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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 논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5. 10. 13:29

순수문학 논쟁
- 1960년대 순수․참여 논쟁 중심으로



김경희


Ⅰ. 서론
시대에 따라 순수문학의 논쟁 양상이 다르듯 순수문학에서의 이 ‘순수’의 개념도 조금씩 다르게 인식된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우리가 순수문학이라 함은 문학의 계몽성, 목적의식 등을 배격하고 문학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순수’라는 용어는 30년대 후반 순수․참여 논쟁이 장을 열면서 핵심어로 떠오르게 된다. 30년대 후반, 기성 평론가 유진오는 <순수에의 지향> 유진오, <순수에의 지향> (《문장》5호, 1939.6 ) - “나는 일개 문인으로서 문학에 있어서의 ‘순수’라는 것을 생각하기 요새보다 더 절실한 적이 없다. 순수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비문학적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 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열한 태도를 두고 말함이다.”
이란 제목의 글에서 ‘순수’ 개념을 들먹이며 인간성 옹호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자체의 발전을 도모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함과 동시에 신세대를 비판한다. 이에 신진 작가 김동리가 발끈하여 <순수이의(異議)>(《문장》, 1939, 8)를 통해 구세대에 비해 신세대가 훨씬 순수하다고 강조하며 되려 구세대를 비판한다. 이 순수․세대 논쟁 임헌영, 홍정선『한국 근대 비평사의 쟁점』
은 전단계에 있었던 휴머니즘의 연장선상으로 일단락되고 결국 신․구세대간의 감정적 대립으로 그치고 만다.
광복 후 좌우익 논쟁으로 다시 촉발된 순수문학 논쟁은 김동리가 <순수문학의 진의> 김동리, <순수문학의 진의>(《서울신문》,1947. 9. 15) 에서 그는 순수문학의 진위가 ‘민족단위의 휴머니즘’이라며 문학 정신의 본령은 인간성 옹호에 있고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이 바로 민족 문학이기 때문에 민족 문학은 순수문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를 발표하고 이에 김병규가 <‘순수’문제와 휴머니즘> (《신천지》, 1948. 1)을 통해 김동리의 순수론을 공박하는 것으로 연계된 후 일단락되었다.
그 후 50년대 말 이어령은 “지난 작가들은 ‘문학인으로서의 책임’을 이룩하지 못한 채 사소설의 ‘안방’ 속에 칩거한다” 이어령, <작가의 현실 참여>(《문학평론》, 1959. 1)
며 작가의 현실 참여를 강조하고, 유종호 역시 “비순수의 선언” 유종호, <비순수의 선언>(《사상계》, 1960. 3)
을 내세우며 60년대 대두될 순수․참여 논쟁의 문을 살며시 두드리고 있다.
순수문학 논쟁은 시기별로 각각의 의의가 있다가 볼 수 있지만 본고는 1960년대 논쟁사에서 전반적으로 대립되었던 순수․참여 논쟁을 초반, 중반, 후반에 걸쳐 중점적으로 살펴보겠다. 이는 지면의 제약을 핑계로 하여,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순수문학 논쟁에 큰 의의를 두었고, 아울러 문학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제기에서 1960년대 순수․참여 문학 논쟁을 다루고자 함이다.

