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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현실로서의 환경 오염과 생태 파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6. 20. 23:48

 

시적 현실로서의 환경 오염과 생태 파괴

 

이건청( 시인. 한양대 교수)

 

 

1.

 

시는 그 장르의 발생서부터 생명구현의 절실함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시가 제단에 바쳐지는 간절한 기원을 담고 있었다든지, 풍요로운 수확을 위한 노동요였다든지, 남녀간의 사랑을 예찬하는 연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구현의 절실함을 위한 언술행위였다는 점에서는 동질성을 지닌다 할 것이다. 시는 생명을 고양하고 생명이 처한 절실함을 노래해 하나의 언어구조를 이루는 일이었던 것이다. 시는 자아와 현실과의 관계를 다루되 그 가장 절실한 부분을 노래해 온 것이다.

시가 현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시인은 현실 속의 한 개체로 존재하면서 현실의 의미를 직시하려 하고 인식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 범주가 엄청나게 크게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도리 없이 관념화되고 추상화되어 있기 십상이다. 관념이나 추상이 되어 있는 현실은 엄밀히 말해서 그저 관념이나 추상일 뿐 자아와의 관계는 아무런 연관성도 지니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아와의 연결고리를 마련하지 못한 현실은 그것이 아무리 크고 중요한 진폭을 지니는 것이라 할지라도 구체성을 지닌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어떤 현실을 시적 현실로 수용하느냐, 그리고 자아와 현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문제가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시적 현실이란 무엇인가? 시적 현실이란 시인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로 발견해 낸 현실을 말한다. 시인이(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로 발견해낸 현실)이라는 점에서 그냥 현실과 변별된다. 그냥 현실은 무질서하게 발생되고 있는 사건 사실들의 집합일 뿐이어서 시인과의 관계설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인 것이다. 시인은 그가 처한 현실 속에서 가장 절실한 부분을 시적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최근 생태파괴와 환경의 오염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생태 환경의 파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이제는 생명의 존립기반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증거들이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하천의 오염이 극에 달해 물고기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연근해 곳곳에 출몰하는 적조현상, 기형 물고기의 출현이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기형아의 출산이 늘어나고 있으며 각종 공해물질이 질병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공단 인근 수목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도심 주택가마저도 스모그에 갇히는 일이 많아진 것은 다 아는 일이다. 환경 파괴를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 노력이 없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날짐승의 20% 정도가 멸종되리라는 보고도 있다.

이런 생태 환경 파괴의 현상들은 인간의 생명 역시 심각한 위난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사태의 심각성을 반증해 준다 하겠다. 이처럼 심각한 현실을 수용한 <생태 환경시>가 우리 시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시에 보이는 소위 < 생태 환경시>의 몇 편을 들어 그 전개 양상의 면면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시가 인간정신의 가장 승화된 표현이며 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정서와 상상력의 구조물이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시가 왜 생명의 표현이며 삶의 노래인가 하는 이유도 자명해진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그 존재 양태의 크고 작음이나 존재 위상의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으며, 위대한 삶의 체계에 의하여 생멸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생명이 파멸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생명 파괴, 생명 경시 풍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시는 생명의 외경을 노래하거나 상찬하는 일은 물론 생명 파괴를 가속화 시키는 생태환경을, 개선하고 복원시키려는 적극적 노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생태환경의 파괴는 인간 생명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가장 심각한 현실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한국시가 노래해 보여주고 있는 생태 환경시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그 전개 양상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생태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직접 노래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부각시키고 있는 시들이다.

 

죽은 자의 욕망까지 흔들어 깨워서

그 위에 내리는

시도 때도 없는 산성비.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있다.

일회용 비닐 우산이 되어버린

절망을 쓰고 있다.

