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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대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1. 16. 22:11

나호열 시인과의 대담


Q 먼저 대담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평소에 자주 동양적 사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동양사상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A 질문 내용이 포괄적이라서 답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답을 드리기 전에 몇 가지 먼저 정의를 내려야 할 것 같은데요, ‘동양 ’이란 개념에 대해서 말씀 드려야 할 것 같군요.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구조는 서양인들이 사용한 개념이죠. 지리적으로 따져보면 터키, 사우디 아라비아도 아시아 즉 서양인의 관점에서 보면 동양이죠, 종교적으로도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많은 종교의 근원이 동양인 셈인데. 이런 경우 서양과 동양의 경계는 모호해 집니다. 우리가 서양문명이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고 할 때 동양사상이란 구분이 모호해지지 않을까요? 제 말씀은 오늘날의 동양의 개념은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인이 스스로  변별되는 특성, 서양인들이 스스로 규정한 문화인의 대척점에서 미개, 야만, 그래서 정복되어야 마땅한 그런 개념으로 동양을 l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기독교 사상이나, 이슬람을 동양사상의 범주로 넣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할 것 같고, 그래서 우리가 동양사상이라 하면 상식적으로 불교, 유교, 노장 사상, 아, 거기다가 힌두사상과 넣어야 하겠지요. 저는 동양사상을 이야기 할 때 전제해야 할 부분은 이런 사상들이 농경을 기반으로 둔 환경에서 잉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위자연을 설파한 노자나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을 바로 새길 여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현대문명은 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화의 매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바대로 어느 사상을 막론하고 농경사회의 기본적인 아이템은 관조, 절제, 생태주의적 생활태도 등으로 공통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유행하는 생태주의나 여성주의도 따지고 보면 이런 사유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질문의 요지는 딱 부러지게 공자냐, 석가모니냐, 아니면 노자, 장자냐 이런 답변을 기대하신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한 마디로 좋은 답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Q 그러면 질문 방향을 약간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선생님께서는 전공이 철학인데, “ 철학적 사유가 시에서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답변하시기가 쉬울까요?


A 답변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요. 왜냐하면 또 철학이 무엇인가 정의를 내려야 할테니까요. 간단히 말해서 항구적 진리를 추구하고 논리적 사유를 정립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한다면 칸트가 말한 바대로 철학은 철학 그 자체를 배울 수는 없고 그저 철학하는 방법을 배우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논리가 배제된 인간의 사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다 보니까, 철학적 사유는 문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축이라고 느낍니다. 역으로 철학적 사유 안에도 예술적 상상력이 함유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전공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이것이 내 전공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네요. 공맹을 주로 공부했지만 눈길이 더 가는 것은 불교적 사유지요. 그렇다고 경전을 섭렵한 것도 아니고... 불교의 인식론이나 논리는 정말 현란할 정도로 치밀합니다. 매력적이지요. 종교는 위안이고 마음의 위탁을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하지요. 그러나 학문적 차원에서는 문제가 달라지거든요. 불가에서는 욕망을 버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차라리 욕망을 줄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이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요? 아직도 저는 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즉, 내세와 현세, 인간과 신, 비움과 채움...그러면서 인간을 포함한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적 사유가 아닐까요?

 

Q 그럼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시의 조건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A 시를 비롯해서 문학, 나아가서 예술의 정의는 계속 확장되어가거나 변모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정의는 지난 것이지요. 그러나 지난 것을 모르고 새 것이 어찌 나오겠습니까? 문제가 너무 확대되어가는 것을 피하려면 시의 경우로 국한해서 말씀드려야겠네요. 어찌 보면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이 될 때가 있어요 수많은 문학 잡지( 잘 팔리지는 않지만) 그 문학 잡지를 통해서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수많은 시인들, 그들이 발표하는 수많은 시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는지 모르지만) 시집들, 그 틈에서 어떤 때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자신들의 작품이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잣대가 있으면 얼마 좋을까요? 이현령비현령이지요. 보는 각도에 따라서 좋은 시의 기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잇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시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되 내성(자기성찰)이 깃든 시, 논리적 구조가 튼튼한 시, 뚜렷한 언어감각으로 미적 성취를 이룬 시..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Q 언젠가 선생님이 ‘파괴의 시학’을 말씀 하셨는데요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가요?

A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파괴 라는 단어는 끔찍하면서도 신선한 의미지요. 모방에서 시작해서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재주가 출중한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저와 같이 둔재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전범을 찾고 끊임없이 닮아가려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어떤 사람은 모방의 완성도 없이 끝날 테고, 어떤 사람은 모방을 넘어 창조의 길로 가기도 하겠지요, 정말 예술인이라 한다면  예술적 성취를 이룬 후에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길, 이전의 자신의 성취를 파괴하고 도전을 감행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명성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명성을 오래 유지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닐까요? 저는 작고한 김춘수 시인의 태도를 존경합니다. ‘무의미 시’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김춘수가 언어 활동의 무의미성의 교두보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면서도 부딪쳐 보는거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야 말로 오늘의 시인들이 깊이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름을 내는 데는 열심이지만 일단 명에나 명성을 얻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지지부진이죠. 시인이 되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지요. 나는 왜 시를 쓰는가? 필생의 업으로 삼을 만한가? 를 따져보아야 기성을 뛰어넘고 기존의 이론을 넘어서는 파괴의 욕망이 분출되는 것 아니겠어요?  


