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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시적 정체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7. 2. 19:14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적 정체성

김석준(문학 평론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도 다양하여 그것의 의미를 일의적으로 개념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양성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정의하면 어떻고 정의하지 않으면 어떤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그 자체로 포스트모던한 것을 말이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그 다양성 내부를 지배하는 공통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모더니즘 시대와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시대는 인식의 조건 자체가 전혀 다르다. 이 양자는 자본주의라는 동일한 선상 위에서 탄생한 전혀 다른 모습의 쌍둥이다. 자본의 성격이 자본주의의 내적 규모나 지향성을 결정하듯이, 이들은 성격도 다르고 체격도 아니다. 전자가 규범적이고 이성적이라면, 후자는 무질서하고 감성적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무질서하고 감성적인 것으로만 느껴지던 쌍둥이 동생이 자기만의 논리와 체계를 겸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쌍둥이 동생은 비논리의 논리를 자신의 테제라고 여기면서 조자룡이 헌 칼 휘두르듯, 쌍둥이 형이 견지해 온 이성적 체계와 논리를 일거에 무너트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형과 동생은 늘 반목하여 서로가 서로를 질시하고 미워하게 되는데, 그것이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직면한 갈등의 본질이다. 물론 힘의 균형점을 찾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힘이 월등할 경우 싸움은 잦아 들어가겠지만, 문제는 그 힘이 아니라, 그 힘이 지향하는 권력 담론의 지대에 있다.

말하자면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담론적 욕망 위에 쌓아올린 일종의 가면의 어휘이다. 물론 쌍둥이 형이 늙고 병들어 먼저 유행에서 나가떨어져 이 세계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겠지만, 쌍둥이 동생은 자기모순에 휩싸이게 된다. 좀체 세상을 정리할 수 없다. 질서는 없고, 다만 카오스상태의 혼돈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논리의 세계를 비논리의 논리로 해체시킨 결과다. 그렇다면 문제의 중심이 모던도 아니고 포스트모던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그 가만의 어휘 뒤편에서 작동하는 이성과 그 타자, 즉 감성이나 비이성이 벌이는 상호 대극적인 미적 긴장력에 놓여 있다. 미의 역사는 늘 이 둘의 피 터지는 싸움이었다. 그것은 인정투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였다고 해서 해결이 나는 문제도 아니다. 기실 겉에 쓴 가면의 개념적 어휘만 바뀌었을 뿐, 안에 자리한 내용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미의 운동은 순환하면서 재귀하는 영원한 반복의 운동이다. 가면의 어휘들이 개념으로 무장하여 형식을 화려하게 치장하기는 하지만, 가면을 벗겨놓으면, 미의 운동 역시 이성과 그 타자 간의 골 깊은 원한감정에서 파생된 감정싸움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때론 유화책을 써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면서, 때론 정립과 반정립의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면서, 예술은 나선구조로 발전하고 있다.(엄밀히 따져서 그것이 발전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시라는 양식 자체가 비논리의 논리를 육화시킨 미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모든 예술은 비논리의 논리를 형식으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다. 외적으로 포장된 가면의 어휘들을 베껴놓고 본다면, 예술은 형식만 다를 뿐,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때문에 문제는 항상 형식에 있다. 쌍둥이 형이 펼쳐내는 시말의 제국이 거대한 이성의 틀 위에서 감성이 펼쳐내는 다양한 문양들을 구상력을 통해서 재배치한 것이라면, 쌍둥이 동생은 그 역의 방식, 즉 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포리아를 시말의 테제로 삼아 말-자유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언어 논리를 해체 초극해가고 있다. 이를테면 포스트모던의 시적 원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적극적으로 부여하면서 말-금기를 철저하게 위반하는데 있다. 따라서 거기엔 말이 안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말이 되는 것도 없다. 그저 말이 말을 물고 들어가 말을 말하면, 시말이 되고 시가 된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몽상인가. 말이 말-논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말을 모두 다 할 수 있다는 이 말의 천국은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하나의 대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쌍둥이 동생의 시적 기획은 이제까지 로고스 안에 갇힌 채 말이 진리를 대리 표상하는 역할만 강요받던 말에게 다가가 말-한계가 없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역으로 말 그 자체가 내포이면서 외연이고 외연이면 내포인 까닭에, 말해진 말의 총합은 말-세계의 총합이라는 가정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쌍둥이 동생은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말-한계가 없어진 순간, 혹은 말의 외연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고 믿어진 순간, 말은 말-자유를 적극적으로 실현시키지만, 말은 말-아노미에 걸려 넘어진다.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혹은 말이 이 세계에 주인으로 군림한 순간에, 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말의 정전적 가치를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말의 신기원이라고 믿어지는 신세계를 향하여 말은 앞만 보고 내달리고 있다. 그것은 역으로 쌍둥이 동생이 빠진 말의 함정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즘이라는 가면의 어휘를 철저하게 배제해 놓고 본다면, 문학의 역사는 이중의 표상작용으로 휘어진 나선구조로 발전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성과 감성이 매체환경과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새로운 미적 형식을 창조하기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미의 역사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를 가로지르는 변증법적인 운동이다. 이 쌍둥이 형제 사이의 미적 거리 내부에 미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역으로 모든 미적 가능성들이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쌍둥이 동생의 시적 기획은 더 멀리 치달아 자신의 시적 외연을 말-아포리아로 끌고 올라가 말할 수 없는 지대에 말을 위치시키기를 열망하고 있다. 때론 무의식이나 환상성의 지대로 말을 끌고 내려가기도 하면서도, 때론 무의미와 모순어법 속으로 말을 인도하면서, 쌍둥이 동생은 말-너머로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위치시키기를 열망한다. 말-너머에 말이 위치한 순간, 그것은 말인가, 말이 아닌가. 말-너머의 말이 분명 말할 수 없는 말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너머에 위치한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말-절대성으로 회귀하는 운동이다. 마치 너무도 태양을 동경했던 이카로스에게 추락이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말-자유는 다시 말-한계로 휘어져 말의 역사가 순환의 운동 위에서 욕동하고 있음을 예증하게 된다.

