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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향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6. 22. 00:02

 

시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향하여

장석주(시인)

 

왜 생태학적 상상력인가? 이 매우 도전적인 물음을 우리는 더 이상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결코 자연환경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은 자연에 종속된 자연의 일부이며, 다라서 자연 생태학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 자연생태 환경과 무관한 것처럼 살아왔고, 자연생태 환경의 파괴와 희생 위에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문명을 건설해 왔다. 인구의 과밀도화, 과도한 경제성장의 추구, 걷잡을 수 없는 소비문화의 번성 등에 의해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환경과 생태계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대중매체들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골 주제의 하나이다. 아무런 정화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입되는 생활 하수와 공장 폐수로 인해 우리의 식수원인 강물이 오염되고, 여러 공산품에 사용되는 프레온가스 등에 의해 태양의 자외선을 차단해 주는 지구의 오존기층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 그리고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적으로 지구상의 자연자원들이 남획되고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토양과 물, 그리고 공기의 오염은 곧바로 그것에 기대고 사는 지구 상의 숱한 생물들과 인간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고, 생태학적 균형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다. 강물에서 물고기가 살 수 없다면, 결국 그 물을 식수와 생활용수로 쓸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언제까지 안전할 것인가? 생태계의 심각한 파괴로 인한 여러 생물들에 닥치고 있는 멸종의 위기는 인간과 무관한 것인가? 한 시인의 불길한 예언적 어조의 외침,< 미친 듯이 달리는 파산이다>(정현종 문명의 死神 )라는 구절처럼 우리는 인류적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는 도시, 도시화의 시대가 노정하고 있는 새로운 생태환경 속에서의 불안과 위기, 그리고 차츰 더 구체적이고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주체의 위기적 징후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의 문제이다. 그것은 아마도 90년대 문학의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징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90년대 문학이 떠안고 있는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이다.

과연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환경은? 그리고 환경의 파괴와 그에 필연적으로 부수되는 주체의 위기는? 과학의 진보는 우리에게 어떤 희망적인 미래 전망을 제시할 것인가? 이미 우리는 초거대도시의 출현을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현실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돌입해 있으며, 자연의 종말 이후 인간이 창조해 낸 도시환경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생활 양식은 바로 우리의 삶과 현실에 대한 인식의 단초가 된 지 오래이다.

 

한 환경론 도서는 그 책의 말미에 붙인 용어해설에서 <생태지향주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것은 생태학적 상상력의 개념을 도출해내는데 유용한 지식과 이해의 틀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인간을 지구 생태계의 일부로, 생태적 체계적 법칙에 종속된 존재로 보는 사고 양식이다(O'Riordan의 정의). 이 이데올로기는 생태적인 윤리를 내세우는 유사한 주장들과 함께 인구와 경제성장에 절대적인 제한을 가함으로써 인간의 자유행동을 억제하고자 한다. 또한 자연의 수용력까지도 감안한 생물윤리에 바탕을 두고 자연에 대한 강한 경외감을 나타낸다. 생태지향주의자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기술과 기술관료적 엘리트들을 믿지 않으며,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중앙집권화와 유물론도 경멸한다. 정치적으로 우익 성향을 보이는 생태지향주의자들은 <한계>를 강조해서 우리가 공유하는 <자연자원>에 대한 접근과 <자원소비>, 그리고 인구성장에 강제적인 제한을 가하고자 주장한다. 한편 정치적으로 좌익 성향을 보이는 생태지향주의자들은 <행동을 작게, 생각은 지구의 차원에서>(act locally think globally)라는 표어와 함께, 환경 피해가 없는 가벼운 기술과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민주적 지방자치단체인 소규모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주장한다.( 『현대환경론』 데이비드 페퍼/이명우 오구균 김태경 최승 옮김, 1989년, 한길사 간행)

 