 

비극이 되기에는

너무나 흔해빠진 우리 시대의 비

대량생산의 장미를 쓰레기통에 가득 채우는

전천후 산성비 오늘도 내린다

 

- 「전천후 산성비」 이형기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흙을 적시고 산천초목의 뿌리를 적셔 생명의 원천을 왕성하게 구현해 준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비가 땅 속에 스며들어 청량한 샘물로 목마름을 달래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고맙고 반가운 것이 비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비는 산성화되고 이런 산성비를 맞은 생명체들이 심각한 재난을 겪게 되었다. 사람의 건강을 해치고 초목을 메말라 죽게 만드는 것이 산성비인 것이다. 이형기는 이런 산성비가 <전천후>로 내리고 있고 그것이 < 비극이 되기에는/ 너무나 흔해 빠진 우리 시대의 비> 인 것을 노래해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이 <위험스런 비>아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이런 위험이 개선될 여지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형기가 이런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전천후로 내리는 산성비>에서 발견해 노래하고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자연이 베푸는 생명의 근원 현상으로서의 비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성비>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지금 인류가 처한 위난을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빛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들게 고개에 걸쳐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물고기를 건져 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주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고기를 싸고 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

골목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없다

바람 속에서도 화약냄새가 난다

종소리에도 가스냄새가 난다

-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경림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 파괴가 도시나 공장지대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환경 오염으로 인한 생태 파괴가 농촌에 이르기까지 확산돼 가고 있다. 그러므로 신경림의 시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는 매우 각성적인 인식을 심어준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는 진술은 그래서 우리를 비감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의 심중에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농촌이고 농촌을 농촌답게 해주는 대상들이 초목들이다. 그러나 지금 봄이 되어도 붉지 않고 싱싱하지도 않은 꽃과 풀들이 피어난다는 것이다.

<등굽은 물고기>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와 같은 이미저리들이 오염된 농촌을 구체화하고 있다. 하늘이 오염되어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골목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없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 「공장지대」 최승호

 

최승호는 환경 오염의 결과가 신생아에게까지 나타나고 있는 전율적 현실을 구체화하고 있다. <무뇌아>란 무엇인가? 환경 오염과 생태 파괴를 통해 이제는 회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될 인류의 미래가 아닐까? <뇌>를 지니지 못한 채 태어나는 인간의 실상을 통해 인간이 실종되고 인간성도 상실된 삭막한 물질과 메커니즘만의 세계를 우리는 직시할 수 밖에 없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이 전율적 현실은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를 무자비하게 파괴한 우리 모두가 당면하게 될 인과응보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시들은 환경 오염으로 인한 참담한 결과와 생태 파괴의 실상을 직접 제재로 선택해 다룸으로써 이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다음으로 생태 파괴나 환경 오염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들로 인해 당면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는 시들이 있다. 이런 시들은 생태 파괴나 환경 오염으로 인해 우발된 현실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 내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한 모퉁이에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제한구역

홍제동 뒷산에는

꿩들이 산다

 

가을날 아침이면

장끼가 우짖고

까투리는 저마다

꿩병아리를 데리러

언덕길

쓰레기터에 내려와

콩나무대가리나 멸치꽁다리를

주워먹는다

 

- 「서울 꿩」 김광규

 

위의 시에서 김광규는 도시개발과 빌딩숲으로 인해 절해고도처럼 남겨진 개발제한구역에 사는 꿩들의 비극을 노래한다. 원래는 꿩들의 것이었음이 분명한 홍제동 일대가 개발이라는 미명에 밀려 혼잡한 도심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런 류의 환경 파괴는 지금 이 지구상 도처에서 이뤄지고 있고 이런 환경 파괴로 인해 탄산가스의 증가, 매연, 오존층의 파괴 등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 김광규가 노래해 보여주듯 <쓰레기터에 내려와 / 콩나물대가리나 명치꽁다리를 /주워먹는> 꿩의 비극은 결코 꿩들만의 비극일 수 없다. 그것이 환치된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위의 시가 함축해 보여주는 메시지는 각성적인 것이 된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많은 물떼새들

왕눈물떼새, 검은가슴물떼새, 꼬리물떼세, 댕기물떼새......