Ⅱ. 1960년대 문학에 끼친 시대적 배경
한국전쟁 이후의 경제성장은 독점자본의 성장, 중소기업 몰락, 농업 정체 등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켰다. 이로 인한 불평등은 국민적 통합과 일체감을 파괴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가 자유당의 엄청난 부정으로 끝나자 이를 계기로 전 국민이 분노했고, 특히 대학생들의 부정선거규탄 시위로 이어지면서 4월 혁명은 승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4․19 혁명은 자유민주주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국민 주권의 위력을 확인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또한 진보적인 학생들은 남북의 긴장관계를 철폐하는 민족통일론을 제기하는 등 광범위하게 통일운동을 벌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보수적 지배세력이 마침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들은 군사 혁명위원회의 명희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 출판, 보도의 검열을 실시했다.
위와 같이 60년대는 4․19와 5․16이라는 이질적인 사건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문학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비록 5․16의 쿠데타로 막을 내렸지만 4․19 혁명의 의미는 민중의 입장에서 시민 의식을 제기한 것이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 백낙청, 「4․ 19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성」, 『창작과 비평』(1980. 여름호)
이 아닌 희망의 혁명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시민의식이 60년대 문학의 사회성을 강화시켰고 다양한 논쟁을 야기하는 근간이 되었다.
또한 ‘4․19세대’로 불리는 60년대에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일군의 작가 및 비평가들은 앞 세대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성장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이른바 전후 세대들이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자라나, 해방 이후에 다시 우리 문학을 읽고 쓰게 된 것과는 달리 이들은 오로지 ‘한글로만 사유하고 한글로만 쓰는’ 최초의 세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문학의 언어에 대한 관심, 즉 ‘문학은 언어로 된 미학적 구조물’이라는 인식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한수영, 「1960년대 비평의 전개 양상과 논점들」, 『한국 현대 문학사』, 집문당, 727면 참조.

60년대 순수․참여문학 논쟁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거시적으로 지배했으므로 쟁점화되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당대 비평계의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Ⅲ. 순수․참여문학 논쟁
1. 60년대 전반기의 논쟁
김우종이 <破産의 순수문학> 김우종, <破産의 순수문학>(《동아일보》, 1963. 8. 7)
이란 글을 게재함으로 60년대 순수․참여문학 논쟁에 불을 붙인다. ‘새로운 문학을 위한 문단에 보내는 백서’라는 부제를 단 이 글에서 그는 6․25 전쟁으로 인해 상처와 고통을 받은 주민들을 위해 문학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순수’에의 파격적 결별을 선언한다. 뒤이어 게재한 <유적지의 인간과 그 문학>에서도 그는 다소 감정적으로 의견을 피력한다.

확실히 한국은 문둥이만 방목하는 섬처럼, 혼자만이 멀리 떠밀려 나가 있는 유적지다. 그리고 이곳의 천형수(天刑囚)들은 핵실험으로 희생된 채 비키니의 짐승들처럼 전화의 상처로 신음해 왔으며, 또 굶주림 때문에 모든 인간적인 체면까지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날 한국의 작가들, 누구보다 먼저 그 슬픔을 통감하고 그 연대적 책임 의식으로 고민하고 있는 작가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그러한 호소 작전이 아니다. (…) 그러므로 이제는 그러한 문학은 청산해 버려야 한다. ‘순수’라는 애매한 이름 아래 고수되어 온 그러한 문학- 우리는 이젠 이 30년 전통의 문학 방법론에 대하여 아낌없이 수정을 가하고 결별을 고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방법론 위에서 우리의 문학을 수립해 나가야 한다. 김우종, <유적지의 인간과 그 문학>, 《현대문학》, 1963. 11


김우종은 이 글에서 당시 우리나라가 지닌 어두운 현실을 지적하고, 그런 문제점의 해결을 위해 순수문학을 청산하고 새로운 문학을 수립해 나가야 함을 밝힌다. 김우종이 ‘유적지’로 지적하고 있는 작품들은 오영수의 『안나의 유서』, 손창섭의『포말의 의지』, 이범선의『오발탄』, 강신재의『임진강의 민들래』, 전광용의『꺼삐딴 리』, 선우휘의『도박』, 장용학의『원형의 전설』, 정한숙의『끊어진 다리』등이고, 문제점의 해결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카뮤의『페스트』, 앙드레 말로의『정복자』, 헤밍웨이의『바다와 노인』, 펄 벅의『해일』등을 들고 있다.

