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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얻으리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6. 24. 17:34

 

시를 얻으리라

 

최재봉 기자

이리 카페

 

“몽정이 육체의 정열이 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육체를 사용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몽정은 자신의 몸을 종이에 싸서 물에 띄우듯, 먼 곳으로 보내보는 연습이다. 몸 위에 목선(木船)을 띄우듯, 몽정은 다른 몸을 건너온다. 몸에서 노를 놓아버리듯, 몽정을 하며 몸은 몸속에서 사그라든다.(…)”

 

2월 마지막주 화요일 저녁, 서울 상수동의 이리 카페 홀 안에 시인 김경주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그의 산문집 <밀어> 낭독회다. 인간 신체 마흔여섯 부위에 관한 시적 몽상을 펼친 이 책에서 그가 읽은 것은 ‘몽정’을 다룬 대목이다. 비록 백주 대낮은 아니라 해도 가릴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공간에서 몽정에 관한 시인의 고백을 듣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20, 30대 여성인 60명가량의 청중이다. 그 표정들이 사뭇 진지하다. 종 다양성을 위해서라는 듯 드문드문 남성 독자들이 섞여 있는데, 그들 역시 태연한 얼굴이다. 몽정이라는 은밀한 생리 현상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일이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듯.

 

 

마흔여섯 신체 부위…‘밀어’의 속삭임

 

 

낭독이 끝난 뒤 사회자로 나선 북디자이너 김바바가 시인에게 묻는다: 왜 하필 ‘몸’인가?

“저는 몸을 다 쓰고 휘발시켰을 때 집중력이 생기는 쪽입니다. 그래서 내 몸에 대해 집중해 보고 싶었어요. 또 생각해 보니 그동안 제가 낸 책들에 몸에 관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더라구요. 쇄골, 무릎,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죠. 그렇듯 자기도 모르게 반복되는 단어나 상징들을 이 기회에 한번 정리해 보자는 생각도 있었죠.”

 

2003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시상식 바로 다음날 인도로 떠났다. 긴급한 볼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등단 이후 엄습한 공허함과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쳤던 것. 1년을 계획하고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린 채 3개월 만에 귀국해야 했는데, 당시 인도 여행의 경험을 담아 쓴 시 <내 워크맨 속 갠지스>가 그의 등단 이후 첫 발표작이었다.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내 워크맨 속 갠지스> 첫 두 연과 마지막 연)

 

신춘문예 당선작은 시집에 묶지 않았다. “등단에 필요한 기술을 익혀서 쓴 것일 뿐 진정한 시작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상 그의 첫 작품이라 할 이 시에서부터 ‘살’과 ‘몸’에 대한 관심은 두드러지는 셈이다.

 

<밀어>의 산문들, 그리고 김경주가 낸 시집 세 권을 몸으로 글쓰기라 한다면, 이날 낭독회는 말 그대로 몸으로 책읽기라 할 법했다. 김경주는 이날 낭독회에서도 낭독의 중요성과 낭독 문화 부활 필요성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저는 문학이 살기 위해서는 소리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이 대형서점 같은 데서 사인회를 하기보다는 적더라도 독자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자신의 목소리로 글의 리듬감을 전하는 게 문학을 살리는 길이에요.”

 

그런 신념 아래 김경주는 2000년대 초부터 이리 카페를 중심으로 다양한 낭독 운동을 펼쳤다. 산울림 소극장 근처에 처음 문을 연 이리 카페는 인디 음악가들과 연극배우, 문인 등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구실했다. 아직 ‘북카페’가 생겨나기 전이었고 카페에서 낭독회를 한다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을 때였다. 김경주와 친구들은 즉흥시나 인디밴드의 노래 가사를 낭독하고 노래 공연과 마임 같은 퍼포먼스를 결합하는 등 자유롭고 실험적인 낭독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서점과 카페, 방송 등에서 낭독이 눈에 띄게 활성화한 최근 2년여 동안 그는 오히려 낭독에서 멀어졌다.

