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시의 본질에 관한 우문과 현답 (5)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9. 08:31

 

 

시의 본질에 관한 우문과 현답 (5)

 

이형권 : 문학평론가, 충남대교수 ,2012년 UCLA 방문교수

 

 

5

 

시는 왜 너무 정치적이거나 비정치적인가?

 

한국 현대시는 그동안 너무 정치적이었거나 너무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른바 순수시 계열의 시인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시의근간이라 여겼고, 참여시 계열의 시인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응전을 시의 기본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 두 계열의 시인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타적인 길을 걸어왔다. 일제치하의 카프시나 광복 이후 북한의 시, 광복 이후 남한의 저항시나 민중시 등은 정치적 행위를 고무하고 추동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반면에 일제치하의 순수서정시나 모더니즘시, 생명시, 자연시와 광복 이후 남한의 순수서정시 등은 현실 정치에 대한 초월이나 무관심의 태도를 견지해 왔다. 시의예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시가 정치적 현실에서 독립된 순수한 예술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에 반해 시의 정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시가 정치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회의 변혁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두 극단적인 주장, 너무도 정치적이거나 너무도 비정치적인 시는 시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배타적인 입장으로 인해 한국의 현대시단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왔다. 그 대립의 층위는 남북한뿐만 아니라 남남 사이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갈등을 유발해 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술성과 정치성이 반드시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정치적이라 할 수 있을 터, 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소통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다. 시는 운율적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의 일종이지만, 그것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정치 행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는 현실 정치를그대로 추수하거나 그것에 평면적으로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시의 정치는 가령 정치가들이 현실 권력의 장악을 위해 정파적 이해관계에 속박되어 행동하는 현실의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의 정치는 시가 현실 정치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에 미학적 언어가 포함하고 있는 정치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시의 정치는 현실정치가 지향하는 피상적인 행동의 변화와는 다르게, 정신과 감정과 감각을 포함하는 내적의식의 고양을 통한 근본적인 행동의 변화를 추구한다. 정치가의 연설을 현실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즉각적이고 집단적인 호응을 유도하지만, 그것은 대개 표피적이고 일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시를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과 행동의 변화는 깊은 정서의 공감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보다 근본적이고 지속적이다. 이것이 바로 시의 미학이 높은 정치 의식으로 변환될 수 있는 이유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말처럼 특정한 시대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미학 속에는 이미 정치가 내재해 있다. 그가 주장하는 ‘문학의 정치’는 물론 문학을 현실 정치와 기계적으로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분할(감성은 인식에 가깝다. ‘대상. 인식. 판단. 행동’의 과정에서 미적 인식이 대상에대한 판단과 행동의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을 통해 현실을 고양하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시는 속악한 현실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미적 혁명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긴장 관계를 해소 시킬 수 있다. 따라서 시는 가장 고급한 정치 행위, 가장 정서적인 정치 행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시는 정치를 부정하지 않되 현실 정치와는 ‘다른 정치’를 추구한다. 시의 정치는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점, 언어 가운데서도 가장 밀도 높은 미학적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정치와는 다르다. 시의 정치는 보다 간접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데, 이를 위해 시가 지니고 있는 수사적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시의 미학 혹은 시학은 기본적으로 정치를 포함한다.

 

자유가 시인더러 하는 말 좀 들어보게

시인이 자유더러 하는 말 좀 들어보게

서로 먼저 말하겠다고 싸우는 꼴 좀 바라보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 한번 들어보게

 

자유가 시인더러

시인이 자유더러

멱살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네

우리 같은 촌놈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네

자유가 시인더러

시인이 자유더러

따귀를 올려치면서 탁탁탁 치면서

하는 소리 들어보게나

아아, 저게 상징이구나 은유로구나

상상력이구나

아픔만 남는 시법 詩法이구나

오늘 하루도 평탄치 못하겠구만

일찍 일어나 세수부터 정갈하게 하고

구두끈도 단단히 동여매야하겠구만( 조태일의 「자유가 시인더러」 전문)

 

이 시에서 “시인”과 “자유”는 가장 밀접한 동지적 관계에 놓인다. 그들은 “먼저 말하겠다고 싸우는” 관계이거나 “따귀를 올려치면서” 논쟁을 하는 관계이다. 아주 가깝고도 치열한 관계이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면서 하는 소리는 시정잡배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상징”이고 “은유”이고 “상상력”의 차원에서 논쟁을 하는 것이다. 이를 축약하면 “시법”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이것이 바로 “시인”이 정치 행위로서의 “자유”를 지향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문학)는 결국 미학을 통한 정치를 수행한다는 랑시에르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시의 미학의 핵심은 “상징”이나 “은유”를 통한 “상상력”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일 터, 시인이 “자유”를 추구하는 방식은 그러한 미학적 행위와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의 정치, 혹은 미학의 정치는 “아픔만 낳는 시법”이라는 진술은 흥미롭다. 시인은 이 “아픔” 으로 “오늘 하루도 평탄치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 “아픔”이 생산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이 시가 창작된 7,80년대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아픔” 은 “자유”를 상실한 시대의 “아픔”이고, 이“아픔”으로 인해 시인은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깊은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아픔”의 심도는 정치 구호로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마음을 정갈하게 하기 위해 “세수부터 정갈하게 하고/ 구두끈도 단단히 동여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목적을 향한 정치적 행동을 위해 시적 혁명을 추구하고, 시적 혁명이라는 목적을 위해 정치적 행동을 도모하는 것이다. 다시 랑시에르의 관점에 기대면, 이는 시(미학)의 정치는 현실의 정치와 직접적으로 대응하지는 않지만, 그와 무관하거나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미학적 감각의 새로움을 통한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참여는 미학의 정치를 실현하는 시 창작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한 문학적인 방식의 현실참여 활동은 그 자체로 미학의 정치를 실현할 가능성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시와 정치가 만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