환경의 위기는 주체의 위기이고, 환경의 죽음은 곧 주체의 죽음이다. 그 주체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전망은 없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현단계에서 요구되는 생태학적 상상력이란 인간의 생존의 근거를 위협하는 환경의 파괴, 환경의 훼손에 대한 주체의 대응으로서의 생태지향주의적 상상력이어야 한다. 그 상상력은 강력하게 문제 제기적이어야 하고, 생태계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형태의 문명과 생활양식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생태적 질서와 원리에 바탕을 둔 윤리와 생활양식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개체의 과도한 소비문화적 욕구, 혹은 욕망의 포기와 페기 위에서 대안적 삶의 양식 모색을 위한 단호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태 환경 시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 (1991년, 다산글방 간행)나, 환경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고형렬의 『서울은 안녕한가』(1991년, 삼진기획 간행), 그리고 정현종과 최승호의 일련의 시편들은 생태적 상상력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 부응하는 작업의 일단으로 평가된다. 그 시집, 혹은 시들은 한 시대의 가장 민감한 상상력이 포착한 환경과 주체의 위기에 대한 전언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보라. 시인은 공기, 물, 식품 속에, 그리고 공장, 논밭, 거리와 같은 생태 공간 속에, 더 나아가 국가와 진보라는 제도와 이데올로기 속에 속속들이 스며 있는 <편재하는 死神>(정현종)을 적시해낸다. 우리의 삶은 그 <편재하는 사신>의 규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전언을 담은 어조는 무겁고 음산하며, 또 동시에 날카롭다. 압도적인 <죽음의 신>의 지배 하에 있는 환경, 생태계에 대해 시인의 생태지향주의적 상상력들은 더욱 활짝 열리고, 증폭되어 세계를 향해 솟구쳐 나올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이야말로 우리 문학 속에 태동하기 시작한 환경문학, 혹은 생태학적 상상력의 살아 있는 증거들이다.

 

인간과 지구는 결국 파멸하고 말 것인가. 지구 위에 모든 사람들이 선진공업사회의 국민들과 같은 <에너지 소모>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부존자원을 가진 <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 철학자는 인간과 그의 역사에 대하여 <인간이란 욕망의 덩어리며, 인간의 역사란 그의 욕망과 충족의 변화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문제의 핵심이다. 오늘날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는 환경 파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수천, 수만 종의 동식물들이 더불어 누리고 살아가야 할 하나의 유기적 체계인 자연환경에 대하여 마치 인간만이 독점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오만하고 탐욕스런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다 풍요한 소비지향적 삶에 대한 욕구 때문에 자연환경을 무분별하게 남획하여 멸종 지경에 이르게 하고 있다. 경제성장 우선주의와 과학기술 만능주의는 더 나은 소비지향적 삶을 향한 개체의 욕구를 조직화하고 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연환경을 인간의 무한욕구의 실현대상으로 가공하고 개발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논리를 토대로 하는 후기산업사회의 인간문명이 계속되고, 경제성장 우선주의와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지속적으로 추구될 때 자연환경의 파괴와 궤멸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자연생태계의 궤멸 위기는 그것을 삶의 토대로 하는 인간의 위기이다. 그렇다면 그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들은 자연생태계를 살리는 대안적 삶의 양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갈등과 이익을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이 그 대안인가.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약탈과 착취, 혹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부터, 환경을 <생물학적 생존권을 가진 어떤 인격체>로 간주하는 <인격적 관계>로의 바꾸는 인식의 전환이 그 대안인가, 두 사회학자가 제안하는 대안들은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지금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생태의 위기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위기이다.

 

이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의 실상들과 심각한 위기국면을 표현하여 그것을 <고발>하고, 인간들의 의식에 황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 뿐인가. 그것은 문학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럼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후기산업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주체의 위기와 이에 대한 문학의 대응이라는 더 넓은 주제 속에 수렴된다. 최근에 일부 평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문학적 징후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도시시, 혹은 도시문학이라는 용어는 대체로 <도시적 실존과 그것에 대한 인식의 문학>이라는 정도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용어는 지나치게 그 개념의 폭을 축소하는 단선적 발상과 사고의 산물이고, 그리고 자의적 용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후기산업사회의 생활의 터전이요, 생태공간으로서의 도시를 환경의 종속개념으로 보고, <도시적 실존과 그것에 대한 인식의 문학>도 도시시, 혹은 도시문학과 같은 축소적이고 자의적인 용어보다는 개연성이 보다 큰 생태학적 상상력을 그 바탕으로 하는 <환경문학>, 혹은 <생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범위를 넓힐 것을 제안한다.

 

* 『현대시학』 1992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