이에 김병걸, 김진만이 합세해 김병걸은 <순수와의 결별>(《현대문학》, 1963.10)에서, 김진만은 <보다 실속 있는 비평을 위하여>(《사상계》, 1963. 11.)에서 김우종과 같은 맥락으로 참여문학을 지지했다.
참여문학론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이형기는 순수 옹호를 내걸고 반박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즉, 참여론자들이 순수문학을 현실 도피의 문학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순수문학을 이론화했던 김동리의 글은 그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정치와의 절연이 아니라 단지 정치주의를 반대하는 문학이라고 그의 입장을 제시한다.

나의 경우라면 문학을 통해 전달해 줄 수 있는 것도 인생 도로(徒勞)의 허망함을 달래주는 여러 가지 장난감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문학이라는 이름의 오락이- 왜냐하면 그 오락은 이 절망적이 역사의 와중에서, 어떠한 불행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그 무엇, 이름지어 생명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불어넣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능으로써 생명감을 중시하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주의’를 배격하며, 또 스스로 옹호해야 할 가치로서 ‘인간성’을 내세우게 되고 그리하여 객관적으로는 ‘본령정계(本領正系)의 문학’이라는 이름을 지어 받을 수 있다. 이형기, <문학의 기능에 대한 반성- 순수 옹호의 노트>(《현대문학》, 1964. 2)


이에 뒤이어 다시 김우종은 반기를 든다. 현실 참여론은 도구 문학과 전혀 다르며 특히 좌익 문학과 현실 참여론을 혼돈해서는 곤란하다고 입장을 내세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절망적인 현실의 “문제의 제시에만 그치지 말고 스스로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절망의 영토 위에 도표를 박아 놓는 문학” 김우종, <저 땅 위에 道標를 세우라>(《현대문학》, 1964. 5)
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김우종과 이형기의 논쟁이 벌어지던 비슷한 시기에 서정주와 홍사중도 순수․참여논쟁을 벌인다. 60년대 와서 참여론 주장의 목소리가 커지자 서정주는 참여문학에 대한 경향에 대해 “어쩐지 안심치 않다”, “지금도 문학인은 왕년의 순수파 작가 시인들의 노작 태도를 배워 묵묵히 정진할 때” 서정주,<사회 참여와 순수 개념>(《세대》, 1963. 10)
라고 주장하며 순수문학 옹호와 참여문학 반대 뜻을 넌지시 내비친다.
이에 홍사중은 <작가와 현실- 서정주 씨의 글을 읽고>(《한양》, 1964. 4)에서 서정주가 강조한 ‘순수에의 지향’이 30년대에 “세찬 물결로 문단을 휩쓸게 된 것은 비단 마르크시즘에의 저항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적인 정책에 의하여 더욱 더 어두워져만 가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현상”이 아니었느냐 반론하고 참여론의 현실 개념이 정치적인 것으로만 오해되어서는 안 되며 현실 속의 인간, 현실 속의 작가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해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60년대 초반 벌어진 순수․참여 논쟁은 문학의 현실에 대한 참여를 집중시키고 순수와 참여의 원근적 의미를 확인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2. 60년대 중반기의 논쟁.
1965년 10월 《사상계》가 주관한 ‘문학과 현실’이라는 심포지엄(symposium)은 순수와 참여의 갈등 양상을 부각시킨다.
앞서 살펴본 바 있는 순수론자 이형기는 <작가의 성실성>이라는 글에서 그는 문학이 현실에서 유리될 수 없지만, 현실은 결코 우상화될 수 없으며, 다양한 견해로 파악되는 다양한 현실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문학은 목적을 가질 수 있지만, 목적이 문학의 전부일 수는 없다며 참여론자들의 목적론적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조동일은 <순수 문학의 한계와 참여>(『사상계』, 1965. 10)에서 “순수문학이란 작가가 우선 자기 현실에 대해서 외면하는 태도”라고 지적하고, “문학은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되는 초월적 존재라는 변호는, 작가는 어떠한 불만이 있어도 침묵을 지켜야만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 한계점을 비판한다.
또한 백낙청도 조동일과 같이 문학인의 사회 참여 문제를 거론하며 등장한다. 백낙청은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창작과 비평》창간호, 1966 겨울)에서 ‘문학의 순수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서구의 경우 “역사적으로 보아 순수 정신 및 순수 예술의 이념은 프랑스 대혁명 이래 득세한 유럽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일환이며 플로베르식의 염세적 순수주의는 그 퇴폐적 단계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예술가의 초연성 내지 현실 부정의 태도가 얼마나 철저히 그 시대 지배 계급의 이념에 물들어 있으며 결국 지배 계급의 오락과 실리에 이바지하는 태도인가”는 분명하다고 단언한다.
반면 서구와 다른 사회 경제적 전개 과정을 거친 우리의 경우 “권위주의와 비생산성 그리고 매사에 아마추어 정신을 생명으로 하는” 이조 양반층의 생활 태도가 순수주의의 근저에 깔려 있다면서 순수론을 비판한다. 또 ‘참여 문학’론을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처럼, 사르트르가 문학을 소박한 공리성으로만 파악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는 “인간의 현실과 미래상에 대한 그 나름의 종합적 안목”으로 문학을 파악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어서 그는 “인간의 가치와 문학적 가치의 불가분성” 때문에 순수주의를 비판하는 작가나 사상가들이 문학 본연의 가치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며, “문학의 이월 가치와 창작 활동의 자율성- 다시 말해 문학의 진정한 순수성을 긍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어떻게 문학 본연의 사회적 기능을 밝힐 수 있는가를 모색한다.
한 편, 최인훈은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듯하면서도 참여문학 쪽으로 의견을 내세운다.

