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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시즘_ 主知抒情의 시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7. 8. 23:39

 

릴리시즘_ 主知抒情의 시대

윤의섭

 

1. 서정시를 대하는 태도와 서정시의 성격

 

 2000년대의 서정시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물론 아니다. 90년대 시 또한 그 이전 시대와 연계되어 있듯 그것은 적어도 90년대 시의 서정성에서 단절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서정시에 대해, 시의 서정에 대해 다수의 논의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또 다시 거론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00년대의 서정시와 이전 시대의 서정시 사이에는 시대적·환경적 조류에 의한 차이가 당연히 있을진대 그것이 각별히 부각된 사건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라는사실이다. 이때의 ‘차이’는 일군의 시적 경향을 보여준 시인들에 대한 집중적 조명으로 인하여 전면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로써 ‘미래파’ 1), ‘다른 서정’ 2), ‘극서정’ 3) 등의 개념어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서정시의 차이성과 방향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개진되고 있으면서도 2000년대의 서정시에 대한 판단은 명징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2000년대가 시작 된지 10여년이 지난 현재가 ‘차이’의 초기발생기라고 할 수 있는 지난 10년을 되돌아보고 이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적절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90년대의 서정시, 혹은 신서정시, 정신주의시 등등에서 촉발되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2000년대 초의 시에 대해 많은 평자가 취한 방식은 ‘서정시를 대하는 태도’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새로운 양상과 차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태도 말이다. 앞서 언급했던 ‘다른 서정’, 또는 ‘시적인 것’ 4) 등의 개념은 그 개념의 기의가 제시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명명의 초기적 동기에는 ‘서정시를 대하는 태도’가 우선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서정시에 대한 논의는 ‘서정’의 본질에 대한 고찰을 수반한다. 그리고 무릇 어떤 존재의 본질은 역사성에서 자유롭지 않으므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기원을 더듬어 봐야 한가. 그러나 서정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그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을 시도하는 것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나라 근대시의 초기에 나타나는 서정시의 양상이 애초부터 기획된,“근대적인 시의 발전 과정에서 그 실체가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 5)로서 차이를 통해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과, 서구의 서정시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이 결국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의타로 오늘날의 서정시를 한정할 수있다는 등의 문제점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시대의 시가 서정시의 본질을 끌어안고 있다면, 그러한 본질 속에서 현대의 서정시의 성격은 어떠한가라는 점이다.

 

 ‘서정시를 대하는 태도’는 서정시에 대해 가깝게 다가서거나 낯선 것으로 대하는 심리적 거리를 형성한다. 이로 인해 서정과 반서정, 서정시와 시적인 것 등등의 전통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이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로는 2000년대 서정시의 특징을 주변적인 기웃거림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0년대 초기의 서정시에 대한 고민과 충격이 어느 정도 완화된 현재 시점에서 우리는 이물을 바라보는 거리두기의 태도에서 벗어나 보다 시 속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서정시가 보여주는 낯선 성격, 낯설지 않는 성격을 새롭게 파악할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사유하는 주체와 주지서정

 

 서정이란 말 뜻 그대로 감정을 펼쳐내는 것이다. 서정적 주체는 기본적으로 감정적 고양의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데 긴즈부르크의 견해에 의하면 서정시는 자신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시인의 말이 아니라, 드러난 관점, 사물에 대한 서정적 주체의 태도, 즉 평가이다.6) 이때 감성적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감정적 고양’과 이성적 영역으로 볼 수 있는 ‘평가’는 상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유의미한 대상에 대해 감정적으로 고양된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평가 역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서정시는 이성적인 평가로 감정을 펼치려는 논리적인 성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정시의 이러한 논리적 성격은 변화무쌍한 감정만큼 획일적이지만도 않으며 직접적으로 노출되지도 않는다. 적어도 서정시의 표층적 층위는 논리적 성격을 미적 요소와 체계로 감싸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이러한 서정시의 성격은 ‘사유’를 시의 추동 기제로 삼으면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밤에 알 수 없다, 마음이 홀로 사는 곳을

앵초꽃의 보라를 보다가 거북이의 등에 거북이가 올라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이 밤에 진흙 속에 사는 진흙게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늙은 여자의 몸 같은 갯벌의 몸을 더듬게 되는 이 관능을

