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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폭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20. 00:54

폭설

                                                                         나 호 열




하늘이 똥을 누신다
무량하게 경전을 기다리는 사람들 위로
몇 날 며칠을 똥을 누신다
거름이다
말씀이다
사람들이 만든 길을 지우고
몇 그루의 장송도 넘어뜨렸다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부질없는 쇠기둥을 휘게 만들었다
하늘에 방목한 것은 조개, 양떼, 새털 이름을 가진
구름뿐,
냄새나지 않는 똥을 누시는 까닭이다
무량하게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아우성치지 마라
말씀의 거름 잘 새겨들어라

깊은 어둠에서 눈은 더욱 밝게 뜨이고
순백의 천지는 눈을 더욱 멀게 만든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라
철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라

산은 그럴수록 우뚝하다

                                                  - 『시인시각』2007년 겨울호






                               ♣                       똥! 눈(雪)의 낯선 이름


  
  “하늘이 똥을 누신다”니! 참으로 발칙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눈(雪) = 똥’으로 이어지는 생각을 끄집어낸 이가 이 시인 말고 또 있었던가? ‘눈’의 흰색은 자연스럽게 ‘순수(純粹)’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며 그런 까닭에 우리 시에서는 ‘순수’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 시인은 지금 엉뚱하게도 그런 ‘눈’에게서 ‘똥’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도 ‘똥’은 ‘더러운’이나 ‘냄새나는’ 등의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시의 ‘똥’은 “냄새나지 않는 똥”이며 ‘말씀 - 거름’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똥’만큼 깊이 있고 진실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폭설’ 때문에 허둥대는 사람들을 향해 시인은 “아우성치지” 말고 “말씀의 거름을 잘 새겨들어라”라고 말한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머릿속에 ‘똥’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깊은 어둠에서 더욱 밝게 뜨이는 ‘눈(眼’)을 갖게 되는 것이다. “깊은 어둠에서 눈은 더욱 밝게 뜨이고”라는 역설(逆說)은 고은 시인의 「눈길」에 나오는 “쌓이는 눈 더미 앞에 /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역설적 의미로서의 ‘어둠’은 어떤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며, 그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눈길」에서 고은 시인이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 … (중략)… /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라고 말할 때처럼. 그러므로 이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철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시인은 이미 그 길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눈’을 보고 ‘똥’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충분히 낯선 한 편의 시가 태어난다. (박완호)  - [시와 상상]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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