문학의 매제(媒材)인 언어는 사물이 아니며 공동체의 사고형(思考型)과 정서에 의해 조직된 ‘관념’이다. 문학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작가의 의식과 언어와의 싸움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작가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현실)에 대하여 비평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작가의 자유가 현실에 부딪쳐서 일어나는 섬광이며 작가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언어 속에서의 싸움이다.
- 최인훈, <문학 활동은 현실 비판이다>

문학의 매재 때문에 현실적이어야 하면서도 예술이기 위해서는 현실을 자유롭게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문학에서 작가 의식과 언어와의 싸움의 형식을 통한 현실 비평적 기능을 강조한 것은 어느 정도 포괄적인 중립의 입장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으나 엄연히 그의 주장은 참여문학 쪽으로 그 성격을 내비친다.
이로써 1960년대 중반의 담론은 문학의 형식적 측면이나 사회 참여 과정에서의 언어의 기능, 혹은 문학의 사회 기능에 대한 나름의 진일보한 논의들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60년대 후반의 논쟁
60년대 후반 순수․참여 논쟁은 김붕구의 <작가와 사회> 1967년 10월 22일 메트로 호텔에서 열린 ‘세계 문화 자유 회의 한국 본부’가 주최한 토론에서 김붕구가 발표한 이 글은 “작가의 사회적 기능, 작가와 사회의 상호 관계를 비롯하여 작가의 사회에 대한 태도 혹은 사회상, 우리 사회에서도 유행되고 있는 작가의 사회 참여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중도의 입장에서 참여 문학론을 비판한다. 이 세미나에 참가한 비평가는 김붕구, 선우희, 임중빈, 홍사중, 김승록, 서가원, 남정현, 이근삼 등이다.
라는 글로 주제 발표를 함과 동시에 열띤 논쟁이 이어진다.

