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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문학의 향방과 문제점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0. 16. 23:32

디지털 문학의 향방과 문제점들

 

나 호 열

 

 

 

 디지털 문학에 대한 관심은 이제 학문적 성과물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필자의 과문에도 불구하고 디지털과 문학에 관련된 연구 성과는 적지 않은 듯 보인다. 1998년 민음사에서 간행된 『문학의 새로운 견해』제 3부에 수록된 정과리의 「컴퓨터와 문학」,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9년)제 8장 「문학 언어의 미래」에 수록된, 정과리, 최윤, 이성복, 송경아의 글들, 이선이 편 『사이버 문학론』 (월인,2001년), 김종회, 최혜실편, 『사이버 문학의 이해』(집문당,2001년) 등은 문명사적 사건으로 정의될 법한 디지털 시대의 문학적 반응을 정리하는 발빠른 연구 내용으로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들어서는 『문화통합의 시대와 문학』 (김종회, 문학수첩 2004)에서는 사이버 문학의 시대적 성격과 세계관이 하나의 시론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계간 『리토피아』에서는 2004년 가을호 특집으로 '디지털 담론의 허와 실, 남겨진 문제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어 그 의의가 새롭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 기관에서도 문화 콘텐츠 사업에 관심을 가진 결과로 '새 천년 예술' 하이퍼 시 사이트(언어의 새벽) 프로젝트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시인 100명이 참여하였으며 시각적인 요소와 청각적인 요소의 통합에 의한 통합매체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http://eos. mct.go.kr 참조) 그 주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영상 음향을 주된 매질로 하고 감각적 반응을 최대 한도로 단축하는 하이퍼텍스트를 순수한 문자 언어로만 구성하여 감각적 반응시간을 가능한 한 지연시키고 그 사이에 사유와 상상이 개입될 여백을 열어 놓음으로써, 문자 언어 특히 문학의 고유한 활동인 반성적 활동을 하이퍼텍스트에 심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구적이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는 아직 문학계 전반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며 오히려 문학의 위기를 조장하는 반문학적 행위로 오해받는 실정에 처해 있다. 다양한 현실 인식과 작법이 춘추전국 시대처럼 할거하는 상황에서 사실 디지털 문학이라는 개념조차도 여러 갈래로 흩어져 쓰여지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디지털은 하나의 기술이다. 정보, 자료의 대용량 축적과 빠른 전송, 정보 가공능력의 편이성 등이 컴퓨터에 내장되고 개인용 컴퓨터들이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에 연결됨으로써 현실과 동등한 자격이 부여되는 사이버 스페이스 즉 가상공간이 또 하나의 자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문학이 때로는 인터넷 문학, 컴퓨터 문학, 사이버 문학으로 불리우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초기의 컴퓨터 문학은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접속통로를 통해서 동호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타인들과 공유하고 열람하는 수준이었다. 잡지, 또는 인쇄를 통한 개인 발간물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던 작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게제되고 네트워크화 됨으로써 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바가 컸으며- 문학의 대중화가 가능한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카페문학이라 불리워지는 인터넷 문학 동호회는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컴퓨터 문학은 문학을 전공하는 학자, 작가가 중심이 되는 전문가 집단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홈페이지를 구축하거나 웹진webzine을 창간하는 일이었다. 웹진은 한 마디로 종이형태의 잡지에서 탈피하여 인터넷 통신망을 통해 정보를 제공한다. 종이 잡지가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다면, 웹진은 문자와 그림, 음악, 동영상 등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작 환경에 따라서 실시간으로 중계가 가능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은 문학의 큰 카테고리 안에서 디지털 기술과 문학이 융합되는 형태로 디지털 기술에서 파생되는 영상과 음향의 조합이 문자의 기능을 대신하거나 하이퍼텍스트 문학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발전된 디지털 기술은 독자와 작가의 경계를 허물고 한 작품의 제작이나 감상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고 작품 해석의 다양성을 한껏 제고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정과리가 주도한 '언어의 새벽' 프로젝트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근간으로 하는 문학의 변모를 예감한 - 그것이 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 바, 성공이라고 자평 하던, 아니면 문학의 성역을 넘어선 것으로 비난 받던 간에 - 첫 번째 시도로 되새김할 만한 것이다.