물론 쌍둥이 동생의 시적 실천이 무한한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가운데, 생성된 말의 신기원이라는 데는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모든 말들이 말 그 자체로 재귀한다는 사실이다. 말의 정전도 말 안에 갇히고 말의 마법적 자유도 말 내부에서 고스란히 소거된다. 그렇다면 쌍둥이 동생의 말들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말의 위치가 시말의 정체성을 가름한다 할 때, 과연 동생의 전언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이 지시의 문제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딜레마를 고스란히 노정하게 된다. 쌍둥이 동생에게 지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시는 구속이고 억압이다. 그것은 역으로 쌍둥이 형제가 위치한 시말길이 지시와 비지시 사이에 위치한다는 것을 예감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말의 행로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리 현전이나 부재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미가 현상하는 방식이다. 서로 성격이나 체격이 다른 쌍둥이 형제가 겪어야만 하는 미에 관한 취향의 문제이거나 미가 전유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검은 가방이 있다

꽉 닫힌 허공 속

공허한 이름, 공허한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이 있다(네겐 비밀이야!)

검은 뱀가죽가방의

뿔리깐들라 著 인도철학이 있다

아이를 죽인 노트가 있다

이름 지어 주지 않은 채 죽인 아이

검은 뱀가죽가방은 아이의 무덤이다

죽인 아이를 쓴 시

붉은 갈참나무가 있고

배설물이 모여 이룬 江이 있다

꾸역꾸역 쌓이는 하구의 토사 더미들

좌절을 떠메고 다니는 어깨

굽은 허리까지 검은 가방이 내려온다

(글쎄, 비밀이라니까!)

검은 가방일 뿐인 걸

옆구리가 터진 검은 가방

죽은 아이는 울지 않고

붕어빵을 우물거리는 입

왕십리에서 신촌까지

밤새 걸어오는 검은 가방

비 내리는 숲, 눈 쌓인 산을 지나

흰 백열등의 앉은뱅이 스탠드 옆

크로바 타자기에 몸을 기댄 검은 가방

처넣어도 처넣어도

비어만 가는 검은 가방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검은 가방이

― 최준, 「시인의 검은 가방-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전문

 

 

