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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견한 산문시의 매력 … 시가 훨씬 자유롭게 다가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26. 09:59

 

새로 발견한 산문시의 매력 … 시가 훨씬 자유롭게 다가와

[중앙일보] 입력 2013.08.26 00:25 / 수정 2013.08.26 00:28

제13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 본심 후보작 지상 중계 ⑨

 

 

최정례는 “시가 없다면 다른 세계가, 꿈이 없는 거다. 이 딱딱하고 건조한 현실만 있으면 얼마나 재미없겠느냐”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인 최정례(58)는 요즘 실험 중이다. 본격적으로 산문시 쓰기에 나섰다. 2013 미당문학상 본심에 오른 작품 중 상당수가 산문시다. 그 조짐은 2011년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에서 이미 엿보였다.

 

 예심위원인 권혁웅 시인은 “시에서 연상이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하면서, 수다 속에 다른 국면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잘못하면 작위적일 수 있는데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다. 스스로 진화하는 듯하다”고 평했다.

 

 최 시인은 “제임스 테이트의 산문시집을 번역하면서 시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게 됐죠. 산문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자유로워졌어요. 다음 시집은 완전히 산문시로 쓰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변화는 말과 말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시작됐다. 계기는 2006년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 다른 나라 작가들에게 자신의 시를 소개하려고 번역하면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2011년 번역 시선집 『 Instances』도 냈다.

 

 

 “번역을 하면서 내 말이 확장됐어요. 뭐가 이렇게 넓어지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 시가 달라지고, 나도 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거든. 다른 말을 쓴다는 건 다른 사람이 되는 거에요.”

 

 하지만 모국어를 다루는 시인의 입장에서 외국어는 불편한 옷이었다. 그의 시 ‘우주로 가버리는 단어들’에서 ‘외국어로 말할 때는 이상한 일이 생긴다. 내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라 먼저 떠오른 단어를 쫓아 말하게 된다. 그러니까 쉽게 튀어나온 단어를 따라 내가 끌려 다니는 꼴이다’라고 읊었듯.

 

 “말은 권력이에요. 거기서는 어린 아이도 심지어 거지도 영어를 잘하잖아요. 나는 말도 못하고 더듬더듬해서 IQ(지능지수)가 50도 안 돼 보이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죠.”

 

 외국어 장벽 앞에 좌절을 경험했던 시인은 ‘시어’라는 또 다른 말 앞에서 쩔쩔매는 독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가 어려운 건 예상하는 대답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에요. 처음 가는 길에, 처음 보는 지도를 보고 독법도 틀렸기 때문에 헤매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죠.”

 

 시인이 늘 예상을 벗어나는 답을 제시하는 이유를 말하며 그는 ‘산문은 직진, 시는 돌아가는 것’이라는 문학평론가 조재룡의 말을 인용했다.

 

 “시의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절대로 해서는 안 돼요. 어떤 프레임에 가두거나 뒤집어서 연결하거나 건너뛰거나, 여러 이야기를 섞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거죠.”

 

 그래서 그의 시에는 뒤섞인 시간 때문에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이 많이 등장한다. 마치 뒤죽박죽 된 꿈을 꾼 것처럼.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지금 생각, 과거 생각, 미래 생각이라고 구분해서 하지 않아요. 머릿속에서는 무리 없이 섞이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시로 말하는 거에요. 초현실 같은 순간, 꿈과 같은 순간이 시적인 순간이에요. 잠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 이 세계를 말하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거죠. 시는 다른 세계로 가는 다리에요.”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정례=1955년 경기 화성 출생. 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햇빛 속에 호랑이』 『레바논 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등. 이수문학상·현대문학상 수상

 

 

◆ 몇 편의 시

 

인터뷰/최정례

 

 

사격선수가 첫 금메달을 땄다 또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한달은 온 나라가 이렇게 지나갈 것이다

사격선수는 인터뷰하면서 자기 아이에게는 절대

사격을 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모기가 내 다리를 물었다

 

종아리에 두방, 정갱이에 한 방, 산책로에서 물린 것인지

싱크대에 섰을 때 물린 것인지 소파에 누웠다가 몹시

가려워졌는데

이미 늦었다

 

생명은 자기 생명을 다하여 자신을 유지하여 한다

삶에 낭비란 없는 것 같다 가려운 인생

가려우니 긁을 수 밖에

 

아버지에게 가봐야 한다

사회복지사의 말이 등급외 판정을 받았기때문에

주간 보호를 맡길 수는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목욕을 하다가도 비누칠한 것을 잊고 욕조에서

잠이 드는데

사회복지사와 인터뷰할 때는

자기 이름이며 생년월일까지 정확히 대답해 버렸다

좀 더 바보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1등급을 받고

복지기관에 종일 맡겨질 수가 있다고 한다

 

금발의 여자애가 사격 선수 앞에 와서

사인을 받으며 금메달을 살짝 어루만졌다

참을 수 없이 가렵다

모기 물린 데 바르는 약은 어디에 둔 것일까

 

어젯밤 내내 꿈을 꾸었는데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꿈속에서 지나친 것과 지금 지나치고 있는 것

두려운 것은 딴 세상과 이 세상 사이에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팔월에 펄펄 - 최정례

 

팔월인데 어쩌자고 흰 눈이 펄펄 내렸던 걸까

어쩌자고 그런 터무니없는 풍경 속에 들었던 걸까

 

창문마다 흰 눈이 펄펄 휘날리도록

너무 오래 생각했나 보다

네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되도록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 이젠

얼굴조차 뭉개지고

눈이며 입술이며 머리카락이며

먼지 속으로 흩어지고

 

비행기는 그 폭설을 뜷고

어떻게 떠오를 수 있었을까

소용도 없는 내 조바심

가 닿지도 않을 근심을 태우고

 

오늘은 자동차에 물건들을

밀어넣고 차문을 닫았는데 갑자기

열쇠가 없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치 소리 같은 게

철판을 자르는 새파란 불꽃 같은 게

나를 치고 지나갔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길을 되짚어 다니면서 물었다

 

무엇이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달리는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면서

바람도 없는데 서 있던 나무는

갑자기 이파리를 부풀어 올리고

 

그때 어쩌자고 눈발은 유리창을 때리며 나부꼈나

세상에 열쇠라는 것은 없다

가방도 지갑도 머릿속도 하얗게 칠해지면서

 

여름의 한중천에서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다

 

-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늙은 여자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바가지

몇 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