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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향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6. 30. 18:22

 

21세기를 향하여

 

한 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밝았다. 곳곳에서 20세기를 뒤돌아 살피는 작업으로 수선스럽다. 이름하여 과거 반성과 전망인데 1년, 10년, 50년, 100년 단위로 한 시기를 끊어 지난 시대를 되살피고 앞날을 가늠해 보는 일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우리를 가둘 만큼 이제는 시간 관리의 통과의례로 자리잡은 듯하다.

 

우리는 바로 눈앞에 다가온 새로은 세기가 20세기와는 어느 정도 다른 질서에 의해 움직일 지 아직 모른다. ‘인터넷 혁명’, ‘세계화’, ‘전지구화’ 등의 깃발이 암시하는 엄청난 변화 가능성은 세계와 인간 삶의 지속 경향성에 내재된 인력과 지금으로서는 예상할 수 없는 일로 생각과는 달리 그 실현과정에서 크게 제약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급속한 변화 한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다는 현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문학의 경우는 어떨까? 디지털 문화의 급속한 확산을 따라 문학의 생산, 유통, 소비과정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은 분명하다. 그 변화가 고급문화를 대표하는 문학의 위상을 낮추게 될 것이라 내다볼 수 있다. 아마도 소설의 서사는 영화나 만화 등의 서사에 자리를 내주고 주변부로 밀려날 것이고 시는 이미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광고 문구와 현란한 영상 이미지로 대체될 것이다. 문학의 위기다.

 

문학사가에게 앞날을 전망하는 일처럼 난처한 일은 없다. 한 나라의 문학이란 수많은 작가와 독자 그리고 지난 문학사 전체와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상황 등이 복합 작용하는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100년의 한국 현대 문학사 안팎을 살피는 긴 탐구여행을 마치는 이 지점에서 20세기 한국 문학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21세기 한국문학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21세기 한국 문학의 앞날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20세기 한국문학은 근대 문학이다. 그러나 근대가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한 답을 제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서구적 근대를 보편적인 것 또는 일종의 모델로 상정해야 비로소 가능한 과제다. 서구의 근대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한 모델로 상정할 때 국민 국가 건설과 자본제 생산 양식의 성취로 정리되는 두 축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한국 근대사의 경우 이와 함께 반제 투쟁과 반봉건 투쟁의 특수성 문제가 겹친다. 이 특수성 측면은 보편성 측면과 때로는 일치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모순적인 관계에 놓이기도 해 양자 사이에는 매우 복잡한 의미망이 형성된다. 무리해서 그 관계를 단순화하면 창조와 저항의 모순적 의미 관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를 무제 삼는 경우 한국의 현대문학사는 이 자기 모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한 상상적 체계가 한국 근대문학이다.

 