수염 돋은 개개비란 새도 있었네

물떼새 알을 쥐고 돌아오던 어린 날의 낙동강

내 오늘 한 마리 물고기처럼 回遊해 왔네

아무 것도 없네 그 날의 기억을 소생시켜주는 것이라고는

나루터 사라진 강변에는 커다란 굴뚝이 도열, 천천히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네, 천천히

대지를 버린 내 영혼이 천천히 황폐해 가듯

 

-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 이승하

 

이승하가 노래해 보여주는 것은 커다란 굴뚝이 도열해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공장지대의 모습이다. 옛날엔 나루터였던 이 공장지대에서 이 시의 작자는 참담한 감회에 사로잡혀 있다. 이 시의 작자가 느끼는 참담한 감회는 지금 이 공장지대가 들어섬으로 해서 사라져 버린 것들에 관한 회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 버려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이 하나 같이 생명적이고 순수한 것이며 원초적인 것들이라는 점이 우리를 비감하게 만든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고 있는 환경 오염과 생태 파괴는 아주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힘으로 순수 원초적인 세계를 괴멸시키고 회복 불능의 상태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옛날엔 나루터였던 곳에 도열해 천천히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공장지대와, 이런 공장지대가 들어서면서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 왕눈물떼새, 검은가슴물떼새, 꼬리물떼세, 댕기물떼새>와 같은 원초적인 대상들이 그리움의 근원이 되어 이 시의 활력을 이루고 있다.

 

다음으로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함으써 생명보존의 필요성을 노래해 보여주고 있는 시들이 있다.

 

한 마리의 새가

공중을 높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 속에 부대끼며 뿌려야 할

수많은 열량들이 가슴속에

늘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보라,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은

노래로써 그들의 평화를 구가하지만

그 조그만 몸의 내부의 장기들은

모터처럼 계속 움직이면서

순간의 비상 이륙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오 하얀 달걀처럼 따스한 네 몸이

품어야 하는

깃털 속의 슬픈 두근거림이여.

 

- 「새」 이수익

 

공중을 높이 날고 있는 한 마리의 작은 새를 바라보는 것은 그냥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처럼 관습적인 현상도, 생명에 대한 애정의 마음으로 다가 가 미시적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거기서 생명의 준열함과 진지함이 구체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하나의 작은 생명을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열량>이고 이 <열량>을 만들어내는 것은 <모터처럼 계속해 움직이는 몸 속의 작은 臟器들>이다. 미세한 깃털 속에서 쉼없이 두근거리는 가슴 속엔 그런 장기들의 쉬임없는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새의 비상을 기계적 메커니즘만으로 규명하려는 사람에게 위의 시는 상식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새의 비상을 신비로운 생명현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눈이 밝아오는 발견의 세계, 신비로움과 외경의 세계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환합니다.

감나무에 감이,

바알간 불꽃이,

수도 없이 불을 켜

천지가 환합니다.

이 햇빛 저 햇빛

다 합해도

저렇게 환하겠습니까.

 

- 「환합니다」 정현종

 

감나무에 붉게 열린 감을 존귀한 생명현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감나무가 가을이 되어 다닥다닥 붉은 감을 매달게 되는 것은 감나무 나름의 진지함과 열정이 원인이 된 것이다. 감나무에 열린 열매를 생명의 구체적 구현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감은 < 바알간 불꽃>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 이 got빛, 저 햇빛 다 합해도> 도달할 수 없는 환한 빛이 되어 있는 것이다. 생명을 존귀하게 바라보면서 그 가치를 밝음의 궁극으로 고양시켜가려는 노력이 깔려 있는 시인 것이다.

 

3.

 

지금, 우리는 환경 파괴와 비인간화 현상이 생명의 존립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는 생명을 잠식해오고 있는 이 심각한 위난의 현실에, 구체적 인식 없이 대응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환경 오염과 생태파괴라는 문제가 더 이상 회피하거나 간과해 버릴 수 없는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위난의 현실이 어떤 이념적 현실보다도 우선하는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들어 우리 시에 등장하기 시작한 소위 <생태 환경시>는 이런 현실 인식과 시대적 소명에서 촉발된 것이라 할 것이다. 환경 오염과 생태 파괴가 곧바로 지상의 섭리와 질서를 부정함으로써 생명 자체가 부정되는 현실은 시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시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지금, 한국시에 등장하기 시작한 <생태 환경시>들은 오염되고 파괴되어 가는 환경 속에서 생명을 지켜가려는 노력들을 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생명 옹호라는 큰 지향점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이상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환경 오염과 생태 파괴의 문제는 오늘의 한국 시인들이 당면한 중요한 시적 현실의 하나인 것이다.

 

* 이 글은 『현대시학』 1992년 8월호 기획특집으로 게제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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