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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꿈, 인간만이 길을 만든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18. 01:55

장자의 꿈, 인간만이 길을 만든다


――소고(小考) 나호열론

                                                   조 영 미1)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적인 삶은,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우리는 곧잘 ‘영원(永遠)’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믿음과 변하지 않는 사랑을 약속하고, 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변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하지만, 기실 그것은 변화를 전제로 한 지속적인 상태일 뿐이다. 어떤 대상을 욕망한다는 것은 변하는 대상을 욕망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매순간의 충족을 갈망한다. 이 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희망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좌절이나 사라진 희망 역시 변화를 통해서만 새로운 희망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미세한 변화를 생득적으로 체감하지 못 한다. 다만, 어느 순간 외적변화에 의해 그것이 갑자기 일어난 일인 것처럼 인식한다. 시인은 최소한 이 같은 변화에 있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 작고 사소한 것들, 하찮고 쓸데없어 보이는 것 등등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이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나호열은 그러한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5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했으며, 이후 서울에서 성장‧생활했다.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현재 9권의 시집2)을 출간한바 있고,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시와시학 중견시인상(1991), 녹색시인상(2004)을 수상했다. 주지하다시피 그가 등단한 1980년대는 민주화투쟁으로 점철된 시대다. ’80년대는 곧잘 일제식민기 시대의 암흑기와 비교되곤 하는데, 이는 검열과 통제, 정기간행물 폐간은 물론이거니와 작가의 표현욕구마저 철저히 감시당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탄압과 독재가 극심할수록 문학은 시의 언어로 표출된다고 했던가. 민중시, 노동시, 농민시, 실험시, 여성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시인들이 저항하고 부정하고 비판하며,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적극 앞장섰다. 범박하게 ’80년대의 상황을 언급한 것은 나호열의 시가 ’80년대의 자장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호열의 시는 투쟁적이지 않다. 부조리한 시대를 풍자하거나 역설하지도 않는다. 그의 시는 당대에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민족시 계열의 시도 아니며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노출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의 시는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며 내용/형식 실험을 시도했던 것도 아니고, 대중적 명성을 얻기 위해 감수성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는 작고 하찮은 것에 목숨걸고 그 것 때문에 시를 쓴다고 말하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전통적인 서정시처럼 음풍농월하거나 세상을 관조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시, 새로운 서정’을 지향하는 시인이 있듯, 나호열의 시가 그렇다.


1. 변방의 시인, 절망의 유혹에서 의미 찾기


’80년대에는 투사적 기질로 독재에 저항한 시인이 있었는가 하면 작은 목소리일망정 함께 모여 투쟁한 시인도 있었고, 독보적인 행보를 통해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시인도 있었다. 시인은 개개의 삶의 모습이 다르듯 시대에 항거하는 방식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나호열은 등단 후 미래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서정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80년대의 시가 무크지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감안해 본다면 그의 시의 지향성이 어느 지점에서 출발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3)


나호열은 “시 쓰기는 절대절명의 고독으로부터 시작된다”4)는 화두를 안고 “변방의식” 하나로 끈질기게 버텨왔다고 고백한바 있다. 현재 9권의 시집을 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문단의 변방에 있다. 많은 시인들이 중심을 욕망할 때 그는 자처해 변방으로 나선 시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문단에서 큰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나름의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시인은 피를 잉크 삼아 글을 쓰는 존재이”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 속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들을 형상화하여 우리들의 느슨해진 정신에 충격을 주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의 임무를 규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이들이 시와 시인을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시인마다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이 다르고 지향하는 시세계가 천차만별이므로 이를 규정하기에는 언제나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임무는 나호열의 말처럼 “느슨해진 정신에 충격을 주는 일”로부터 시작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느슨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이 깨어있음을 의미하며, 시인이 깨어있을 때 그 시대는 희망적이다. 그러므로 나호열의 변방의식은 주변에서 중심을 들여다보고 그 것을 비판‧포옹할 수 있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시작태도였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안개를 시로 쓰고 싶다. 종이 위에 방울방울 이슬로 맺혀 있다가 눈길이 닿는 순간 안개로 가득 피어오르는 시, 그리하여 결국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안개의 시, 시의 안개…….


그 안개를 절망으로 쓰기도 하고, 희망으로 읽기도 하며, 사랑과 외로움으로 뒤바꿔 보기도 한다. 그 모두가 오역일 뿐일 줄 알면서 말이다.