작가가 무엇보다도 ‘사회적 자아’를 앞세우고 강조함이 작가로서의 특권 또는 그의 명예가 되는 것일까? ‘사회적 자아’는 한 생활인으로서 다른 모든 시민과 공유하는 영역에 속하며 창조적 자아야 말로 일개 생활인을 작가로 만들어 주는 본질임이 자명한 일이다. 이렇듯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유행 사조를 좇아 사회적 자아를 앞세우고(주로 ‘사회 참여’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아무리 그럴싸한 이론을 주장하거나(작가측), 또는 제시, 강요(비평가측)한다 하더라도 항구적인 힘(가치)을 지닌 작품이 빚어질 리도 만무하다. (…) 따라서 ‘사회적 자아’가 얼마나 강렬하게 사회를 투시하고 또는 이와 대결하는가 하는 그 강도는 곧 ‘창조적 자아’를 거쳐 작품 속에 침투되지 않을 수 없다. 김붕구, <작가와 사회>, 《세대》, 1967. 11


이 글에서 김붕구는 작가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것은 성격(기질), 환경, 자아로 구분하며 성격과 환경은 고정되어 있고 이 자아가 사회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문학가 혹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가 결정된다고 한다.
우선, 작가의 자아를 사회적 자아와 창조적 자아로 나누어 두 자아 사이의 관계 양상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회적 자아가 창조적 자아를 압도하면 사르트르처럼 제대로 작품을 쓰지 못하게 된다며 비난하고, 지이드나 카뮤의 경우는 사회적 자아와 창조적 자아를 명백히 구분하고 한 시민으로서 사회적 자아의 자연발생적 참여만을 실천하고 있으며, 말로나 생텍쥐페리는 직접 행동의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자아가 거의 예술지상주의에 가까운 창조적 자아를 거쳐 작품 속에 스며든다고 이들의 작품을 극찬한다. 또한 작가가 이론화된 앙가주망이나 참여 문학을 표방하면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데올로기에 귀착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란 사물과 분리된 자율적인 기호인 언어가 논리적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하나의 기구일 뿐이라 정의하고 사물 그 자체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작가가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표명한다. 또한 지식인의 사회적 기능은 한 시대에 대한 이론적 정립과 정당한 사회 비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의 지식인은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붕구의 이러한 발표 후 가장 강력하게 대응한 임중빈은 <반사회참여의 모순>(『대한일보』1967. 10 17)에서 김붕구가 “사회적 자아와 창조적 자아를 별개의 것으로 간파하고 두 자아의 갈등에 있어서 사회적 자아를 전혀 도외시하기에 급급”했고, “생텍쥐페리류의 시적 행동이나 카뮈류의 추상의 도덕률이 모순과 갈등에 가득 찬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변혁시킬 수”있느냐고 반문한다.
또 참여 문학이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데올로기로 귀착될 것이라는 김붕구의 의견에 대해 그것은 “창조적 참여의 근거는 산 ‘민중적 자아’ 곧 ‘우리로서의 나’의 진지한 확립에 있다. 한국 문학에서 사회 구조에의 깊은 통찰과 폭 넓은 인간 파악, 그리고 시대에 대한 책임이 없이는 인간 상실의 끝없는 언어 유희에 그칠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바로 뒤이어 선우휘는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조선일보』1967. 10 19)를 발표해 김붕구의 의견에 공감하고, 임중빈을 비판하며 순수문학론을 펼친다.
이에 질세라 임중빈은 <한국 문단의 현황과 그 장래>(『현대문학』, 1968. 1)에서 지난 번 열린 원탁 토론 세미나에서의 참여 개념은 극도로 혼란된 것으로 순수문학의 집념을 확인하는 데 불과했으며 김붕구가 창조적 자아를 강조하는 것은 작가가 현실을 적당히 외면해도 그만이라는 포석 아래 사회 참여를 은폐하는 현장 부재의 일관된 논조였다고 비판하다. 김혜니, 『한국근현대 비평문학사연구』월인, 2003.


김붕구의 논의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비평가는 백철, 조연현, 선우휘, 김양수, 원형갑 등이었고, 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비평가로는 임헌영, 임중빈, 이호철, 백낙청, 최일수. 김병걸 등이 있고 비교적 절충적인 입장을 보인 사람은 김현, 정명환 등이다.
김현은 <참여와 문화의 고고학>을 통해 문제 설정을 제대로 해야 함을 주장한다.