최준의 시를 읽다보면, 그의 시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존재하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그것은 상상력이다. 모든 시인들에게 시적 상상력은 필수조항이기는 하지만, 최준의 그것은 시가 생산이 되는 언어의 심연을 무의식으로 끌어내려 언어와 맞서 싸우는 환상성의 극단으로 치달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의 정전적 가치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 그는 시라는 함수에 상상력이라는 칼날을 들이밀고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때론 말과 사유의 간극을 최대한 벌려놓기도 하고, 때론 환상의 공간 속을 헤매기도 하면서, 최준 시인은 시말이 어디로 휘어질 때, 최적의 시가 창조되는지를 적확하게 알고 있다. 특히 시 「시인의 검은 가방-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는 “시”와 “시인”과 “나 없는 세상” 사이를 “검은 가방”을 통해서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환상이거나 일상적 의미의 관계를 해체시키는 행위이다. 주체는 시인도 아니고, “나 없는 세상” 바깥에 있는 외적 주체도 아니다. 모든 관계는 전도되고 왜곡된다. 주체는 시도 아니다. 진정한 주체는 “검은 가방”이다. 그렇다면, 그 가방의 정체는 무엇인가.

지금은 망하고 사라진 고려원에서 1995년에 상재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연작들은 “나 없는 세상”이라는 가상공간을 활보하면서 말-한계를 돌파하고 있다. 거기엔 논리도 없고 목적도 없다. 거기엔 다만 “幻影”(「하오 여섯시의 벼랑」, 혹은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중)만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묘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 최준에게 “검은 가방”은 시말의 가능적 질료, 즉 세미오틱 코라다. 거기엔 죽음도 있고, “죽은 아이”도 있고, “비밀”도 있다. 하지만 속이 떵 비어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꽉 닫힌 허공 속” 같은 “검은 가방”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너무도 무겁다. 헌데 더 큰 문제는 거기엔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떠한 목적이 있는지 불명확하다. 물론 시인에게 가방은 시가 생산이 될 수 있는 원초적인 그 무엇을 표상할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처넣어도 처넣어도/ 비어만 가는 검은 가방”은 시가 존재하는 방식이거나 시 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간접적인 고백에 가깝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시말의 전개가 환유적인 관계로 인해 의미연관을 찾아가는데 어느 정도 난점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시인에게 시말은 언제나 “좌절”을 안기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뮤즈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시를 구걸하는 너무도 초라한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시인의 “수첩”에 수많은 의미의 기호들이 적혀 있을지라도, 그것은 “공허한 이름”이거나 숫자에 지나지 않다. 마치 “뿔리깐들라 著 인도철학”이라는 저서가 空으로 휘어진 것처럼, 시말의 존재론적 위치 또한 허무 같은 공허의 지대를 空으로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말의 존재적 지평은 “비 내리는 숲”을 지나 “눈 쌓인 산”을 넘은 후 스스로를 무의식의 심연으로 끌어내린 후에 생성이 되는 지난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죽인 노트”는 무엇이고, 또 “죽인 아이를 쓴 시”는 무엇인가. 사실 최준의 이 시가 어려운 점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재구해낼 수 없다는 데 있다. 다만 추측컨대 시인에게 “검은 가방”으로 표상되는 문학의 공간이란 그 자체로 죽음의 공간이거나 생을 걸어야만 찬연히 피어나는 한 떨기 불두화 같은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설령 시말의 지대가 환상성으로 휘어진 “비밀”의 문을 통과한 연후에만 열림으로 치환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시인이 칩거하는 문학의 공간은 어둡고 밀폐되어 있다. 따라서 절망과 죽음의 나락에 떨어져 본 시인만이 진정한 시말과 만나게 된다.

 

나 투투섬에 안 간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투투섬 망가로브 숲에 일렁이는 바람

거기서 후투티 어린 새의 울음소릴 못 들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처녀애들은 해변에서 하이힐을 벗어던지겠죠

물살 거센 파도에 뛰어들어 미장원에서 만진 머리를

풀어 젖힌다죠

수평선을 끌어당긴 비키니 수영복 끈은

자꾸만 풀어져

슴새들의 공짜 장난감이 된다는

투투섬에

 

나 그 섬으로 가는 티켓을 반환해버린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쓰리 당한 핸드백처럼 볼품없이 행인들 틈에 섞이다가

보도블록에 넘어진 사람 부축한 일 없지만

옛날 종로서적 해묵은 책먼지 생각이 떠올라서

풍선껌이나 사서 씹죠

― 나 투투섬에 안 간 것 정말 잘한 결정이죠

 

