타주는 장면과 장면 또는 사건과 사건을 병치시킨다. 영화의 몽타주는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이라는 아주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또한 몽타주 편집을 통해 영화는 공간을 시간화하기도 하고 반대로 시간을 공간화하기도 한다. 같은 시간에 벌어진 다른 공간의 사건들이 동시에 표현되기도 하고 다른 시간에 있었던 사건들이 하나의 화면으로 공간화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몽타주 편집이 현대소설의 구성에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영화의 몽타주 편집처럼 다양한 사건과 장면들의 중첩으로 구성된 현대 소설들은 대부분 총체성이 파괴된, 현대 사회의 파편화된 세계 인식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런 점은 시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단일한 정서나 단선적인 현실 파악으로는 잡히지 않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구조망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중층적인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바로 이미지와 이미지가 결합하고 장면과 장면이 병치되는 영화의 몽타주 편집 기법이 현대시에서 원용되고 있다.

 

다음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몽타주 편집을 생각하게 만든다.

 

 

좀 돌았으면 하고 꿈을 꿀 때 나는 캥거루를 만난다. 묵찌빠-묵찌빠 져야 기분 좋은 게임에서 캥거루는 묵밖에 낼 수 없는 잘린 발가락을 오므린 발등으로 내 얼굴을 내갈기는데 세 시 정각의 시침처럼 드러누운 그림자, 나는 분침처럼 째각거리는 기쁨에 서 있다. 도망칠수록 가까워지는 함정. 너 대머리 정부는 쭈글쭈글한 제 성기에 박힌 까만 점을 사인펜 툭 떨어진 자리라며 연신 침을 발라 빡빡 지워대고 앉았는데 그래서 낸들 어쩌라고! 나는 빨래줄에 목을 감아 고치로 새로이 태어나는 사형수를 질투하며 알알이 저 뜨거운 태양을 삼키고 또 삼킨 채 짓물러가는 한 덩이의 포도송이를 모방중이다. 그리하여 다시

 

1986년 여름,

 

남이섬 특설 무대에 오른 그 여자, 유미리가 앙코르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틀어쥐고 있다. 고맙습니아. 또 고맙습니다. 또 고맙습니다. 안개꽃 다발에 파묻힌 155cm의 유미리가 울먹울먹 안개 속을 걸어봐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하략)

 

- 「스무 살」부분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연쇄가 등장한다. 대낮의 백일몽과 시인의 환상 그리고 현실들이 아무런 질서도 갖지 않은 채 교차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요설과 거칠고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뒤범벅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경험하거나 떠오른 생각들이 하나의 시간으로 반죽되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에서 일어난 일들이 하나의 공간을 차지하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시 속의 시적 화자는 과거의 유년기로 퇴행을 경험하기도 하고 현실을 일탈하는 망상을 하기도 하다가 작가 유미리에서 가수 이선희로 또는 헐리우드의 스타가 되기도 한다. 이런 각각의 자신의 모습을 서로 다른 장면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시는 여러 욕망들로 찢겨져 가는 현대인의 삶의 정처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다음의 진은영의 시는 위의 시에 비하면 훨씬 전통적인 시의 문법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명확한 비유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을 사용하여 현실적 의미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들을 엮어내는 방식은 전혀 전통적이지 않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몽타주 방식으로 새롭게 제시하여 시적 표현의 또 다른 효과를 내고 있다.

 

 

하루 종일 졸린 잠이야 그 잠 속엔

볼 만한 비디오도 되새길 경구도 없어

그냥 안개 속 같은 잠이야, 라고 잠꼬대하는 순간

 

... 중략...