나로서는 참여라는 말은 우리 시대의 이 혼란된 양상의 根本的 構造를 밝히는 考古學的 努力으로 바뀌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무화의 고고학, 우리의 발상법은 무엇이며, 그것은 서구의 발상법과 어떤 연관 아래 묶여져 있는가를 탐색하는 길만이 金鵬九씨의 <작가와 사회>라는 것에 대한 가장 올바른 반박과 이해가 될 것이다.
김현, <참여와 문화의 고고학>

김붕구에 대한 반론이 논의에서 조금도 진전되지 않고 되풀이되기만 한다고 본 김현은 자신의 논점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선험적 성격에 의해서 작가가 형성되는가와 관련된 작가 심리학의 문제, 다음으로 사회적 자아와 창조적 자아의 구분이 서구 시민 사회를 바탕으로 추출한 논리라면 서구와는 달리 일종의 닫힌 사회인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한가 하는 문제, 마지막으로 언어와 표징과의 거리가 있는 언어가, 언어와 표징이라는 이원론적 구조를 갖지 못하고 거의 주술적인 의미만을 띤 언어 속에 직수입될 때는 어떻게 되는가하는 문학적 언어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그리하여 김현이 내세운 해결방안은 “참여라는 말은 우리 시대의 이 혼란된 양상의 근본적 구조를 밝히는 고고학적 노력으로” 바뀌어야 하며, “우리 문화의 고고학, 우리의 발상법은 무엇이며, 그것은 서구의 어떤 연관 아래 묶여져 있는가를 탐색하는 길”이 라고 제시한다.
김붕구의 발표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60년대 후반의 논쟁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산발적인 논의를 펼친 데 반해 김현은 문화 현상의 근본을 밝히자는 고고학을 주장하여 문제 제기의 새로움을 제시하고 있다.
60년대 후반 순수․참여 논쟁의 또 다른 쟁점은 바로 김수영과 이어령 둘 사이에 벌어진 ‘불온시(不穩詩)’ 논쟁이다. 이 논쟁은 1968년 초에 《조선일보》지면을 통해 전개 되었다.
먼저 이어령이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를 발표하게 되면서 이 논쟁이 시작된다.

‘에비’란 말은 유아 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있다. 즉 ‘에비’란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다. 이것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는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금제(禁制이)의 힘을 총칭한다. 이어령, 「<에비>가 지배하는 文化- 한국 문화의 반문화성」(『조선일보』, 1967. 12. 28)


이어령의 글에 따르면, ‘에비’라는 용어는 일종의 유아 언어이다. 이것은 구체적 대상이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며,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을 총칭한다. 그런데 이어령은 당시의 문화계는 있지도 않은 에비에 눌려 예언자적 기능으로서의 창조력이 극도로 위축된 시기라고 진단한다. 이어서 그는 구체적으로 “오늘날 정치 권력이 점차 문화의 독자적 기능과 그 차원을 침해하는 경향이 있다 할지라도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들의 소심증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상업주의 문화, 반문화적․반지성적인 것들이 도리어 문화적․지성적이라는 퇴행 형상을 극복하고 “치졸한 유아 언어의‘에비’라는 상상적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여 이어령은 당시 문화의 위축과 퇴행 현상의 원인을 문화인들의 소심증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김용락, 「문학의 현실 참여와 정치적 자유」,『민족문학 논쟁사 연구』, 실천문학사, 98-97쪽 참조.

이에 대해 김수영이 「지식인의 사회참여」(『사상계』, 1968. 1)로 반론을 제기한다.