그 뻘구멍에 마음이 살고 있는가 질문하며 뻘구멍을 파들어가는 이 시간의 손을

마음이여, 무슨 이유로 네가 그곳에서 뻘물을 마시면서 살고 있겠는가

음란하고 물컹물컹한 진흙의 무희를 네가 사랑할만한 이유를 찾을 수없다

진흙벽과 흘러내리는 진흙지붕과 진흙밥과 다발이 없는 진흙꽃과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진흙말과 진흙입맞춤과 미소가 적은 진흙아침과진흙하늘과

태아처럼 몸이 나뉘지 않은 진흙허파와 진흙허벅지와 진흙발과 동공이 없는 진흙눈과

그리하여 세계가 한 덩어리의, 혹은 흐물흐물해서 쥘 수 없는 진흙이라는 너의 인식을

이 밤에 알 수 없다

                                                           - 문태준, 「뻘구멍」 부분

 

 문태준 시인은 90년대 후반부터 이미 서정성 짙은 시를 발표해왔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특유의 ‘미적 사유’를 통한 서정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위 시는 “진흙게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화두로 시작된다. 주목할 것은 사유의 주체가 ‘문득’ ‘진흙게’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자신이 ‘진흙게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사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원주체를 바라보는 또 다른 주체의 시선은 세계를 ‘진흙’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원주체의 인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시에서 원추체는 ‘마음’으로 대상화 되거나 ‘너’로 지칭됨으로써 시를 이끌어가는 사유의 주체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시는 속세가 아닌 성세를 상정하거나 진세가 아닌 돈오의 세계를 사랑하고 있는 ‘너의 인식’에 대한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고 있으며 우리가 갖고 있는 존재론적 무지에 대해 일갈하고 있다. 사유의 대한 사유는 데카르트 이후 가장 유력한 이성중심주의의 방법론이지만, 서정적 감성으로 포착된 대상에 대한 사유가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고양된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한 기제로 기능할 때, 사유는 비등점의감정이 갖는 폭발력이 응축되어 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방법론인 것은 분명하다.

 

 전래의 서정시에서 보이는 향토성이나 자연 현상에 대한 감상을 서정성을 담보하는 요소로 보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그러한 요소 대신 자아의 극단적 감각이나 파편화된 감성 표출로 대체되었다고 해서 오늘날의 시가 통례적인 서정성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감정적으로 고양된 주체 자신의 시각으로 평가한 대상(주체 자신을 포함하여)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시는 일말의 예외도 없이 서정시다.

 서정시의 주체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또한 “주체의 시선으로 사물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그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성찰하는 시적 원리” 7)는 서정시의 자기 회귀성이라는 자가발전을 통해 추동된다. 2000년대의 서정시가 갖는 성격은 이러한 ‘시적 원리’가 주지적 사유라는 방식으로 원용되는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주지主知’는 물론 우리나라의 30년대 문학에서 감정이나 정서보다는 지성을 강조하는 경향을가리키는 ‘주지주의’에서 가져온 말이다. 사유를 시의 내적 추동 기제로삼는 오늘날의 서정시는 이지적인 논리와 평가, 그리고 절제를 통해 전개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유는 곧 주지주의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서정시의 감정이 주지적 사유를 통해 통어되고 있다면 그러한 시는 ‘주지서정’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언제부터 이깟 애벌레 한 마리를 두고 심란해했던가

올 겨울 나는 기필코 모과차를 마시리라,

짐짓 무심하게 아내를 바라보는데

아직도 책장 어딘가에 심장이 멎은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놓쳐버린 아기의 태기를 놓지 못하고 있는 모과

속을 드러낸 거죽에 검은 주근깨가 숭숭하다

수술실에서 나올 때 흐느끼는 내 어깨를 말없이 안아주던 너

칼자국 지나간 몸 더 거칠어가는 줄 모르고바깥으로만

바깥으로만 떠돌던 날들이 있었는데

날을 세운 불빛에 움찔거리는 애벌레처럼 허둥거리는 한때

빈속에 쟁인 울음이 아린 향을 타고 흘러나온다

                                                                                     - 손택수, 「모과」 부분

 

  손택수 시인 역시 2000년대의 주목할 만한 서정 시인이다. 그는 정갈한 구조를 통해 서정적 파토스를 형성시키는 시법을 묘파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의 시에서 서정적 감정은 주지적 사유를 통해 응축되어 있지만 농밀한 감정의 향은 오히려 배가된다. 위 시의 주체 역시 “언제부터 이깟 애벌레 한 마리를 두고 심란해했던가”라며 사유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주지적 태도로 시는 아내와 태아의 사연을 환유적 외연으로 끌어들이면서 존재와 삶의 연기성緣起性에서 환기되는 ‘아린’ 감정을 차분하게 드러내고 있다. “놓쳐버린 아기의 태기를 놓지 못하고 있는 모과”에 대한 평가와 의미부여는 대상에 대한 일정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감정의 응축과 상대적으로 강한 감응력을 펼쳐내고 있다.