발자국 수북이 쌓인 안국역 지나 박인환을 꼭 만날

예정은 아니더라도

마음속에 마리서사 헌책방이나 하나 차리고

멀뚱멀뚱 토요일의 난간에 기대어

낡디낡은 태엽에 감긴 시간을 풀어주기도 하며

후투티 둥지 안에 투숙할까

그런 계획이죠

― 김영찬, 「투투섬에 안 간 이유」 전문

 

 

포스트모던 사회는 가상이 지배하고 있다.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이미지들이 즐비한 이 세계는 더 이상 진지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가벼운 유희면 그만이다. 따라서 최대의 목적은 주이상스다. 만약에 삶-시간-세계가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 돼야 마땅하다. 사이버스페이스를 활보하는 다양한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현혹되어 가상을 실상으로 착각하는 혼효한 세상이 바로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이다. 그런데 시인 김영찬의 시「투투섬에 안 간 이유」는 미지의 이미지의 공간을 창조하여,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 간주하고 있다. “투투섬”이라는 가상의 공간과 지금은 부재한 “마리서사”라는 두개의 환상적 공간을 교묘하게 병치시키면서, 시인 김영찬은 상상력에 빠져들고 있다.

환상의 공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투투섬”인데, 그곳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다. 따라서 투투는 갈 수 없는 나라이다. 그래서 그 섬은 더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한데, 시인 김영찬은 환상과 실재 사이를 교묘한 어법으로 이접시키면서 일종의 말놀이를 감행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이 가벼움에 있듯이, 시인은 가벼운 이미지들을 시말로 안치시키면서 미지의 공간을 가본 것처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두개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인의 의식에 있다. 투투섬이 육체적 관능이 살아 숨 쉬는 향락의 공간이라면, 마리서사는 한국의 모더니즘의 문학의 산실인 시의 공간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공간도 아니고 시인이 만들어낸 환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향락의 공간인 “투투섬에 안 간 이유” 내부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투투섬에 안 간 이유」는 안 간 이유를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김영찬 시인은 투투섬과 마리서사라는 두개의 서사공간을 절묘하게 가로지르면서 섬에 안 간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환상의 공간과 이유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관계도 없다. 마치 카뮈의 부조리 문학처럼, 시인의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은 이유, “티켓”을 반환한 이유, 안 가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한 설명들은 “투투섬에 안 간 이유”가 되지 못한다. 시인의 이러한 의도적인 곡해는 이 세계가 인과필연의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이 실은 하나의 카오스 상태이거나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혼돈이나 미궁은 필연이다. 혼돈 위에 혼돈이 겹쳐지고, 우연의 연속으로 점철된 바로 그 공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다.

 

주말의 그녀가 헬스클럽

러닝머신에서 땀 흘리고 있을 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축제를 보고 있어

어둠 없는 밤이 거기 있지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사라진 도시에서

샴페인을 터트리지

시간도 어둠을 불러오지 못해

그냥 저 혼자 돌고

곳곳 어둠의 흔적마다 빛이 가득하지

 

저 엉덩이 큰 사람들

밤에도 잠들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 없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사막의 긴 건기,

물끄러미 축제를 바라보는

인디오 노파의 미소,

몇 겁의 공전에도 분리되지 않는

적도 어느 작은 도시의 가난을

 

모르지, 258만 킬로미터의 공전으로도

좀처럼 섞이지 않는

어둠과 빛의 관계를

― 문근식,「오로라가 없는 밤」전문

 

 

