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나무와 생명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6. 10. 21:19

 

나무와 생명

 

김형영

 

저는 산보다는 강을 좋아해서 주말이면 저수지로 밤낚시를 즐겨 다녔습니다. 그 저수지는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무엇보다 환경이 깨끗하고 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새소리, 물소리, 개구리 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우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즐기던 밤낚시를 접고 산행을 시작한데는 결정적인 외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폐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폐에 구멍이 생겨 바람이 빠지는 증상(공기가슴증)입니다. 그래서 응급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터진 구멍이 너무 많아 흉강경으로 수술 할 수가 없어 절개했습니다.

퇴원하고 나서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한다기에, 어떻게 요양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 마시는 심호흡을 오래 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심심풀이로 다니던 산책을 매일 아침마다 한두 시간씩 하게 된 것입니다.

산책을 하다보면 별 일이 다 있지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제 일생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진달래꽃이 져가는 늦은 봄이었습니다. 잠깐 바위위에 앉아 쉬었다 일어나서 무심코 꽃 속을 들여다보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꽃이 제게 오물오물 말을 거는 거예요. 뭐라고 말을 거는데, 물론 저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꽃이 아닌데, 제가 하느님이 아닌데 어떻게 꽃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꽃이 말을 걸었다는 것도 제 느낌이었는지 모르지만요, 그럴 때는 그냥 바보가 되는 편이 낫지요. 그랬어요. 저는 그 순간 바보였어요.

나는 그 오물거리는 꽃을 만난 순간을 마음 속 액자에 새겨 걸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영적 교감이다.”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책에서 배운 그 어떤 지혜보다 더 깊고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물을 보는 눈, 시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하나 열린 기분이었습니다.

“돌멩이도 하느님을 드러낸다.”는 말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떨어지는 꽃잎이 하느님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만물 안에 하느님의 계시가 들어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겨났다는 것을 그냥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얻은 시가 <생명의 노래>입니다.

저는 이 시를 쓰면서 관상 觀想, 생각을 본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가톨릭 수도회가운데는 ‘ 천상의 은총이 솟아나는 샘’이라는 관상수도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지향하는 기도의 핵심은 ‘존재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 또는 신적 존재와 합일하는 것, 경험적 직관으로 인식하는 것’ 혹은 ‘사랑이 담긴 눈으로 보는 것, 동시적으로 마주 보는 것, 인간의 감각적 인지를 떠나 존재 자체로 알아보는 것’ 으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 상태를 이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첫 아기를 낳은 엄마가 방긋 웃는 아기와 눈을 맞춘 그 순간으로 보았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영혼과 영혼의 만남, 생명과 생명의 만남이라고 저는 믿고 싶었습니다. 엄마는 천진무구한 아기의 생각을, 아기는 사랑 그 자체인 엄마의 생각을 본 것입니다. 벌거벗은 영혼이 벌거벗은 하느님을 만난 것이지요.

그 때 저는 자연과 나, 우리는 모두 신령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의 신앙으로 정의하고 싶었습니다. 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풀을 다시 보게 되고, 하늘을 다시 보게 되고, 마침내 자연과의 교감은 어떻게 해야 이루어지는가를 눈 뜨게 된 것입니다. 시골에서 살던 어렸을 때는 그런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이 보편적 진리를 모르고, 혹은 잊고 지내다가 다시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저의 사랑도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자연과의 영적 교감이 가능하다는 걸 말입니다.

20세기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인 고르바쵸프는 이런 말을 했지요.“자연은 나의 신입니다. 숲은 나의 대성당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연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만듭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젊은 날에는 시를 위한 시, 문학사에 남을 만한 시를 쓰겠다는 욕심으로 시를 썼고, 어떻게 시를 쓰면 유명해질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시를 쓴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저는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시를 씁니다. 저와 자연이 서로 즐거울 수 있는 시를 쓰려고 합니다.