 

 2000년대의 서정시가 갖고 있는 주지서정의 성격은 하나의 경향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90년대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의 서정 시인들이 사유를 통해 자아를 들여다보고 감정의 수위를 조절하는 데 있어 보다 철저하고 치밀한 것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즉흥적 반응과 과잉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미적 성찰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3. 서정시 영역의 확장과 회귀본능

 

 2000년대 시의 특징 중 한 가지로 의미의 구성보다 의미의 해체를 통해 서정적 주체의 파편화된 의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경향을 들 수있다. 서정시가 자아 동일성의 원리를 주축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시들은 비동일성의 원리를 따라 질서와 통일을 분산시켜 나간다. 이러한 시들의 내적 논리에는 자아와 세계의 비동일성 속에서 침탈당하고 일그러진, 또는 형언하기 힘든 주체의 감정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인다. 그것은 주체의 서정성에 의해 기획된 후 미적 사유의 과정을 거쳐 표출되는 다단계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서정시를 논하는 글에서 헤겔은 “시인이 자기 고유의 것으로 규정하는 모든 통찰력과 감정이 한 개인으로서의 그에게 아무리 친밀하게 속해 있다 하더라도 시인은 보편타당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시는 “정신을 해방시키되 감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써 해방시키는 것이다.” 8)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아래의 시가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잠시 유보될 수밖에 없지만 ‘감정으로써의 해방’에 대해서는 사사하는 바가 있다고 보인다.

 

구름 위의 유리의 방. 자살자들이 모이는 곳. 나는, 당신은 그림자입니다.

 다 버리고 오셨습니까?

떨어져 나간 모가지 안에 든 것은 일인용우주一人用宇宙였습니다.

상한 잡채랄까요. 수십억 개의 방을 가진 호텔 주방은 Bye-Bye.

이제 우리의 파이데이아가 가능합니다.

 비계가 비누로 굳어갈 때 공기가 떨리듯, 우리, 미인未人에서 비인非人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당신의 입에 독을 흘려 넣겠습니다. 아직 인간이 남아 아픕니까?

아니오. 나는 항상 고기를 토하곤 했어요. 내 턱을 벌리던 교복敎僕 이 끝내 내 위胃를 먹어버렸죠. 이제, 당신의 독, 나는 맛있습니다.

발레를 배워 본 적 있습니까? 그보다 고문拷問에 가깝게, 고문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아름다워집니다.

 

                                                                               - 오주리, 「그림자들의 파이데이아」 부분

 

오주리 시인의 시는 보편적인 문법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생근이 진은영, 김행숙, 이장욱을 논하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 오주리 시인 역시 “의식의 주체적 목소리를 통해서는 말해지지 않았던 부분, 서정적이거나 객관적인 세계의 질서 속에서는 표현되지 않고 억눌려왔던 내용을 새로운 시의 문법으로 제시하고 이야기하려한다.” 9)

 위의 시에서 주체의 감정은 새로운 문법을 통해 마치 미세한 틈으로부터 가늘지만 강한 빛이 새어나오듯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다분히 초현실주의적” 10)인 양상을 보이지만, “다 버리고 오셨습니까?”라는 질문과 “이제 우리의 파이데이아가 가능합니다.”라는 선언 사이에는 주지적인 태도로 자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의 다단계적 층위를 파헤치고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비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에 대한 거부감과 일체의 인간적인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주체의 암울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이 괴기한 현실을 살고 있는 자신의 정신을, 극단적인 절망의 감정을 들춰냄으로써 또 다른 방향으로, 즉 고독한 폭로와 조용한 절규라는 방향으로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위 시는 보편타당한 평가를 보여주는 서정시다. 다만 서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익숙한 서정시의 영역 너머에 있기에, 분절되고 비약적인 건너뛰기를 하는 문장의 배치에 있기에, 그러한 불연속적인 의식을 보여주고 있기에, 독특한 서정의 성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2000년대 시의 일부 경향은 종래의 서정시 영역을 확장시키는 효과를 가져 온다. 전혀 새로운 영역의 출현이 아니라 다양한 서정시의 영역이 분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인 것이다. 그것이 서정시일 수 있는 이유는 서정적 주체의 주지적 사유가 미묘하게나마 자아의 감정을 심어놓고 송출시키려는 운동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서정시로의 회귀본능이기도 하다.

