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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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있어 내가 밝은 것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0. 26. 11:16

어둠이 있어 내가 밝은 것을

 한밤중에 불현듯 눈이 떠졌다. 다시 잠이 들질 않아 아예 커피 한 잔을 들고 어두운 창 앞에 앉는다. 멍하니 창 밖의 가로등을 내다보니 어둠이 그 곁에 있다가 쓰윽 앞으로 나선다. 어둠은 그 바리톤의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한다. “보다 정직해봐. 그때 왜 그랬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너는 그렇게 후회하고 있지 않을 텐데 말이야.”


나는 어둠의 말을 들으며 어둠의 커튼 뒤에서 슬며시 떠오르는 얼굴을 본다. 그 얼굴을 보려니 별 생각이 다 난다. 정말 그때 ‘왜 그랬을까’.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정말 그때 왜 그랬을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중얼거린다.


그 첫 번째 얼굴.


아무래도 어머니다. 내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샤워기 밑에 서 있을 때면 유난히 생각나는 어머니, 어머니는 아마 그런 샤워를 해보지 못하셨겠지, 기껏해야 대중목욕탕의 뜨거운 ‘탕’에나 들어가 보셨을거야. 또 마트에서 잔뜩 먹을 것들을 사가지고 나와 자동차 트렁크에 실을 때면, 특히 스르르 하고 트렁크의 덮개가 열릴 때면 간절하게 생각나곤 하는 어머니, 어머니는 이렇게 멋지게 장을 보시진 못하셨겠지. 마음대로 물건을 사고, 그렇게 산 것을 수레에 가득 실어 자동차로 나르는 걸 어찌 생각이나 하셨을까. 낑낑 시장 가방을 들고 길을 걸으셨겠지. 겨우 버스에 위험하게 올라서셨거나. 만약 운전을 배울 기회가 있으셨다면 나보다 훨씬 잘 하셨을 텐데….


그런데 나는 그때 왜 어머니에게 화를 냈을까. 어머니가 나를 업고 삼팔선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여기에 없을 텐데…. 그러니까 어머니는 바람처럼 사라지신 아버지를 찾아 깊고 찬 임진강 물을 목숨을 걸고 건너셨고 그 조마조마한 등에는 백일된 내가 업혀 있었다.


혹시 울기라도 할까봐, 그래서 무서운 소련군 병사에게 들키기라도 할까봐 조마조마 앞으로 돌려안아 아기의 입을 두 손으로 안아막으며, 신발 닳는 것이 아까워 맨발로 피 터지게 걸어 동두천 둑 위에 서셨던 어머니, 6·25 전란 시 피란할 때에는 솥을 안고 피란민 열차에 올라타셨던 어머니, 그때는 백일된 동생이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냈었다. 은근히 무시했었다. 그 촌스러움을 부끄러이 여겼었다.


내가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 ‘재수술을 해야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식물인간이 될 것이다’는 의사에 말에 병원 침대를 가로막고 나를 수술실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셨던 어머니, 천운도 있었겠지만 나는 자연스레 회복되는 기적을 보여주었고 뒤늦게 공부하게 되었으며 교수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온 몸이 마비된 채 근근이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를 미워했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나의 글쓰기, 아니 여자의 글쓰기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셨던 어머니를. 남동생을 질투하며.


그 두 번째 얼굴.


어둠 속을 바라보려니 또 한 얼굴이 다가온다. 그 남자다.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정말 가슴을 친다. 그 남자의 언제나 웃곤 하던 얼굴이 어둠 속에 떠오른다. 우리는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찾아온 그에게 차 한 잔 주지 않았다니, 쳐다보지도 않았다니…. 그 남자의 흠집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니…. 실은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생의 흠집들을….


그 세 번째 얼굴.


J 수녀의 얼굴이다. 계란을 반숙으로 삶을 때면 꼭 생각나는 J 수녀…. 그녀는 계란 반숙을 정말 잘했지. 계란의 꼭대기 부분을 동그랗게 벗겨 반짝이는 은스푼으로 계란 속을 먹게 했지. 그녀는 또 온갖 음식을 척척 만들던 그 놀라운 손으로 나의 아이를 거두어 주었다. 예쁜 드레스를 죽은 아이에게 입히고, “걱정 마세요. 천사가 되었을거야. 죄를 하나도 안 지었으니…” 그러면서 내가 끼어주었던 ‘누우런 금반지’를 아이의 하얀, 순결한 손가락에서 빼버렸다. 그때 보이던, 그 금반지의 물렁물렁한 응큼스러움.


그런데 그 J 수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였다. J 수녀는 나에게 돈을 좀 꾸어달라고 했다. 남동생 때문에 빚쟁이가 자꾸 온다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얼마되지 않는 돈이었다. 아무튼 20여년의 간격은 나를 너무 놀라게 했었다. 놀란 바람에 말을 돌려가며 거절했다. 나는 그러면서 또 전화가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막연히 기다렸건만, 그러나 그 뒤 다시는 J 수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J 수녀. 그런데 나는 정말 왜 그랬을까.


J 수녀 덕에 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었고, 매일 최고로 요리한 특별식을 먹을 수 있었는데(그때 J 수녀는 그 병원 주방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아이도 잘 보낼 수 있었는데, 지금도 눈에 선한 그 예쁜 드레스의 커다란 하얀 리본….


지금 나의 홈페이지란 곳에 가끔 싣고 있는 ‘내 가슴 찡한 말’들을 그때 생각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나의 인생은 좀 나아졌을까.


[장자의 새]


장자의 새, 곤(鯤)이 변하여 된 붕(鵬)은 구만 리 높은 하늘을 난다. 당신의 새는?


[퇴계의 방]


혼천의(渾天儀)를 만든 퇴계의 방을 생각하라. 그 작은, ‘토굴 같은’ 벽 속에서 온갖 빛나는 별을 보다니.


어둠이 깊어진다. 나는 말 하나를 또 중얼거린다.


[램프의 말]


어둠이 슬몃슬몃 걸어온다. 나는 램프 하나를 나의 탁자에 앉힌다. 나는 램프를 들여다본다. 나는 램프로부터 깊은 말 하나를 듣는다.


‘반갑다. 당신 어둠이여. 당신이 있으니 내가 밝은 것을….’


[[강은교 / 시인, 동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