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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를 보는 두 개의 시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1. 13. 23:04

현대사를 보는 두 개의 시선

                            김태훈 문화부 차장대우 scoop87@chosun.com 기자 2009.11.13 조선일보

 

소년 파이의 가족과 동물들을 태운 화물선이 인도를 떠나 캐나다로 가던 중 태평양에서 침몰한다. 파이는 기적적으로 구명보트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보트 반대편 끝에 앉아있는 호랑이를 발견한다. 2002년도 영국 부커상 수상작인 얀 마텔의 장편 '파이 이야기'는 소년 파이가 절망적 상황 아래서도 불굴의 용기를 발휘한 끝에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고 태평양 건너편 대륙에 닿기까지의 모험을 그린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이야기는 파이가 살아 돌아온 뒤 시작된다. 조난 227일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파이는 당국의 조사를 받는다. "무슨 일을 겪었느냐"는 물음에 파이는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날치와 만새기를 부지런히 잡아 나눠 먹었다"고 했다. 고통스러운 피로와 고독이 수시로 덮쳐 왔지만 생존을 위한 분투가 그를 무기력과 자포자기로부터 지켜냈다. 보트가 뭍에 도착한 순간, 호랑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조사관은 믿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파이는 다른 내용의 생환기를 만들어 들려줬다. 이야기는 끔찍했다. 파이는 세명의 생존자와 함께 보트에 올랐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요리사도 있었다. 파이와 요리사가 먼저 엄마를 잡아먹었다. 파이는 요리사도 잡아먹으며 버텼다고 했다. 이야기를 마친 소년은 물었다.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느냐"고. 2007년 2월 기자는 소설을 쓴 얀 마텔을 뉴욕에서 만나 "하나의 결말을 두개의 다른 이야기로 쓴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소설은 세상을 보는 두개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라고 대답했다.

파이의 모험과 소설에서 제시한 두 관점은 한국 현대사를 보는 우리 내부의 서로 다른 시선과 놀랍도록 겹친다. 조선은 현대사의 바다에서 일제의 태풍을 만나 침몰했다. 정신을 차리고 오른 대한민국이라는 구명보트에는 김일성 정권이라는 호랑이가 한 마리 타고 있다.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기 위한 목숨을 건 횡단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60년간의 항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의 기틀을 세웠고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을 가난의 질곡에서 구했으며, 전두환 대통령은 처음으로 단임(單任)을 실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야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청산했다. 그 사이 한국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우리가 아는 이 역사를 세계는 "믿기 힘든 기적의 역사"라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는 건국 세력이 주도해 이룩한 현대사를 '보수에 의해 자행된 부패와 오욕의 역사'로 보는 시각이 엄존한다. 그 이면에는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친일이나 부패와 동격으로 보는 부정적 견해가 자리 잡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빚어지는 우리 사회의 갈등도 현대사를 보는 시각차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소설가 장정일씨가 10년의 침묵을 깨고 최근 발표한 장편 '구월의 이틀'은 대학 새내기 '은'이 우익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장정일씨는 우익 대학생 이야기를 쓴 이유를 묻자 "지난 20년간 한국 소설은 좌익 청년의 탄생과 성장기만 썼다"고 지적했다. '은'은 우익의 길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배의 바닥 짐 같은 사람이나 가치를 좋아해. 바닥 짐을 싣지 않으면 강한 바람이나 큰 파도에 휩쓸려 난파할 우려가 커. 바닥 짐이 없으면 배가 침몰하는 것처럼, 보수가 없으면 국가나 사회도 뒤집어져." 작가는 '은'을 '자긍심에 찬, 젊고 순수한 우익'이라고 설명했다. 문학은 늘 현실을 향해 안테나를 세우고 시대에 앞서 사회의 변화를 읽어 왔다. 그렇다면 외눈박이 눈으로 한국 현대사를 보는 시각에 변화를 보게 될 날은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