(……) 나는 배웠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는 없다’고, 단지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이 허용될 뿐이라고……. 그러므로 나는 용케도 절망의 유혹으로부터 빚어진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진 기계적인 사고방식과 무한한 욕망의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절망을 안고 뒹굴며 절망과 한몸이 되는 것이었다.5)


나호열은 인위(人爲)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절망과 한몸이 되는 것”으로 보고 “안개의 시”를 쓰고 싶어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안개”는 세상의 모든 것일 수 있으며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알다시피 장자는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로 보고 이를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는 무위(無爲)는 스스로 자기 존재를 성립시켜 절로 움직이므로 자연(自然)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위자연에서 절대적인 나의 기준은 있을 수 없으며 이도관지(以道觀之)를 통해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위의 글에서 나호열이 “절망을 안고 뒹굴”며 “절망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안개의 시, 시의 안개”에 의해서다.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이 허용”된 “오역일 뿐”인 시대를 살아왔기에 그에게 “안개”는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이 뿜어 올리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때문에 나호열은 “안개의 시, 시의 안개”를 “무형의 가치를 발견하고 새롭게 창조하는”6)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형상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견’과 ‘창조’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에게 이 과정은 자기 자신을 수행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수치도 괴로움도 없이/ 물 흐르는 소리를 오래 듣거나/ 달구어진 인두를 다루는 일이었다/ 오늘 벗어 던진 허물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때와 얼룩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 사람은/ 자동세탁기를 믿지 않는다/ 성급하게 때와 얼룩을 지우려고/ 자신의 허물을 빡빡하게 문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때를 지우고/ 마음으로 얼룩을 지운다/ 물은 그 때 비로소 내 마음을 데리고/ 때와 얼룩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어제의 깃발들을 내리고/ 나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때와 얼룩을 지웠다고 어제의 허물이/ 옷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구겨진 내 삶처럼/ 무늬들의 자리를 되찾기에는 또 한번의/ 형벌이 남겨져 있다/ 쓸데없이 잡힌 시름처럼 주름은/ 뜨거운 다리미의 눌림 속에 펴진다/ 내 살갗이 데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펴지 않으면/ 어제의 허물은 몇 개의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놓고 만다/ 부비고, 주무르고, 헹구고, 펴고, 누르고, 걸고/ 평생을 허물을 벗기 위해/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수행」 전문





<초간노자>13장을 보면 무위자연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부쟁(不爭), 불유(不有), 불시(不恃), 무욕(無慾)을 꼽고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무척 쉬운 듯 하지만 이를 실천해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다투지 않으려면 인내하거나 비굴해져야 하고, 가급적 많은 것들을 소유해야 한다. 소유는 집착과 탐욕의 결정체이지만 우리는 이를 자랑하고 내세우고 싶어한다. 장자는 인간의 본성인 덕을 회복하려면 이러한 습성에 물든 심성(心性)을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성수반덕(性脩反德)이라 하는데, “마음으로 때를 지우고/ 마음으로 얼룩을 지”워야 비로소 “때와 얼룩”이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현상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生)하고 멸(滅)한다. 때문에 무위자연의 실천은 있거나 없음이고 사라짐이나 사라지지 않음의 상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만물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공존한다.


나호열이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이 무릎 꿇는 일이었”음을 그리고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은 자신의 심성을 닦는 수행임에 분명하다. 또한 “본의 아니게 구겨진 내 삶”을 “마음으로 펴”가는 실천적 행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러한 수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는 어떤 것인가.



2. ‘하찮고 쓸데없는’ 시쓰기


나호열은 토론토에서 <독도, 시와 사진전> 행사를 통해 많은 부분 시적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토론토 시편」이나 시와 산문을 읽어보면 당시의 체험이 어떻게 그의 시 속에 스며들었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그는 토론토에서 만난 한 시인을 보면서 ‘시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앞서 나호열은 시인의 임무를 “느슨해진 정신에 충격을 주는 일”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라는 방법론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 것은 그동안 그의 시에서 절망‧희망‧사랑‧외로움‧그리움 등의 정서로 표출됐다. 그러나 <독도, 시와 사진전>을 통해 그는 시인이 해야할 일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찾은 듯하다.