Q 타 문인들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A 저는 제 스스로 생각해도 묘한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의 폭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성격도 그렇지만 굳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안듭니다. 문학판에서도 저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학연, 지연,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부작용, 정실에 좌우되는 불합리한 처사가 생겨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선생님께서 제가 정중동의 시인이라고 하셨는데. 듣고 보니 그런 구석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문학을 누구에게 보이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놀고 즐기고 싶어서 합니다. 물론 그 다음에는 같이 공유 하는거죠. 제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요. 저도 시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문인들과의 교류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아참, 얘기가 딴 데로 흘렀네요. 생각해 보니까 문단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것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네요 80년대 등단을 하고 여러 어른들을 모셨지요, 조병화 선생님이라든가... 그런데 문학판에 들어가 보니 파벌도 있고, 상을 주고 받는데도 문제가 많더라구요.  그 당시만 해도 시인이란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했어요. 왕자병이라고 할까요? 글은 그러듯 한데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평소 지론이 ‘예술은 사기다’ 라고 생각하는데 (백남준도 그런 말 했죠)그래도 그렇지 자신은 현세적으로 무지 탐욕적인 사람이 시에서는 고상한 척 하면 그건 위선이지요. 한 마디로 문단이라는 데가 있을 데가 못되더군요. 몇 년 쉬었어요. 80년대에는 부부 시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제 아내는 국문학 전공이고 저 보다 훨씬 빨리 등단을 했었죠. 그런 아내도 절필하겠다고 그러더군요 (지금까지도 글을 안 씁니다) 그러다가 제가 봉직히고 있는 경희대학교로 김재홍 평론가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셨어요 어떻게 아셨는지 저를 만나고 싶어하셔서 뵙게 되었지요. 저보다는 대여섯 살 연배이시지만 문단에서는 까마득히 높은 분이시지요 다시 공부하고 시를 쓰라는 격려에 힘입어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은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겠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는 분명히 전환점이 있고 그 전환점에는 나릉 어여삐 보아주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김재홍 교수님에게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Q 예술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줄 아는데 활동의 내용은 무엇인가?

A 예총이란 곳이지요. 민예총 들어보셨지요? 민족작가회의 들어 보셨지요? 그런 단체의 반대편에 있는 단체라고 보시면 되겠지요. 한 마디로 보수단체지요. 오십 년 가까이 된 전국적 규모의 단체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흠도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 자체가 호감이 가는 세상이지만  또한 보수도 필요하지요. 엉터리 진보보다는 참된 보수가 밑거름이 된다는 신념이 있지요. 보수단체가 생리에 맞아서가 아니라 보수라고 하는 단체를 보다 전향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보수의 개혁? 저는 예술의 이데올로기화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학이면 문학이지 노동문학, 통일문학이 따로 있습니까? 4.5년 전에 발을 디뎠는데 지금은 그곳에서 정책연구위원장을 하면서 예술세계 라는 월간지 주간을 맡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난 3년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역문화위원을 하게 되기도 하였구요. 흔히들 문화의 시대라고 하지 않나요? 지역문화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게 되더군요. 재미있습니다. 저의 문학활동에는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지만요.. 또 하나는 인터넷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십 년 전즘부터 인터넷문학신문이라는 사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경영상의 어려움도 많지만 그보다는 문인들이 컴퓨터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홈페이지를 구축할 때 시창작 사이버 강좌를 개설했었습니다. 한 때는 등록인원이 천 명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료 강좌지요. 그 수강생 중에 십 여명이 등단과정을 거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보람이 매우 큽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문학, 특히 시를 쓰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요? 


A 글 쓰는 일을 기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재주만 가지고 글 쓰려는 사람도 많고요. 살만 하니까 여가로 글 쓰겠다는 사람도 있구요. 돈과 명예를 얻어보겠다고 투신하는 경우도 있지요. 두 가지 경우다 우리가 나물랄 수 있는 성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에 대한 열정이 없어서도 인되겠구요. 기본이 튼튼해야 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스로 터득하는 기본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마침 새로 나온 제 시집에 서문으로 쓴 글이 있는데. 보탬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이 지리멸렬하다는 것을 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 나의 절망이고 그 절망 끝에서 시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믿는데서 희망이 샘솟는다. ..평정을 얻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평정을 얻기 위해서 시를 쓴다. 그런데 나는 또 묻는다 시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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