이 나라 근대 문학이 20세기 전체 속에서 전개하며 성숙했다고는 하나, 잘 따져 보면 ‘나라 찾기’ 시기와 ‘나라 만들기’, 두 시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나라 찾기’ 시기의 중심점을 ‘자유’ 문제로 요약한다면, 자유의 과제와 함께 ‘평등’의 과제가 동시 부여된 후자는 훨씬 복잡하다. 님이 침묵하던 시기에 가장 소중한 과제는 자유였다. 그러기에 그것은 ‘숨은 신’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나라 만들기’ 시기에 접어들면 훨씬 복잡해진다. 시민 단독 독재형 국가 모델이냐, 무산 계급 단독 독재형 국가 모델이냐, 연합 독재형 국가 모델이냐의 세 가지 나라 만들기 유형이 지닌 복잡성이 ‘자유’의 과제를 안고 역사 앞에서 선택을 강요해 왔다. 그 같은 상황에서 솟아오른 것이 평등의 과제였다. 민족문학, 분단문학, 민중문학, 혁명문학 등 그 이름은 어떠하든 이후 모든 문학은 이 자유와 평등의 동시 問題界를 벗어날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과제와 함께 전개되어 온 20세기 한국문학은 “사람은 벌레가 아니다.”라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시기 한국 문학은 대체로 인간의 선함, 위엄, 고귀함을 휴머니즘의 깃발을 내걸고 확인하고 증언한다. 몇 예외를 제외하고 인간 존재의 비루함과 이기적 야수성 등 부정적 측면을 깊이 추구한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작품에 등장하는 부정적 인물은 거의 언제나 긍정적 인물을 대비적으로 부가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유고 문화 특성과 관련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우리 문학이 오랜 동안 지식 전달자와 윤리 교사 역할을 수행해 온 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 존재의 긍정적 측면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20세기 한국 문학의 이같은 특성은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에 근거한 주체성 강조의 인식론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1990년을 전후하여 이러한 믿음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6.29 선언ㅁ(1987), 베를린 장벽의 무너짐(1989), 구 소련 해체(1991), 뒤이은 동구권의 혁신적 지형 변화로 숨가쁜 혁신의 역사 전개가 낳은 필연 현상일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8)의 난쟁이 가족이 괴로워했던 노사 문제도, 「태백산맥」(조정래, 1989)을 핏빛으로 물들인 참담했던 이데올로기 문제도 어느새 퇴색하였다. 그 사이로 솟아오른 90년대 작가들은 한 목소리로 인간은 “벌레다. 메뚜기다. 되세때다.”외친다. 물론 처음엔 조심스런 목소리로 “인간은 은어다!”(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1994)라고 속삭였지만, 그 속삭임은 곧 큰 벌판과 그것을 둘러싼 산에 메아리쳐 90년대 한국문학을 온통 채우는 큰 울림이 되었다. 이제한국 문학은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라는 명제와 “인간은 벌레다”라는 명제를 동시에 안고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어느 한쪽만이 배타적으로 군림하는 경우에 비해 훨씬 깊고 넓은 세계가 열리게 된다.

 

이 시대는 속도의 시대다.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정보 전달 속도는 갈수록 급속도로 증대한다. 전달 속도가 빨라지는 것에 비례해 정보 수명은 짧아진다. 새로운 정보의 생산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해 생산과 전덜, 폐기 회로는 갈수록 더욱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어제의 새로움은 오늘은 이미 더 이상 새로움이 아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중심에서 밀려나고 만다. “가장 좋은 낡은 것 보다 가장 나쁜 새로운 것이 더 좋다.”라는 구호를 좇아 앞뒤 돌아보지 않고 내달린다. 요컨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은 속도다.

이같은 시대 정신은 뒤에 오는 것은 앞에 존재했던 것보다 낫다는 진보와 효율의 시간관에 근거한다. 그 진보의 시간관은 한편으로는 창조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이다. 자연, 자원, 여가 시간을 무한정 집어삼키며 앞을 향해 내달리는 이런 시간관은 미래 세계와 인간 삶을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고 철두철미하게 지배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새로운 문학은 이에 맞서 새로운 휴머니즘을 창조하는 선구가 되어야만 한다. 새로운 휴머니즘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핵심은 모든 것을 휘몰아 앞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와 효율의 시간관에 대한 반성 위에 세워져야 한다.

광속에 육박하는 속도성 확보, 물질적 구속에서 해방 등의 요인으로 예술 창작과 소비(향유) 질서는 크게 바뀌었다. 디지털 이전에는 전시회나 종이책 출판 같은 전문 문학 예술가에 의한 창작에서 소비자의 수요에 이르기까지 선조적 질서만이 존재했다. 이 경우 비상한 능력을 지닌 문학 예술가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 낸 신적 존재로 군림하고, 수요자는 완성되어 고정된 수동 소비자로 그 선조적 질서의 마지막에 종속된다. 그런데 디지털 미디어 등장과 그 급속한 발전으로 이제 수요자가 창조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무한대로 개방된 문화 예술 정보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수정, 삭제, 첨가할 뿐만 아니라 조합하여 수도 소비자가 아니라 소비하며 창조하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창조자가 된 것이다.