어차피 시인은 오늘날, 쓸데없는 일에 목매다는 존재가 아닌가? 쓸데없는 일에 목매다는 사람들 때문에 역사가 살아 숨쉬고 세상은 한층 밝아지지 않았는가? (……) 영광도, 명예도 그 아무 것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일에 투신하는 일처럼 밝고, 맑고, 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7)


그는 같은 글에서 “시인이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이 일으켜 세운 화두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일이다. 치열하게!”라고 말하고 있다. 치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쓸데없는 일에 목매”달 수 있는 필연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호열이 “쓸데없는 일에 목매다”는 것은 독도가 우리 땅임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다. 아니다. 최소한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사람들에게 독도가 우리네 땅임을 알리고자 한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무가치한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일이 바로 “쓸데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쓸데없는 일”에 무심하며 그것이 언론화되었을 때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는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땅’임을 주장해야함은 누군가의 “쓸데없는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여 “영광도, 명예도 그 아무 것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일에 투신하는” 이들을 보면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 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나 아닌 타인을 통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나호열이 토론토에서 만난 시인들에게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듯,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삶의 기쁨”을 맛보았듯, 모든 앎은 타인 혹은 나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해서다. 나호열은 토론토에서의 체험을 계기로 “하찮은 일을 위해 시를”8) 쓰기로 작정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치부해”왔던 “쓸데없는 일”에 대한 “부끄러움”이 “불쾌함으로 바뀌”면서 비롯된 것이다.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고행자는 한결같이 일그러진 얼굴과 퀭한 눈과 헝클어진 머리칼과 약간은 썩은 냄새를 풍기는데, 고행자는 한결같이 굶주림의 미소와 약간의 빵 굽는 냄새의 평화를 보여준다.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고행자는 사라지고 있는데, 한 번도 고행자는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이상하다. 우리는 그의 몸을 보면서 그의 정신을 훔치려고 한다. 이상하다. 우리가 그의 정신을 훔칠 때 우리는 지독한 구역질에 시달린다.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걷다가 넘어지다가 이윽고 온몸으로 기어간다. 고행자는 제 몸을 눕히면서, 제 몸을 오체투지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엎드린 그를 숭상하고 엎드린 그를 경멸한다. 그물을 치고, 둑을 쌓고, 댐을 만들고 그를 먹으면서 그를 배설한다. 그가 길이다. 그의 몸이 길이다. 아니, 우리는 그를 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깔아뭉개지는 그는 뭉개질수록 우리의 가슴께로 치올라 우리의 욕망을 엿보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저 뱃전에 출렁거리는 그의 힘살에 떠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뿐, 저 먼 뻘밭에 처박히고 저 먼 바다에 출렁거리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그를 노래하려고 하는데, 그는 침묵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내 배 위에서 죽어라!


부력과 가라앉음의 아슬한 줄 위에서


한 줄기 바람도 위태롭다.


――「한강 유람선 위에서」 전문


위의 시 전문을 인용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나호열의 시에서 자주 접할 수 없는 시라는 점, 다른 하나는 이 시를 중심으로 그가 자연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갖고 실천적 행위로 나가고자 한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 김재홍의 말을 빌리자면, 나호열의 시는 “오늘의 실존적 삶에 끊임없이 고뇌하면서 본질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일이 오늘에 있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길인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성찰”의 세계였다. 때문에 위의 시에 보이는 것처럼 격한 감정보다는 섬세한 혹은 철학적 사유가 엿보이는 정적인 시가 대부분이었다. 주목할 것은 그러한 시세계가 후자의 경우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한강 유람선 위에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그”, 다시 말해 자연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는 한강으로 표상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신음 소리만 가득한” 도시 속 자연이다. 나호열은 시인들이 한강에 유람선을 띄우고 “강을 주제로”한 “낭만적인” “시낭송회”를 제대로 즐기지 못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바라보는 한강은 “고행자의 발걸음”이며 “그의 정신을 훔치려고 하”는 “우리는 지독한 구역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즉, “그물을 치고, 둑을 쌓고, 댐을 만들고 그를 먹으면서 그를 배설”하는 행위로 인해 “위태”로운 지경에 와 있다. 나호열은 이러한 모습에서 “시인으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는 하찮은 일을 위해 일했”다는 스파이라의 묘비명을 떠올린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나호열은 자신 또한 “하찮은 일을 위해 시를” 쓰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내가 시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나의 만족만을 위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꺼이 독자들에게 알려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최선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하찮”다기 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일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자칫 계몽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가 「한강 유람선 위에서」 재차 묻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라는 그의 호소에 다름 아니다.