이 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물론 우리 나라의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더 큰 원인으로 근대화해 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 작업을 이 글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과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의 소심증과 무능에서보다도 유상무상의 정치 권력의 탄압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본다. 김수영, 「지식인의 사회 참여」,『사상계』, 1967. 1


김수영은 이어령이 현실 정치와 자본주의의 전개를 지나치게 과소 평가하고 있다고 못박고, “오늘날의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의 소심증과 무능에서보다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정치 권력의 탄압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반박한다. 또한 김수영은 최근에 써놓기만 하고 발표를 못하고 있는 자신의 작품이나 신춘문예 응모 작품 속에 끼여있는 ‘불온한’ 시들이 거리낌 없이 방출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현대 사회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다시 이어령은 「누가 그 조종(弔種)을 울리는가」(『조선일보』1968. 2. 20 )을 통해 문화의 위기는 외부로부터 받는 위협과 구속력보다는 자체 내의 창조력 고갈에서 오는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한다.
곧이어 또 이어령은 「서랍 속에 든 불온시를 분석한다」(『사상계』, 1968. 3)를 발표하고 이 글에서 시가 아무리 독립 운동에 참가해도 시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며 참여시를 도구주의로 보고 이를 경계한다. 또한 사회적 현실의 효용성을 추구하려다 문학예술을 이데올로기에 팔아넘기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논쟁은 「참여 논쟁의 결산」(『조선일보』)이라는 제목 하에 마감되고 김수영은 불의의 교통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이 둘의 논쟁은 문학의 순수․참여를 넘어 당시의 문학이나 문화에 대한 실질적인 억압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작가는 정치적 억압에 대항해야 하는가 하는 정치권력과 문학적 자유의 함수관계 김용락, 「0960년대 민족문학론」,『민족문학 논쟁사 연구』, 실천문학사, 1997, 100면
를 쟁점화한 것이다.

Ⅳ. 결론
이상으로 60년대의 순수․참여문학 논쟁을 초반․중반․후반으로 나눠서 살펴보았다. ‘순수’라는 용어는 그 이름부터가 너무나 순수(純粹)하여 한국 논쟁사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30년대는 순수․세대 논쟁으로, 해방 후에는 좌우익 논쟁으로, 50년대 후반 60년대에 들어서는 문예 미학적 성격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던 것이 60년대 와서 ‘순수․참여’라는 타이틀로 격렬한 논쟁이 펼쳐진 것이다.
60년대 순수․참여 논쟁은 그 전에 행해지던 논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도 볼 수 있고 그 자체만으로도 특수성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60년대 전반적으로 행해지던 이 논쟁이 더욱 의의를 갖는 것은 그 후에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 그리고 민중문학론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참여문학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이러한 문학론을 제시해 계승해 나가고 반면, 순수문학을 주장하던 이들이 다시 반리얼리즘문학, 반민중적문학으로 그 의견을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논쟁에는 눈에 띄는 한계점도 더러 보인다.
본래 ‘논쟁’의 속성이 그러하듯 심정적 혹은 감정적 발언이 많아 객관성을 잃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보이고, 문학을 ‘순수와 참여’라 하여 양분화하는 이분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문제의 핵심에서 다소 벗어나는 논쟁도 없지 않았다. 문학을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순수문학, 참여문학, 민족문학 등등으로 나뉘어 수식어도 아닌, 그렇다고 고유명사도 될 수 없는 이러한 명칭들이 거론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바이다.
또한 참여문학의 가장 큰 결점은 현실 대응 방안을 텍스트에 제시한다는 데 있다. 이는 문학 본연의 모습을 잃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들에게 현실 문제에 대한 인식 능력을 더 떨어뜨려 참여 문학의 본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는, 문학이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예술의 경지, 인간성 옹호 등을 운운하자는 게 절대 아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한 번 쯤, 아니 백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어쩌면 영원히 풀 수 없는 큰 숙제로 남아 우리 모두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또한 작가주의가 아닌 작품 위주로 문학을 평가하고 고찰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면 더 폭넓은 문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족(蛇足)을 붙이면서 본고의 연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