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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꽃다발을 든 사내 /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0. 24. 21:43

꽃다발을 든 사내 / 나호열

 

 

 

시든 꽃을 든 사내가

네거리 고장난 신호등 앞에 서 있다

꽃이 저렇게 말라가며 검게 변하는 것은

햇살이 너무 강렬하거나

그가 너무 오래 걸어왔기 때문이다

저 보라색 꽃다발은 지금

사내의 팔에 담겨 있지만

그는 들판을 헤매며 자신의 치장을 위해

꽃을 꺾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달려가야 할

달려가서 얼싸안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시든 꽃을 꺾어

네거리 신호등 앞에 선다

그의 퀭하고 깊숙한 눈은

영혼의 가파른 계단 밑으로 열려 있다

그의 눈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신호등

나는 본다 그가 걸어왔던

다시 걸어가야 할 방은

그을음으로 가득한 등잔 속이다

눈물을 태우면 천사의 옷자락이 타들어 가는

향기가 새어나온다

나는 본다 그가 숯 검덩이가 되어가면서

등잔 심지를 키우는 것은

그림자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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