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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을 여는 시의 세 가지 얼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0. 3. 21:30

새 천년을 여는 시의 세 가지 얼굴


                                 이 경 수 (문학평론가)


1. 속도의 외곽지대

  

 밀레니엄이라는 말과 함께 요란하게 시작된 새 천년은 우리 삶의 지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달력 한 장이 넘어가듯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변하는 그것을 감지하기 훨씬 전부터 서서히 진행되기 마련이다. 하루아침에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오래 전부터 서서히 변화의 기미가 진행되고 있던 것이 한순간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불연속적 사고와 연속적 사고의 차이는 변화의 결과와 진행 중에서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 천년은 밝았지만, 시의 담론은 세기말의 담론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의죽음, 혹은 위기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중요한 담론을 형성하고 있고, 그러한 담론의 배후에는 대개 시를 위기로부터 구해내야 한다는 중심 탈환의 논리가 자리잡고 잇다. 속도의 시대를 구제할 길은 시 밖에 없다, 라고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한다. 인터넷의 활성화에 따른 새로운 세계의 출현은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 활용된다. 그러나 시가 다른 무엇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은 시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음으로써 정작 시를 희생하게 되는 과거의 전철을 다시 밟을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개의 위기설이 그러하듯이 시의 위기설도 많은 경우 과장되어 있다. 시는 늘 주변적인 것과 함께 해 왔고, 그럼으로써 존재이유를 찾아왔다고 할 수 있다. 시는 중심적이기보다는 주변적이고, 현대에 올수록 중앙집권적인 통제력보다는 다양성을 용인하는 산발적인 힘이 시에서도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시를 중심에 세우려는 시도는 대개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잇는 경우가 많다. 시는 지금도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시도하고 있다. 시의 위기를 논하기 앞서 그러한 변화의 의미를 짚어내는 것이 더욱 요긴한 일일 것이다. 주변적이고 산만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시의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가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요구된다.

 이러한 전제 아래 이 글에서는 1990년대에 중요한 담론으로 이끌었던 시의 세 가지 얼굴, 서정시와 여성시와 노동시를 중심으로 2000년대 이후의 이유 있는 변모를 짚어보려고 한다.


2. 서정시의 생존 전략


 1990년대에 가장 활발한 담론 중의 하나가 서정시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리얼리즘을 표방한 시들이 서정성과 결합함으로써 따뜻한 서정은 대중성과 상업성을 동반하게 된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거품처럼 사그라진 민중시와 난해하다는 이유로 대중들로부터 유리된 모더니즘 시의 공백을 이러한 유형의 시들이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위안을 주는 이러한 시들은 속도의 시대를 거스르는 힘을 지닌 시들로 높이 평가되었고, 각종 생태주의 담론은 이러한 시들에 힘을 실어주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이 위기의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믿음은 신념을 넘어 하나의 신앙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러한 시의 경향에 대해서 대중성과 상업성을 경계하는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안의 기능 역시 문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지만, 그것만이 시라거나 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시들이 다양한 시적 경향 중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데는 시비를 걸 생각이 없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시라거나 시적인 것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옹색한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따뜻한 위안의 기능은 또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無力化의 논리가 작동하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현실이 위태롭고 불안한데, 불편함이 아니라 편안함만을 주는 시가 더 이상 위안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마치 인공화되지 않은 자연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데, 아니, 도시의 일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데, 여전히 낭만적인 상상력으로 자연을 노래하는 시가 더 이상 평화로운 위안을 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시와 일반 대중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여러 행사들이 90년대 말의 뒤를 이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각종 단체에서 주도하는 시낭송 행사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행사를 주관하는 측에서는 시와 노래와의 행복한 결합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래이기를 잃어버린 시는 더 이상 시가 아니라는 시각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리듬이 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리듬을 유발하는 방법 역시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詩와 歌의 분리는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현대시에 올수록 노래의 측면이 점점 더 약해지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시의 활로는 열릴지도 모른다.