포스트모던 사회는 자본이라는 환상이 지배하는 즉물적인 공간이다. 모든 것은 자본의 기획 하에 계산가능성과 이용가능성으로 계량화되어 있다. 최대의 덕목은 더 많은 생산에 노동이 투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경이 소비에 집중된다. 이를테면 포스트모던 사회는 그야말로 소비의 사회이다. 그러므로 향유가 지상명제이다. 거기엔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다. 만약에 향유에 걸림돌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적으로 간주되거나 제거대상으로 지목된다. 축적과 소모의 변증법 혹은 테크노피아. 21세기는 상품을 매개로 유혹하고 유혹받는 가상적 이미지의 천국이다. 그런데 문근식 시인은 시 오로라가 없는 밤에서 향유로 점철된 자본주의의 초상 밑에 드리워진 그늘을 동시성의 시학을 예인하면서 자본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는 자본의 모순 위에서 피어난 하나의 괴물, 즉 리바이어턴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쪽에서는 화려한 “축제”가 펼쳐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근이 요동친다. 역시 모순이다. 어쩌면 시인 문근식 말한 것처럼, 쌍둥이 동생으로 표상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순 위에 핀 가장 화려한 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쌍둥이 동생이 지향하는 미적 이념은 이질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은 희망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지 않다. 신기하고 새로운 것만이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향유만이 지상과제이다. 키치, 혹은 가제트. 속물근성이 판을 친다. 물신도 판을 치고, 허영심도 판을 친다. 포스트모던의 미적 이념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다. 마치 “좀처럼 섞이지 않는/ 어둠과 빛의 관계”처럼, 모든 의미의 관계를 착종시켜 인간학 전체를 미궁에 빠트리게 된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사회의 징후 중 더 큰 문제가 또 하나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의 가상 밑에 가라앉은 계층화의 문제이다. 분명 문근식의 동시성의 시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미적 표현의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시인은 시적 표현 밑에 자본적 허상이 만든 모순의 지대를 시말로 형상화하면서 비판의 칼날을 드리우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세계화의 허구성을 여지없이 논파시키면서, 테크노피아를 하나의 가상적 실재로 용인하면서, 시인 문근식은 포스트모던적 기법으로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성을 적확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통쾌하다. 설령 자본의 힘이 불가능한 그 무엇인가를 가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마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상생의 기운으로 수렴시 키는 인간애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모’아니면 ‘도’인 상황에서

‘아니면’을 택했다

 

중도,

서울과 부산의 중도는

한반도이다

나와 내가 아닌 모든 것의

중도는 우주 밖이다

 

우주보다 크고

우주보다 늙었다

 

호스를 너무 꽉 잠그면 터지고

너무 느슨히 잠그면 물이 나가고

적당히 느슨히 잠그면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그 물방울들이 밤하늘의 별이 된다

― 아니면, 무명 시인, 「아니면」 전문

 

 

언어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일러 시라고 하고 시가 아니라 하는가. 아직 등단도 하지 않은 무명 시인의 「아니면」시를 읽으면서 내심 많이 놀랐고, 시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자유분방한 상상력 혹은 미래의 시말. 분명 이 미지의 시인은 한국의 미래시를 걸머질 시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 무명의 시인은 포스트의 포스트이다. 한국시단의 언어문법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 이 무명의 시인은 한국시단이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한 전무후무한 하나의 사건이다.

도대체 어찌 이러한 상상을 수 있는가. 아니 “‘모 아니면 도’인 상황에서/ ‘아니면’을 택”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대저 이 미완의 시인은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중도”다. 그런데 이 “중도”는 중도 아닌 곳으로 휘어져 절대의 절대성을 응시하게 되는데, 시말의 굴절 각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치를 이미 훨씬 넘어서 있다. 연과 연 사이는 단절되어 있어 불연속적이다. 이미지의 경로는 의미의 경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의 경로도 아니다. 이를테면 무명 시인의 시말운동은 말의 연쇄작용이 일으키는 말놀이가 아니라, 말의 불연속성에서 빚어지는 언어의 순결한 운동인데, 그것은 말의 순치과정이거나 말이 곧 하나의 세계를 정초하는 행위이다.

시「아니면」이 놀라운 점은 이것만 아니다. 무명 시인의 상상력이 가 닿는 지점은 획기적이기까지 한데, 그의 시말은 미래의 미래이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말의 운명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의 층위를 우주적 상상력으로 밀고나가 존재의 시원을 사유하게 만든다. 미시적 상상력과 거시적 상상력을 동시에 아무르면서 시인의 상상력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데, 그것이 무명 시인의 시적 마력이자, 그가 바로 포스트의 포스트에 위치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인의 시말운동이 건강하다는 사실이다. 요즘 유행하는 젊은이들의 시들이 자폐적이다 못해 퇴폐적이기까지 한데, 무명 시인의 시말은 하나의 “물방울”을 “밤하늘의 별”로 변성시키면서 삶 ― 시간 ― 세계를 긍정하는 미덕 또한 겸비하고 있다. 놀랍다. 그의 발전이 기대된다. “아니면.”

 

 

 

 

 

김석준

 

1999년『시와시학』시 , 2001년『시안』평론 등단

시집 : 『비평의 예술적 지평』, 『현대성과 시』외

평론집 : 『무덤 속의 시말』외

 

 

계간 『시와 표현』, 2011년 봄호(창간호) 기획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