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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수로부인에게 보내는 연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3. 31. 19:37

 

수로부인에게 보내는 연가

 

오창제

 

거친 땅바닥을 순결의 지뢰밭으로 여기고

헛바퀴 도는 자건거 페달을 뒤뚱거리면서 밟는다

작은 글씨들이 밤비에 불어서

등을 억누르는 좁은 길

헉헉거리며 휘어진 언덕길을 오를 때

가로등 불빛에 숨어있던 여인의 얼굴이

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다

나는 앞으로 가는데

바퀴는 자꾸 뒤로 달린다

다가오는 여인들이 모두 점점 멀어지고

늙은 노인만이 정면으로 내 앞으로 달려오면서

노인은 나와 하나가 된다

헛바퀴 도는 바퀴살 사이로 얼굴들이 뭉개지고

뚝뚝 부러지는 얼굴뼈들이 달빛에 더욱 선명해진다

함께 주저앉은 체인

바닥에 깔린 나의 부서진 뼈들이

꽃씨가 되어 땅바닥에 쿵 쿵 박힌다

 

스토리문학 2013년 봄호

 

 

수로부인은 추측컨대, 절세미인이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편과 함께 동해안을 북상하여 강릉으로 갈 때에 여러 번 해신 海神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수로부인의 미모 때문이라는 것, 오죽하면 한 늙은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을 기어올라 꽃을 바치고 헌화가를 불렀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은 기어코 가지고야 말겠다는 현대판 수로부인들 앞에 한없이 왜소해지고 그만큼 용감(?)해지는 오늘날의 남성들은 돈으로, 명예로 아니면 몸으로 수로부인을 향해 돌진한다. 그 옛날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은 이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연심을 품거나 아니면 다리 힘을 키우려고 자전거 페달을 돌린다. 그러나 흘러가 버린 젊음을 어찌하랴. 세월을 향해 코뿔소처럼 내달리던 몸은 쇠잔해져서 골다공증의 삐걱거리는 쇳소리를 낼 뿐, 마음에 잔뜩 품은 연정을 따라갈 길이 없다. 부도, 명예도 축적하지 못한 이 당의 아버지, 남편들이여! 나이가 들면 남자에게는 여성 홀몬이 활성화된다는데 애끓는 숫컷의 본능을 어떻게 순화할까? 「수로부인에게 보내는 연가」는 남성성을 상실해가는, 부권사회의 향수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50년대 생 남성들의 헐떡거리는 읍소이거나 자탄自歎으로 읽힌다.

 

덧붙이는 글

 

몇 년 전 진부령 고개를 넘어가는데 뒤우뚱 휘청거리며 자전거를 몰고 가는 초로의 사내를 보았다. 바짝 마른 몸은 수수깡 같아서 페달을 밟을 때 마다 뼈 밟히는 소리가 들릴 듯 하였다. 고개 마루에 당도하자 긴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짙은 선그라스를 낀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내의 아내라고 하였다. 몸이 부실해서 틈 나는대로 자전거로 몸을 단련한다고 하는데 왠지 그 사내가 서러워 보였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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