 

“저는 평소 시를 쓰려는 젊은 친구들에게 ‘시는 끊임없는 중얼거림 속에 있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저부터가 시를 쓸 때 단어의 뜻에 못지않게 그 소리와 질감을 중시하는 편이에요. 요즘은 낭독회가 성황을 이루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너무 이벤트화해서 낭독 본래의 취지가 퇴색한 것 같아요. 그 때문에 한동안 낭독 활동을 쉬었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낭독 문화 부활을 위한 운동에 나설 계획입니다.”

 

 

홍대앞 문화의 쇠퇴와 도하 프로젝트

 

김경주의 낭독과 사회자와의 질의응답 뒤로는 그와 가까운 선후배들의 낭독이 이어졌다. 낭독회 내내 ‘추리닝’ 차림으로 무대를 ‘장식’하고 서 있던 시인 지망생, 그리고 이리 카페 주인장이자 ‘몸과마음’ 밴드의 드러머이며 그 자신 미등단 시인이기도 한 김상우가 차례로 <밀어>의 한 대목씩을 읽었다. 또다시 사회자와의 질의응답에 이은 김경주의 ‘눈망울’ 낭독과 연극배우 장수진의 ‘귓불’ 낭독, 독자 네 사람의 낭독과 질의응답, 마지막으로 가수 양양의 ‘복사뼈’ 낭독과 노래 공연으로 두 시간여에 걸친 이날 낭독회는 마무리되었다. 독자 사인회까지 끝나자 낭독회 모드였던 카페 내부를 정리한 다음 그 자리에서 뒤풀이가 이어졌다. 일정 때문에 낭독회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가수 하림이 뒤풀이 자리에 나타났다.

 

 

동갑내기 친구 사이인 하림과 김경주는 마주 앉자마자 ‘도하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에 빠져들었다. 도하 프로젝트란 금천구청 인근 옛 육군 도하부대 터를 독립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이다. 육군과 금천구청 등 관계 당국과는 협의가 끝났고, 태양광발전 시설도 관련 기업의 협찬을 얻어 낸 상태. 두 사람은 2010년부터 해마다 6월24일에 맞추어 이리 카페 등에서 해 온 ‘6·24 예술독립선언’ 낭독을 올해는 이곳에서 한다는 계획이다.

 

“홍대가 인디 예술가들의 둥지라고들 하지만, 지금 주차장 골목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홍대앞’은 음식점과 카페 아니면 술 마시고 춤추는 클럽 같은 상업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독립 예술가들은 다 상수동이나 망원동으로 쫓겨났어요. 이리 카페가 2010년 봄 상수동으로 옮겨 온 것도 치솟는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서였거든요. 저희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요. 여기서도 밀려나면 한강에 빠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김경주는 홍대앞이 ‘문화 생태계’로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홍대 예술가들은 단순히 잉여가 아니라 항생제 문화로서 그 존재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그런 김경주가 10년 가까이 드나들고 있는 이리 카페는 홍대 문화의 온상이자 버팀목으로서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공간이다. 김경주뿐만 아니라 하림과 양양, 그리고 기타리스트 방승철 등이 이리 카페를 단골로 삼고 있다. 김경주의 경우 거의 매일 출석하다시피 이곳으로 온다. 이리 카페 홀에는 열서너 개의 탁자가 있고 카운터 바에도 10개 가까운 의자가 있는데, 김경주는 출입문을 등진 채 바의 왼쪽 끄트머리에 앉아 노트북에 ‘밥벌이용’ 글들을 쓴다. 카페 실내 오른쪽 금연실에도 창가 쪽 바를 포함해 열댓 개의 의자가 있고 바깥 테라스에도 세 개의 작은 탁자가 있다. 무엇보다 수십 대의 자전거를 세울 수 있는 자전거 보관대가 인상적이다.

 

이리 카페에서는 낭독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가 일주일에도 서너 건씩 이어진다. 이곳에 모여드는 단골 예술가들과 주인장들이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는 문득 행사 하나를 기획해 내는 식이다. 최근의 행사 중 기억에 남는 것은 2월1일에 있었던 ‘에이블 아트’라는 장애인 대상 예술 체험 행사였다고. 김경주를 비롯한 이리의 단골 예술가들이 각자의 장르에 재능이 있는 장애인들과 일대일로 협동작업을 해서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김경주는 시각장애인과 파트너가 되었다. 조명을 모두 끈 상태에서 두 사람이 전화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시를 읽어 주는 형식이었다. “전율이 일 정도로 놀라운 경험이었다”고 김경주는 회고했다.