 

휴일과 안식일도 거르지 않았다 한 번도 여당은 뽑지 않았고

금지된 장소에서 개나 오리를 잡은 적도

잔디밭에 들어가 오줌을 눈 적도, 그런데 왜

 

기계들은 피 흘리며 돌아가는가

착한 사람들의 국경선은 불타는가

치솟아 오르는 연무 도시 한가운데

내 코가, 내 입이, 내 눈이 잠든다

 

- 「연무 도시」 부분

 

 

위에 인용된 시에서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연의 관계를 살펴보자. 첫 번째 연은 시인 자신의 생활공간과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다 다음 연에서는 자신의 삶의 공간을 벗어난 또 다른 세상의 한 편에서 일어난 노동착취와 전쟁의 경험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둘 사이를 통사적 연결을 크게 벗어나게 하면서 ‘이월시행’을 만들고 있다. 이는 두 번째 연의 이미지들을 독립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앞 연과의 통사적 연결을 인위적으로 단절시킴으로써 의미상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아 독립적인 의미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 개의 서로 다른 독립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이는 다양한 이미지나 장면들을 병치시키는 영화의 몽타주 기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이 시는 우리에게 강렬한 대비의 효과를 만들어 준다.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도덕적인 자신의 일상과 이 땅에서 또는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행들을 연결시킴으로써 그 둘 사이의 벌어진 깊은 간극과 그 속에서 느끼는 개인의 무력감을 강조해주고 있다.

 

다음의 작품은 또 다른 영화의 편집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책을 덮고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본다

백주대낮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일만 일어나므로

 

사제에게 쫓겨간 사람들이

길 위를 메우고

앰블런스와 소방차로 거리는 활기차다

열차는 수백 명을 태운 채

강물로 뛰어들 뻔했다.

 

물고기들이

노란 사이렌을 울리고

놀라서 고개 돌리면

저녁은 이미 교실 안으로 와 있다

 

칠판에는 백묵으로 무언가 적혀 있고

어둠속에는 글자들은

너무 멀리 있어 이름을 알 수 없는 별처럼

희미하게 빛난다

 

 

하루종일 침묵한 입을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강철로 된 드롭프스를 넣어준다

 

- <교실에서> 전문

 

 

장면의 전환이 재미있게 이루어진 작품이다. 앞 연의 이미지 중 하나가 다음 연의 진행을 시작하는 단서로 작용한다. 첫 연의 ‘하느님’은 다음연의 ‘사제’로 이어지고 두 번째 연의 강물은 그 다음 연의 ‘물고기’이로 이어진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세 번째 연의 교실은 그 다음의 ‘칠판’으로 이어진다. 이 역시 영화적 편집 기법의 활용으로 보인다.

 

보통 영화에서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갈 때 자연스러운 연결을 짓기 위해서 디졸브(disolve)나 페이드인(fade in) 또는 페이드아웃(fade out)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소설에서처럼 화자의 설명이 없이 장면을 전화해야 하는 영화에서는 이러한 편집 장치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편집 장치 중 영화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기 위해 많이 쓰는 장치가 소도구를 활용한 장면 전환 방식이다. 한 장면에서 하나의 소도구를 집중하게 하여 그 소도구가 등장하는 다른 장면으로 전환해 가는 그런 방식이다. 그런데 위 시는 바로 이러한 전환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이 작품은 일상적 사물들의 무한한 연쇄와 그 속에 위치한 개인들의 무력감과 권태를 표현해 주고 있다.

 

4. 맺으며

 

시는 새로운 언어이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라는 것이 당시의 문화적, 언어적 환경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다. 시적 언어의 새로움 보여주고 있는 두 시인의 작품을 통해 중요한 문화적 경험을 구성하고 있는 영화의 표현 기법이 시적 언어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시점 변화가 자유롭고 빈번한 영화의 카메라 시점이 현대시의 표현에도 영향을 미쳐 흔들리는 시점을 만들어 내고, 이는 또한 보편적인 세계상을 상실한 현대인의 파편적인 경험을 재구성하는 유효한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영화의 중요한 예술적 장치인 몽타주 편집 기법이 현대시에서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차용되고 있다. 이러한 몽타주 기법은 다양한 이미지와 다양한 경험들을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을 확대하고 새로운 감수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무수한 욕망과 그러한 욕망의 연쇄 속에서 무력감과 권태를 느끼는 개인의 무력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