 

 머리를 숙였던 예의가 훗날 맹인이 되었다지.

녹기 좋아하는 향기는 흰 눈과 섞여 눈송이로 날리고 있을 뿐 누가

짚어보고 간 구멍들인지 바람만 가득 들어 있다

가지마다 붉은 지점을 만들어 놓고

건너가는 개화의 순간들, 짧은 단소 한 자루에 뱀과 같은 음역이 들어 있을 줄이야

갇힌 소리가 내는 음가늘고 긴 봄날을 울리는 저 운지법은 사실,

呼吸法이다.어쩌다 기다란 음역에 들어 손끝을 맛본 소리들쌍커풀 없는 음계엔 모래소리만 난다

 

                                                                              - 박해람, 「운지법」 부분

 

 박해람 시인의 시는 격렬한 감정을 느릿한 어조와 한자어로 억누르며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게 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위의 시가 전래적인 서정시의 면모만을 갖추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대상에 대한 의미 규정이나 평가는 시적 주체와 동떨어진 거리에서 발생하고 있다. “머리를 숙였던 예의가 훗날 맹인이 되었다지”라든가 “음역에 들어 손끝을 맛본 소리들/쌍커풀 없는 음계엔 모래소리만 난다”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 서정적 자아의 개입이나 감정 노출은 주체와의 거리감에 의해 좀처럼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단소 한 자루에 뱀과 같은 음역이 들어 있다”는 구절에서 보듯 친밀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서정시의 ‘권위’ 11) 역시 사유와 판단의 전개 운용 방식에 의해 멀리 느껴진다.

 그러나 시는 전체적으로 서정성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을 감추지 않는다. 시는 전래의 서정시에서 자주 보이는 아어와 의고체를 전유하고 있으며 은유의 속성을 끌어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주체의 감정이 경이와 감탄의 어조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이 주지적 사유로써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직접적 감정의 표출은 이러한 사유 행위를 통해 유예되지만, 그 ‘끝 맛’은 분명 서정성을 발산하고 있다.

 

4. 주지서정의 향방

 

 2000년대 서정시의 경향들은 서로의 길을 향해 일정한 각도를 벌리며 치달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서정시의 영역을 종횡하는 황톳길, 아스팔트길, 시멘트길, 모랫길, 돌무더기길일 뿐이다. 각각의 개성은 우리 시의 층위를 한 층 두텁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주지적으로 사유하는 감정적 주체에 의해 추동되는 시의 성격은 당분간 많은 경향의 시에서 고착되어 갈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더더욱 유행처럼 전염되고 서로 물들이다 일정 부분 동화되기도 할 것이다.그러한 현상을 통해 독자가 기대하는 서정시의 속성들도 점차 다변화될 것이다. 이제 독자는 주지서정의 시를 자기 안으로 끌어다 놓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던 예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차분히 곱씹으며 사유하며 감정을 되살려내는 유사창작행위를 행해야 할 것이다.

 태블릿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인공지능형 스마트폰의 시대에 얼핏 사유하는 주체의 주지서정시는 퇴행을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광속도와 즉각적 반응으로 점철되고 있는 우리의 일상에서 차분히 존재를 들여다보고 감정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순간은 거의 없다. 오늘날 우리의 시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주지서정시야말로 커서처럼 쉴 새 없이 깜빡이는 불안증과 빠른 속도에 목마른 조급한 욕망까지 담아낼 수 있는 용기用器일지 모른다. 그리고 서정의 영역을 확장 시켰다고 평가 받고 있는 시가 자아의 정체성 모색 차원을 넘어서서 하루가 다르게진화하는 현대의 단면을, 현대인의 심리적 양상을 감정적으로 파편화되고, 분절되어 있으며, 이접되어 있는 시문 속에 끌어들이는 단계로 나가는 것 역시, 사유를 통한 주지서정시의 심급인 것이다. 서정시는 “장구한 혁명” 12)을 이루어 왔다. 이전 시대의 기억의 소멸과 지속, 그리고 새로운 선택과 성격의 창조를 통해 2000년대의 서정시는 백여 년 전 형성된 근대시와는 또 다른 시작점에 서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 ‘혁명’의 주기는 가속화될 것이다.

 

윤의섭1994년 『문학과 사회』 등단시집 :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외현 : 대전대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계간 『시와 표현』 201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