 리듬을 유발하는 방법이나 서정성을 표출하는 방법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서정시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경계를 넓혀 가는 것도

시가 예술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겨우 2000년대 상반기의 절반 정도가 지나간 시점에서 서정시의 암중모색을 논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서정시의 상업성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서정성을 갱신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에 출간된 시집 중에서 그런 관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시집으로는 이영광의 『직선에서 떨다』(2003), 유종인의 『아껴먹는 슬픔』(2001), 정재학의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2004)등이 있다. 이영광의 시에 드러나는 지적인 시선과 결빙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반성적 사유, 유종인의 내면에서 비어져 나오는 신음 혹은 비명의 섬세한 기록과 자기고투의 서정성, 정재학의 지독하게 반복되는 환상으로 현실의 균열을 드러내는 독특한 상상력 등은 새로운 서정의 길을 개척하는 젊은 사인들의 암중모색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연 친화적 상상력이나 생태적 상상력에 기반한, 이전의 시를 답습하는 시들보다 이들의 시가 좀 더 문제적인 이유는 당위적으로 주어진 것과 삶의 체험으로부터 우러러 나온 절박함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의 권위가 지나치게 강화된 근대적 사유를 극복하겠다는 시도는 의미 있지만, 주제의 선취가 시적 성취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타자의 시선을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자의 시선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에 생태시들은 좀 더 천착해야 할 것이다.

 가령 이영광 시집의 표제시 「직선 위에서 떨다」는 자연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고운사 가는 길

  산철쭉 만발한 벼랑 끝을

  외나무다리 하나 건너간다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다

  너무 단호하여 나를 꿰뚫었던 길

  이 먼 곳 까지

  꼿꼿이 물러나와

  물 불어 계곡 험한 날

  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주고 있다

  잡목 숲에 긁힌 한 인생을

  엎드려 받아주고 있다


  문득, 발 밑의 격랑을 보면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도 누군가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


           - 이영광 「직선 위에서 떨다」(『직선에서 떨다』2003 )


  외나무다리가 이루는 수정할 수 없는 직선에 대해 1, 2연의 화자는 경외심을 표현하고 있다. 1연과 2연에서 벼랑 끝을 건너가고 나를 꿰뚫고 사람을 건네주는 주체는 외나무다리이지만, 주체와 대상의 자리만 전도되었을 뿐, ‘나’는 외나무다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긴밀한 유대가 형성되는 것은 3연에 와서인데, 여기서 주체와 대상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해 주는 것이 ‘두려움’과 ‘떨림’ 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삶에 대한 두려움, 생 앞에서의 떨림을 지녔다는 점에서 이들의 존재는 조우한다. 운명 앞에 선 존재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타자의 자리를 뒤바꾸는 것만으로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갈등과 불화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초라함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와 같은 존재라는 유대감의 회복이 아닐까? 이영광의 시에 나타난 자기 견인의 힘은 세속의 비루함에 대한 자조와 연민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만들어내는 긴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더욱 신뢰가 간다.


3. 여성시의 미래

 