무언가를 질문한다는 것은 앎을 전제로 하므로 질문 속에는 비판적 사고가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불쾌함으로 바”뀔 수 있고, 이 불쾌함은 행동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동기가 되어준다. 나호열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역설적으로 “하찮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찮은 일”이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 작고 사소한 것들, 하찮고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며 사랑이고, 실천이다.


3. 녹색의 희망, 조화로운 삶을 위하여


나호열의 ‘하찮고 쓸데없는’ 시쓰기는 그의 관심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결국 시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제시할 수 있다. 그가 “인생의 의미는 기다려주고 그것들이 필요한 생명들이 다 거두어가고 난 다음에 보물찾기하듯 그것들을 찾는 일”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나는 오랜 망설임 끝에 이 세상의 모든 시는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에 바쳐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9)질 때, 녹색시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21세기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인간이 망가뜨린 자연의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생명사상으로 가득할 것”임을 확신한다.


나호열의 이 같은 확신은 그의 ‘하찮고 쓸데없는’ 시쓰기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재삼 생각케 한다. 그가 자신의 시에 대한 정체성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색해오면서 맛보았던 “낭패와 굴욕”은 ‘하찮고 쓸데없는’ 것에 대한 이해관계 때문일 것이다. 바꿔 말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작고 하찮은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므로 관심 밖이거나 논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강한 것만이 살아남고, 경쟁에서 이겨야한다고 암암리에 배워온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득 없는 일은 모두 ‘하찮고 쓸데없는’ 일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수궁하지만, 그것을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이미 편안함에 익숙해져온 현대사회에서 자연은 보호대상일 뿐 그것을 왜 보호해야 하는가의 절박함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단언컨대 자연은 보호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보호받아온 인간이 자연을 제 마음대로 규정하고 편리에 따라 사용해온 것이다. 따라서 나호열이 “이 세상은 인간들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하찮고 쓸데없는’ 시쓰기로 형상화해온 것은 이 시대의 시인이 진정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북」 전문


’90년대부터 몇몇 논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던 ‘생태‧환경‧녹색’은 이즈음 일반적인 담론이 되어버렸다. 이들 각각의 개념이나 지향성 등은 차치하고, 나호열이 수상한 녹색시인상은 한국녹색시인협회에서 시상하는 상이다. 이 협회는 등단한 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녹색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나호열 역시 ‘녹색시 운동’에 적극적인 시인인데, 이들은 자연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삶을 지향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녹색=생명’, ‘공동체 삶=인간과 자연’이다. 그렇다면 나호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호열이 녹색시인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금까지 모색해왔던 시쓰기가 ‘녹색시’의 지향점과 맞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은 녹색시인상 수상작 중 한 편이며, 이 시를 통해 그의 생명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서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은 “북”은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말을 건”넨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북소리를 “말”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북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나호열의 귀에는 그것이 “말”로 들리고, 그 “말”은 그의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이 시에서 「북」을 자연의 소리로 보는 것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순간이다. 즉 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순간의 떨림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우민(愚民)이면서 나는 우민(愚民)이다. 세상은 더럽고, 누추하고, 오물 덩어리 같다. 그 오물을 몸에 묻힌 채로 참 오래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럽다 더럽다 외치면서 나는 브루조아의 달콤함을 잊은 적 없다.(……) 시인이라면 적어도 불의의 세상에 돌멩이 하나라도 날릴 수 있어야 하는데, 취로봉사 나가는 구부정한 노인들의 옆을 매연을 풍기며 지나가는 아침에도 나는 꿈만 꾸고 있다. 할 말이 많은 것이 시인의 첫 번째 자격인데, 변혁과 혁명과 미의 찬미자이어야 하는데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사랑에 대해서 탐구하는 일일뿐이다.10)


나호열이 꿈꾸는 세상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이다. 이 말은 흔히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할 때 쓰이지만 나호열에게 호접지몽은 물아일체 즉, 무위자연의 세계이다. 나호열의 시 많은 부분은 노장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장자가 똥‧오줌 속에도 도(道)가 있다고 했을 때, 물(物)의 시비(是非)‧선악(善惡)‧미추(美醜)‧빈부(貧富)‧화복(禍福) 등의 구분이 어리석다고 했을 때, 그래서 궁극적으로 무위자연의 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했을 때 등이 그렇다.