영성신학자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은 하느님이 나를 바라보는 눈과 같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런 멋진 말이 아니더라도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보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저는 가까운 분들을 만나면 농담 삼아 이런 말을 던집니다. “죽을 때 후회하지 맙시다. 죽기 전에 죽읍시다. 그래야 죽을 때 죽지 않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는 산에서 얻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건강을 얻었고, 시를 얻었고, 왜 나무를 사랑해야 하는 지도 알게 되었고, 모든 만물에는 하느님의 영, 곧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체험으로 알았으니까요. 이런 엄청난을 산행을 통해 나무와 꽃과 풀과 향기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바보가 어떻게 나무는 성부이고, 꽃(혹은 잎)은 성자이며, 향기는 성령이라는 생각, 저 혼자 생각인지는 몰라도 어떻게나무 안에서 삼위일체를 찾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제 폐에 구 멍은 낸, 지금도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으로부터 나무는 우리를 살리고 있으니 어찌 나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인간)는 자연의 한 작은 생명입니다.

 

『 문학의 집 서울』 제 140호 (2013년 6월호): 수요문학광장 2013. 5.22

 

 

 

 

 

시적 주체와 대상의 합일을 꿈꾸는 시인

권영민(문학평론가, 단국대 석좌교수)

 

시인 김형영의 시는 시적 대상과 시인이 하나 되기를 꿈꾼다. 이 특이한 시법은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실현해온 현대시의 일반적인 경향과 일정한 차이를 드러낸다. 시인이 시적 대상에 동화되는 것도 아니고 시적 대상이 시인의 정서에 녹아드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시인과 시적 대상이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정서를 완전히 일치시킴으로써 김형영의 시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객관과 주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다.

김형영의 시적 활동은 【칠십년대 동인】동인에서부터 문제성을 드러낸다. 1966년 『문학춘추』에 시 「소곡」이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은 『침묵의 무늬』(1973),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친다』(1979), 『다른 하늘이 열릴 때』(1987), 『기다림 끝나는 날에도』(1992), 『홀로 울게 하소서』(2000), 『낮은 수평선』 (2004), 『나무 안에서』 (2009)등의 시집을 상재했다. 근작 시집 『나무 안에서』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시적 대상으로서의 나무, 꽃, 별, 바람 등이 모두 서정적 주체와 합일화하면서 특이한 시적 변용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는 ‘나무’ 그 자체가 아니고 ‘꽃’은 ‘꽃’이라는 대상으로 머물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간격 없애기는 자기를 극복하고 세계를 초월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김형영은 자신의 시 쓰기를 하나의‘병 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기만의 시적 주제에 대한 강한 집착과 끈질긴 추구의 과정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자기자신을 통해 대상을 보지만, 그 대상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낸다. 이 시적 작업은 자아와 세계의 통합 이전에 그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결국 시적 이데아의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진다. 객관적 대상을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그 대상의 세계를 넘어서는 자리 - 시인 김형영이 지켜온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시의 자리가 아닐까?

나무들 / 김형영

 

눈 내리는 새해 새 아침

나무들이 보고 싶어 산길 오르는데

작은 키 노린재나무 산초나무

싸리나무는 눈을 털며 반긴다

복자기 개옻나무 졸참나무는 덩달아

잎도 없는 가지를 흔들고.

누가 베었는지 쓰러진 나무 곁에서

제 집 찾아 맴돌던 새

집도 노래도 버리고 떠나자

소나무 사시나무

잣나무는 솟아올라서

뭐가 그리 서운한지

괜스레 허공을 한번 흔들어본다.

 

바위틈에 비집고 선 나무

가시밭에 웅크린 나무

기름진 땅에 우뚝 솟은 나무

길가에 버티고 선 나무는

제 뜻대로 자란 건 아니지만

땅속에 뿌리박고 속삭일 때면

그 속삭이는 소리에 취해

나무들을 하나씩 껴안아본다.

쓰다듬고 다독여준다.

올해도 안녕하자고.

너도, 너도, 너도, 모두 건강하자고.

  -시집 『나무 안에서』(문학과지성사, 2009)

나무 안에서 / 김형영

 

산에 오르다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가자.

하늘에 매단 구름

바람 불어 흔들리거든

나무에 안겨 쉬었다 가자.

 

벚나무를 안으면

마음속은 어느새 벚꽃동산,

참나무를 안으면

몸속엔 주렁주렁 도토리가 열리고,

소나무를 안으면

관솔들이 우우우 일어나

제 몸 태워 캄캄한 길 밝히니

 

정녕 나무는 내가 안은 게 아니라

나무가 나를 제 몸같이 안아주나니,

산에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나무와 함께

나무 안에서

나무와 하나 되어 쉬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