 1990년대는 여성시의 약진이 돋보이는 시대였다. ‘여류’라는 꼬리표에 따라붙던 체념적이고 감상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깨뜨리고, 단지 성적 정체성에 한정되지 않는 ‘여성성’의 의미를 발견한 시대이기도 했다. 90년대의 대표적 담론 중 하나인 ‘몸’을 둘러싼 담론이 여성성의 의미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90년대의 여성시의 특징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김언희의 시이다. 김언희는 몸 담론을 토대로, 모든 경계를 허무는 파기의 전략을 구사한다. 몸을 둘러싼 성적인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준 김언희의 시는 여성시가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여성성의 새로운 발견을 시도한 최정례, 김선우 등의 약진도 눈에 띄었다. 최정례는 시간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통해 초기의 다소 거친 호흡을 극복하고 또 하나의 깊이에 도달해 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김선우는 자궁에 대한 상상력을 기초로 김언희와는 다른 방향에서 여성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들의 약진은 90년대 후반에 이어 2000년대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들이 여성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개성을 좀 더 깊이 있게 끌어갈지는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90년대의 여성시는 분신과 파괴의 전략에서 일단 성공적이었다. 90년대를 열었던 최영미를 시작으로 신현림, 박서원, 김정란, 김언희 등으로 이어지는 탈중심적이고 탈근대적인 상상력은 여성의 몸과 성 담론을 중심으로 중심의 해체에 기여해 왔다. 여성시의 상징적 의미를 변화시키고 세기말의 시적 담론의 주축을 이끌어 왔다는 점에서도 이들의 시는 마땅히 평가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김승희, 김혜순 등 80년대 여성시를 이끌었던 중견 시인들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 역시 중요한 힘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해체의 전략 ‘너머’를 고민해야할 때이다. 파괴의 전략은 파괴를 위한 파괴, 혹은 자기 파괴에 머물 위험을 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극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이제 여성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과제 앞에 서 있다. 수다, 신세 타령 따위의 ‘여성의 글쓰기’를 하나의 시적 문체로 끌어들였듯이, 지칠 줄 모르는 자기 갱신을 통해 여성시는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여성 시인과 여성시는 그들의 삶의 지반이나 시적 정체성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자유로운 위치에 서 있다. 기반의 부재, 혹은 약화야말로 이들의 목소리에 새로운 가능성을 실어줄 것이다. ‘시적인 것’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무는 개성적인 시선을 확보하고 있을 때, 이들의 시는 ‘여성성’을 넘어서서 개성으로부터 출발한 보편성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000년대 이후에 출간된 시집 중에서 어성시의 자기 갱신이라는 관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으로는 이원, 진은영, 이수명, 김행숙의 시집이 있다. 이들은 자기파괴적이지 않으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있는 영역을 열어 가고 있는 시인들이다. 이원은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1996) 이후 『야후! 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2001)로 이어지는 디지털적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건조하고 황페한 감수성을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그녀가 동명의 시에서 발표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디지털 방식으로 사고하고 대화하는 새로운 세대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진은영은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에서 너무 익숙한 나머지 죽어버린 말들에 대해 새롭게 정의 내리는 방식으로 말한다. 그녀의 가벼우면서도 전복적인 시선이 닿으면 그곳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지금, 여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놓치지 않으며 개성적인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시는 여성시의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수명의 『붉은 담장의 커브』는 지독하게 반복되는 내적 언어의 풍경을 통해 시인의 고독과 상처를 드러내준다.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은 낯설지만 그로부터 빚어지는 상처의 언어는 어딘지 익숙하다. 그리고 바로 그 고통에의 공감이 이상한 편안함을 준다는 데 이수명 시의 특징이 있다. 그녀는 반복의 마력을 터득한 시인임에 틀림없다. 김행숙의 『사춘기』(2003)는 중심에 편입되지 않고 부유하는 ‘사춘기’라는 시절을 통해 주변적이고 분산적인 타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고 믿었거나 보거나 듣지 않으려고 애써 눈감고 귀 막았던 낯선 영상과 소리의 파편들을 들려줌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환기해 준다는 점에서 그녀의 시는 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녀의 시는 “지금 무엇에 대한 直前이다. 「폭풍 속으로」진행중인 그녀의 시를 읽는 일은 ”으으으“ 고통스런 신음을 동반하는 색다른 즐거움을 가져다주고 있다.