나호열에게 무위자연의 실현은 “인간답게 만드는 사랑에 대해서 탐구하는 일”부터다. 그는 ‘~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사랑’에 두고 그것을 인간만이 아닌 자연으로 확장시킨다. 이때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방해하는 것 예를 들면, “산으로 막히면 터널을 뚫고, 강이 가로막으면 다리를 놓는” 것 등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비판의 칼날을 세운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자연에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서 군림하려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새로운 시가 씌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때일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 하는 것, 듣지 못 하고 말하지 못 하는 것을 언어화했을 때, 비로소 한 편의 생명력 있는 시가 씌어질 것이다. 그러한 시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4. 보론-강물에 대한 예의


나호열은 “늙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끝에 가 닿을 수 없는 우리가 자신을 허용하고 용서하는 일”11)이라고 한다. 그의 말처럼 “누구도 이 세상의 끝에 가 닿은 사람은 없다.” 때문에 늙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끝을 향해 가는 우리들의 현재진행형이며, 이 진행형의 삶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가는 오롯이 개개인의 몫이다. 누군가는 부(富)를 향해 가고 또 누군가는 권력이나 명예를 향해 가며, 또 누군가는 사랑을 향해 간다. 천천히 혹은 조금 빠르거나 아주 빠르게.


누군가의 도달점은 곧 나의 도달점이다. 우리의 삶은 너와 내가 아니라 흘러가는 강물처럼 하나다. 다만 서로의 차이와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강물에 대한 예의”로 우리 자신을 “허용하고 용서”할 일이다.


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


그 속의 어느 영혼이 아파할지 모르므로


성급하게 건너가려고 발을 담그지 말 것


우리는 이미 흘러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완성되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


완벽한 죽음이 강물로 현현되고 있지 않은가


――「강물에 대한 예의」 일부


나호열은 등단이후 지금까지 새로운 시를 쓰고자 시의 언어를 다듬어온 시인이다. 그가 시인의 임무와 의무, 시인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고민하고 모색하는 동안 그의 시 역시 다양한 변화를 보여왔다. 그러나 그의 시 근간에는 항상 ‘사랑’이라는 강물이 흐른다. 그것이 인간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모든 변화의 긍정은 사랑의 힘에 의해 희망적인 모습을 띤다. 우리가 그의 시를 읽고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 서울 출생. 동덕여대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선명한 금>,<사람 사람아>, <물의 섬>이 있음. 제4회 서울시인상 수상. 현재 동덕여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계간 <시와산문>편집주간으로 있음.

 

2) 시집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집에 관한 명상 또는 길 찾기>,<망각은 하얗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칼과 집>,<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낙타에 관한 질문>, 문화평론집 <문학과 철학 굴레와 해방>이 있음.

 

3)미래시 동인은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서정을 모색‧시도했다. 이들은 부정기 간행물인 무크지를 출간하며 당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시류에 반한 새로운 서정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예리하게 반영해내고 있다. 나호열은 미래시 동인 외에도 시와시학, 강남시, 시우주 동인으로 활동했다.


4) 나호열, 「따로, 또 같이의 즐거움」, 시, 광화문시인회, 시와산문사, 2000, 119쪽.


5) 나호열, 「절망, 너에게 쓰는 편지」, <시와산문>, 2000, 여름호. 32쪽.

 

6)나호열, 「토론토 시편」, <시와산문>, 2003 겨울호. 이하 인용 같은 책.

7) 같은 책, 65쪽.

8) 나호열, 「그는 하찮은 일을 위해 일했다」, <시와산문>, 2004 가을호. 86쪽. 이하 인용 같은 책.

9) 나호열, 제6회 녹색시인상 수상소감 중.(시와산문, 2004 겨울호. 20쪽.) 이하 인용 같은 책.

10) 나호열, 「킹스톤에서의 하루」,<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포엠토피아, 2001. 117~118쪽.

11) 나호열, 「아다지오 칸타빌레」,<시와산문> 2007년 봄호. 61쪽. 이하 인용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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