 

그는 4월부터는 매달 마지막주 일요일에 ‘이리 백일장’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누구든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원고지를 나눠 주고 시제를 주어서 세 시간 동안 시를 쓰게 한 다음 자신이 심사해서 심사평을 들려주고 상품도 준다는 것. 이리 카페에서는 이밖에도 매주 토요일 무료 서예 강습회도 열리고 있으며, 카페 안쪽 벽은 상시 갤러리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들, 그리고 이리 카페와 이곳 예술가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무가지로 발행되는 <월간 이리>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3년 쓴 시, 3시간 만에 읽고 어렵다면…

 

김경주에게 이리 카페는 새로운 문화 운동의 온상인 동시에 생계용 글쓰기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등단 이전부터 방송 작가와 자유기고가로서 글품을 팔았으며 시나리오 각색, 카피라이팅, 대필 등 온갖 종류의 ‘매문’으로 밥을 벌었다. 돈주앙을 연상시키는 ‘김주앙’이라는 필명으로 무려 원고지 3만 장 분량의 ‘야설’을 쓰기도 했다. “지금도 ‘유령 작가’로서의 실존적 정체성을 계속 지니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으로서 이름이 났다고는 해도 생계 문제는 전혀 바뀐 게 없어요. 통장 잔고가 몇백만원을 넘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돈 때문에 쓰는 글들이 있지요. 이리 카페에서 그런 작업을 주로 합니다. 제가 다음에 낼 책이 ‘고스트 라이팅 작가 되기’라는 책이에요. 저는 생계의 필요 때문에 유령 작가 일을 시작했지만, 젊은 친구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실존적 지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학연, 지연, 혈연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문체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니까요. ‘유령’이라는 정체성이 새로운 글쓰기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죠.”

 

1만부 넘게 팔리면서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든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는 유령 작가로서 그의 실존적 정체성이 진하게 배어 있다. 아래 시에서도 바람은 유령의 화신으로 읽힌다.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세계 속에서 울다 간다”(<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 부분)

 

그에게 유령이란 사이의 존재로서 경계 너머의 언어에 관여한다. 그의 시가 매혹적이면서도 난해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유령과 사이의 언어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에게 세상 사람들이 쉽사리 입에 올리곤 하는 ‘소통’이라는 말은 적잖은 스트레스를 주는 듯하다.

 

“제가 소통을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쓴다는 말은 저에게 상처가 됩니다. 제 생각에 소통이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예요. 작가는 이미 있는 독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독자를 발굴해야 합니다. 시인들이 시집 한 권을 묶는 데 보통 3년 정도 걸립니다. 그런 시집을 세 시간 안에 읽어 치우고는 ‘소통이 안 된다’고들 합니다. 시가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소리 내서 읽어 보세요. 그러면 한결 이해가 쉬워집니다. 아무리 난해하고 복잡한 시라도 읽는 순간 독자는 잠시나마 어디론가 건너갔다 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소통입니다.”

 

역시 문제는 ‘낭독’이다. 시 이전에 연극을 먼저 시작한 그는 시와 연극의 결합에도 큰 관심을 지니고 있다. 그는 현재 동덕여대 문창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시창작과 서사창작 강의를 하는 한편, 역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극창작학과 협동과정의 전문사(석사) 과정 강의를 듣는 학생이기도 하다. 그의 남다른 포부 중 하나가 국내에서는 그 이름도 생소한 시극 부흥운동이다.

 

“소설과 시나리오, 드라마가 주류적 지배권을 지니고 있다면, 시와 무용, 음악, 마임은 그 반대편에서 항생제 구실을 하는 장르들입니다. 저는 올해 ‘시인의 피’라는 이름으로 시극 실험 집단을 출범시킬 계획입니다. 10년 넘게 준비해 온 거예요. 100개가 넘는 극단 중에 시극만 전문으로 하는 극단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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