이 시대에는 이무 것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여자, 통일성, 넓은 길이나 거짓말과 같은 것들이



다만


문을 열자 쏟아지는 창고의 먼지, 심한 기침소리

네게 주려 했는데

실수로 꽝꽝 얼린 한 컵의 물

물밑의 징검다리, 쓰임을 알 수 없는

약들이 있다



쉽게 말할 수 았는 미래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지금 여기”

더듬거리는 혀들이 있고



동물원에 가서 검은 정글원숭이들과 싸우고 싶었는데

왠지 화분을 선물 받은

어린 시절에 대해서라든가,

영원한 태양보다는

그늘에 자라는 붉은 잎의 사실성을 믿는 그런 사람에 대한 부러움

혹은 몇몇 시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다



그것이 만들어낸

이전 詩들과

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



그 위로

시간이 눈처럼 자꾸 내렸다

아무 것도 하얗게 덮지 않고 흩어져버렸다


      - 진은영 「이전 詩들과 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


 인용한 진은영의 시는 이전의 시와는 다른 시를 쓰겠다는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시인의 선언이다. 그녀가 거부하는 것은 ‘예쁜 여자, 통일성, 넓은 길, 거짓말, 영원한 태양’ 등이다.시적인 것은 의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거나 시는 이질적인 것도 동일화하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거나 미래로 향해 있는 넓은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거나 아름다운 거짓으로 치장되어야 한다거나 영원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시에 대한 낡은 통념들을 그녀의 시는 단호히 거부한다.  오히려 그녀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것, 더듬거리는 혀, 사라지거나 흩어지는 것들을 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는 이전의 시에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지만, 또한 미래의 시를 향해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있다. 이것은 비단 진은영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시에 대한 그녀의 선언은 자기 세대의 시에 대한 자의식을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여성 시인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방식으로 ‘ 이전의 시’를 거부하며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들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시의 얼굴을 지켜보는 일은 분명 가슴 설레는 일이다.



4. 노동시의 활로


 90년대와 함께 시작된 거대 담론의 붕괴는 90년대의 수많은 시인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시인들은 역시 박노해, 백무산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시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념의 철회를 바깥으로부터 강요당한 시인들이 보여준 변모와 모색의 과정은 90년대 우리 시단의 의미 있는 풍경의 하나를 이루었다.

 박노해의 『참된 시작』(1993)과 백무산의 『인간의 시간』(1996)은 이들의 변모와 모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시집이다. 박노해는 결국  『참된 시작』이후에 따뜻한 서정으로 회귀하여 대중성과의 만남을 모색한다. 그 변모는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백무산이 『인간의 시간』이 보여준 고뇌의 풍경은 신념의 붕괴를 체험한 인간의 내적 고투와 반서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자뭇 감동적이었다. 문명의 근원에 대한 탐구와 노동자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 반성적 사유는 노동자의 또 다른 가능성를 열어주기도 했다. 물론 그 이후의 시집들, 특히 최근에 출간된 『初心』(2003)은 그의 시가 아직 출구를 찾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설사 이 시인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2000년대 이후 노동시의 활로는 다른 시인들에 의해 열리다. 2000년대 이후에 노동 현장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은 거대 담론의 그림자로부터 훨씬 자유롭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몸놀림의 가벼움이 이들이 한결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노동시’ 혹은 ‘노동자 시인’이라는 명명이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90년대 후반에 나온 첫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에 이어 2001년에 출간된 이대흠의 두 번째 시집 『상처가 나를 살린다』에는 더 이상 ‘노동자 시인이 쓴 시’라는

분류에 포섭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시에는 여전히 위반과 전복의 상상력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향은 많이 달라졌다. 그는 위반과 전복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새로운 언술의 전략을 실험하고 있다.

 오히려 노동자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좀더 강하게 지닌 시인으로는 최종천이 있다. 첫 시집 『눈물은 푸르다』(2002)로 시단의 주목을 받은 최종천은 밀도 있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시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 밀착해 있으면서도 무게를 덜어내 가벼워졌고. 과장되지 않은 노옹자의 세계관을 형상화해 낸다. 나는 시집 이후에 그가 잡지에 발표하는, 냉소적인 가운데서 촌철살인이 빛나는 문명비판적인 시들에 좀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시인으로 이덕규를 들 수 있다. 화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의 이력 때문에 농촌 시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이덕규의 시는 종종 노동현장의 체험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시선을 지니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2003)에는 인생의 막장을 체험한 노동하는 인간의 시선과 문명비판적 상상력, 환상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지상의 가파름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어 ‘지금, 여기’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천상의 상상력 등이 빛을 내고 있다. 그의 시에 종종 등장하는 ‘칼’, ‘독’, ‘이슬’의 이미지는 ‘지금, 여기’의 막막함을 견디는 시인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지독하지만 투명하다. 그의 시에는 농촌의 삶과 대척점을 이루는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힘이 있으되 단선적이지 않다.