 

 

 어찌 되었던 많은 작가들은 컴퓨터를 매개로 하는 작품활동에 석연치 않은 눈길을 보낸다. 정과리가 '문화의 크메르루지즘'이라 명명한바 대로 작가는 익명의 공간에서 독자들에게 난도질당할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이건 아니건, 글을 평할 자격이 있던 없던 간에 익명의 독자들은 작가들을 향해서, 작가들이 생산한 작품에 대해서 융단 폭격을 가할 수 있다. 욕설과 야유는 독자라는 익명성에 가리워지고, 작가는 인터넷이라는 킬링필드에 발가벗겨진 채로 내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한동안 유행처럼 번졌던 작가들의 개인 홈페이지는 자진 폐쇄되거나 버려지는 상황에 처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의 신상정보가 자신도 모르게 유출되거나 노출되어 사생활의 보호가 난감해 진다는 점이다. 혈액형이나 취미 심지어 주량까지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구름처럼 떠다니고 있는 한, 우리는 존재의 복제성에 불안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머뭇거리고 주저할 때에도 디지털시대는 질풍노도처럼 진화해 가고 있다. 작가의 사명이 한 시대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는 것에 있다면 새로운 문명의 양상과 그에 따르는 인간성의 변모는 마땅히 작가의 '정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화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는 문학의 입장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다.

 

 

 영화나 텔레비젼, 디지털 동영상 등의 출현과 더불어, 시각적 매체의 영역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던 문자는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수요와 경쟁하는 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각종 전자 매체들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영상 이미지들은, 특히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거의 자연과 다름없는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삶의 양상을 폭넓게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문자문화의 위기를 불러오는 이미지들의 위력은 아마도 그것이 문자와는 다른 코드로 우리의 삶 속에 수용되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영상 매체가 화면을 통해 제공하는 이미지들은 기본적으로 인식의 차원보다는 감각의 차원에 더 깊숙이 관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은 백인덕이 「디지털 담론의 문학적 수용의 성과와 문제점」 (리토피아 2004년 가을호)에서 디지털 매체에 비교적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례로 든 박혜경의 글( 「문학, 유령의 삶」, 문학사회 2000년 가을호)이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은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문자의 위의에 크게 기대고 있으며 그만큼 디지털에 대한 반감 내지는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디지털 문명의 도래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이며, 그에 따르는 생활방식과 문화의 변모가 뒤따를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조금 더 디지털에 대한 관심을 문학 쪽으로 끌어 안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방향 전환을 조견해 볼 수 있겠다.

 

 

다채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문화의 생산은, 이제 활자 문명을 과거로 패주시키며, '비트' 라는 새로운 전자 언어에의 관심을 증대시켰다. 문학의 일체적 매체였던 책은 인쇄문화의 종언을 고하는 은유임과 동시에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은유가 되었으며, 언제든지 정보를 예치하고 인출할 수 있는 '데이터 뱅크'의 관념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관심을 책이라는 것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다양한 매체들로 돌아가게 한다

 

 

 문예중앙 1999년 겨울호에 게제된 허혜정의 「현대시와 뉴미디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디지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문학의 미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작가의 죽음' 또는 '문학의 위기'가 거론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디지털이라는 매개물이 그러한 현상을 더욱 급격히 촉발시키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활자 매체의 급속한 몰락과 그에 비례하여 부각되고 있는 영상 매체의 발흥이 대량광고와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문학의 영토' 그 자체가 잠식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디지털 담론'은 일부 현학적이고 모험적인 이론가나 작가들에게 할당된 권리나 의무만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활동은, 특히 예술은 역사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다. 거듭 말하거니와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환상보다는 걱정과 우려가 앞서고 있는 이 상황은 눈을 가렸다고 피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백인덕이 주장하는 바대로 '무엇보다도 매체가 중요하다'는 논리와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이 우선한다는 두 논리에서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작가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 담론은 단지 문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 생활적이고 전 문화적인 것이다. 증기기관의 발명이 산업혁명을 가속화시키고 자본주의 팽창을 가져왔듯이 오늘날의 디지털의 발전이 어떤 방향으로 인류와 인류의 정신을 끌고 갈 지 예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위가 있으면 후위도 필요하다. '디지털 담론'의 선두에 선 작가들이 계몽의 기치로 작가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끝까지 문자의 생명력에 문학의 가치를 걸고 투쟁하는 작가들이 구현하는 세계가 종국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유토피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디지털을 문학의 한 매체로 활용하는 태도도, 매체를 넘어서서 디지털 그 자체가 문학을 새롭게 규정하는 혁명적 발상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작가들의 숙명이다.

 

 

 작가들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분석하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예언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질풍노도의 디지털 시대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엄숙히 받아들이는 태도, 더 나아가서 또 하나의 자연으로 자리잡은 사이버 스페이스를 제어하는 생태철학에 대한 문학적 접근 등의 방향 모색도 건강한 작가 정신을 고양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발표문예지 : 예술세계 2004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