모두가 문학 예술 창조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은 만인 평등의 유토피아처럼 황홀하다. 그러나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문학 예술품 창조와 향유에 새로운 차원을 덧붙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높게 평가될 수 있다. 새로운 차원 개척이란 마치 간척 사업을 통한 새 땅 확보처럼 인간 삶의 영역을 보다 넓힌다. 마치 새로운 과학 원리의 발견처럼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보고 경험하게 만든다. 그러나 예술품 첨삭과 변형을 통한 창조적 향유는 전문 창작인에 의해 만들어진 본래 작품의 충실한 읽기를 가로 막는다. 그럴 때 비범한 재능에 의해 창조된 한 세계로서 예술품은 전체로 향유되지 못하고 이른바 창조적 향유를 위한 한갓 재료로 부분 수용된다. 창조적 향유자는 그 예술품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것,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것만 선택하고는 그 예술품을 떠난다. 이 얼마나 엄청난 낭비인가?

 

전문 창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잘 구성된 한 세계의 예술품이 이처럼 향유과정에서 한갓 파편적 재료로 해체되고 마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는 예술가와 그 향유자 사이의 문화 전승 관계가 파괴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기존 문화 전승 관계를 부정하고 그 바깥에서 다만 자신의 취향을 좇아 이른바 창조적 향유의 자기 황홀에 갇히면 무성 번식의 불모성을 낳게 된다. 세계적 차원의 통신망 구축과 정보 전달력의 놀라운 향상은 지식의 여과 장치를 무력화시키며 사람을 정보의 홍수 속에 내던진다. 공동 토대 위에 사람을 묶어 세우고, 개개인에게 체계적인 지식틀을 제공하던 지식 여과 장치의 무력화와 정보의 홍수 속에 내던져진 상황으로 개별 삶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야를 잃고 갈수록 파편화되어 떠돌게 될 것이다. 이를 따라 창조적 향유의 자기 황홀에 폐쇄되는 정도 또한 갈수록 커질 것이 틀림없다.

 

놀랍게도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으로 컴퓨터가 인간을 대체하여 새로운 문학 예술의 창조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예측이 설득력있게 제기된다. ‘지능, 의식, 감성 등의 요소를 모델링할 계산 이론이 개발’된다면 컴퓨터에 의한 작곡이나 로봇에 의한 그림 그리기가 전문 예술가 수준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전혀 다른 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이미 미국 등 앞선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적용한 교육용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개발, 사용되어 기존 교육 방법으로는 상상할수도 없었던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하이퍼텍스트가 소설, 연극, 영화 같은 기존 서사 형식을 밀어내고 서사의 중심에 서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사 형식의 출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가 기존 서사 형식보다 훨씬 우월한 서사 향식이라든가 기존 서시 형식을 포괄하며 더 경계를 넓힌 서사 향식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이퍼텍스트는 엄연한 한계를 지닌 형식이다. 그에 대한 환상이 인고 있는 핵심 문제는 대부분 이 형식의 작동 매커니즘이 프로그램에 의해 미리 정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작동 매커니즘이 프로그램에 의해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데이터 베이스에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독자가 그 정보를 선택하고 조합할 수 있도록 개방한 프로그램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직.간접 체험과 상상력이 구성하는 체험에 의해 확보되는 작가 정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한된 정보만이 독자에게 제공되어 독자 선택은 제한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제한된 선택의 연속에 의해 구축되는 하이퍼텍스트의 서사 또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이퍼텍스트의 운용 프로그램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극복될 수 없는 근본 문제점으로 하이퍼텍스트가 기존 서사 형식의 긍정적 기능조차 포괄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낙관은 성급하며 위험하기조차 하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세기의 한국 문학은 포용과 화해의 문학을 세워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20세기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반공주의, 지역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계급주의 등 차별과 배제 논리 위에 선 이데올로기를 넘어 포용과 화해의 문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근대 이후, 분단 이후를 열어가고 있는 역사 전개 앞머리에 우리 문학이 서는 것을 뜻한다.

 

 

『우리문학 100년』( 김윤식,김재홍,정호웅,서경석 지음, 방일영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총서 2 현암사 2001년) 364쪽에서 371쪽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