허공에 벌판을 놓고 길을 내는 그는

飛階工이었다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거대한 자본의 산맥을 넘어오는  높새바람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지상과 연결된 안전고리를

수시로 확인해야만 하는


지상에선 날마다 더 높은 곳을 주문했다

현장사무실 앞 풍향계는

늘 한곳으로 고정된 채 첨단의 극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촉박한 예정공정의 천후표에는

기후와 상관없이 늘 해가 떴다

이윽고 그는 지상의 통제권이

도달할 수 없는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아슬한 난간 위에 서서 아주 잠깐

고개 들어 훔쳐 본,

.....

아, 현기증이란

구름궁전 뜨락을 거닐 듯

얼마나 황홀한 산책인가


마침내 그곳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지상과 연결된 모든 안전고리를

남김없이 풀어버려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오랫동안 지상에 묶여 있던 부표 하나가

둥싯 떠올라.


뇌 단층촬영실

모니터 화면에 번져가는 구름 한 점


   - 이덕규「구름궁전의 뜨락을 산책하는 김씨」(『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2003 )



 비계공이었던 김씨는 거대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공사 현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일해 왔다. 마치 하늘에 닿기라도 하려는 듯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은 점점 커져가고, 마침내 김씨는 자본의 논리에 의한 욕망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더 높은 곳에 길을 내기 위해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아슬아슬한  난간 위에 올라선 순간,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김씨는 추락하고 만다. 이전의 노동시였다면 노동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노동현장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겠지만, 이덕규의 시는 여기서 잠시 현실의 경계를 이탈한다.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낯선 풍경을 통해 시인은 ‘늘 한곳으로 “만 고정된 채 첨단의 극점을 가리키고”있는 자본의 “풍향계”와 끝없는 욕망이 부른 욕망의 구름 궁전을 짐짓 보여준다.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것은 아름답기보다는 섬뜩한 풍경이다.“뇌단층촬영실/모니터 화면에 번져가는 구름 한 점”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롭다. 그러므로’ 도대체 왜?‘,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지?‘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독자를 이끄는 힘을 이덕규의 시는 가지고 있다.

 이대흠, 최종천, 이덕규의 시는 하나의 분류 속에 가둬두기에는 서로 많이 다르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지닌 위반과 전복의 상상력이 궁극적으로는 노동하는 인간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은 서로 닮았다. 개성 잇는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시인들이기에 이들은 노동시의 영역을 다양하게 확장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다국적 기업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전지구적 시대에 노동자의 시선은 가장 보편적인 시선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잇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들의 시가 지닌 다양성이 궁극적으로 노동시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그것은 이미 반드시 ‘노동시’라고 한정적으로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서정시, 여성시, 노동시가 보여주는 모색의 도정은 새 천년을 이끌어갈 시의 새로운 얼굴이라 평가할 만하다. 이들의 모색이 자기 영역을 고수하려는 중앙으로의 회귀나 중심탈환의 논리를 극복하고, 자유롭게 몸을 바꾸고 경계를 넘나들면서 우리 시에 새로운 생성의 동력을 마련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 과장된 시의 위기설은 자기 소거의 광기가 될 위험을 안고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 계간 리토피아 2004년 봄호 특집


이경수

* 1968년 대전 출생

* 1999년 「문화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 주요 논문 「한국 현대시의 반복 기법과 언술 구조」

*저서 『우리말 오류사전』(공저)

* 고려대, 천안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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