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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의 어느 기자와의 대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1. 30. 11:37

-올해는 시인이 등단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0년간 시단도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 같은데요.

"올해는 현대시 탄생 100주년이기도 합니다. 50년대부터 우리는 서구를 의식하기 시작했어요. 서구 콤플렉스 덩어리였습니다. 우리는 T S 엘리엇 혹은 프랑스의 사르트르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청계천도 '센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없습니다. 내 후배 시인하고 대담을 했는데 그 사람도 어디에 보니까 서구 시 콤플렉스가 없다고 썼어요. 지금 나는 철면피 같다고 할 정도로 해외 시에 대한 열등감이 없습니다. 이건 민족에 대한 지나친 오만이 아니라 콤플렉스의 극복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현대시가 놀라울 정도로 자기화됐다는 것, 그건 참 높이 자평하고 싶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오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시를 이야기할 때 지나온 100년 동안 있었던 성과를 인용하고 그것을 재현하면서 그것에만 머물러 있어요. 교과서에 있는 것을 배우고 나면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또다른 100년의 시작, 나의 51년의 시작은 이전에 있었던 것에 대해 더 오만해질 것, 그러니까 더 높은 단계, 더 깊은 단계, 더 커다란 단계로 나아가야 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 우리 현대시 100년이 된 이 시점에 내가 50년을 써온 이 시간을 마감하면서 내가 느끼는, 우리 한국문학 전반에 대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얘기할 것은 시인들이나 작가들이 시장의 논리에 상당히 많이 진입해 있다는 겁니다. 이건 남대문시장이나 마트, 백화점하고 전혀 다를 바가 없어요. 시인과 문학의 품성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난 모레 서울대에서 할 강연의 첫마디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는 산업이 아닙니다, 시는 펀드가 아닙니다.' 그 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게, 문학에게 무서운 게 시장입니다."

-소설가 황석영씨 등 최근 일부 문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문인들의 이런 '외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시장이라는 것과 결부됩니다. 나도 텔레비전에 나갑니다만 나는 아직까지 예능 쪽과는 엄연히 구별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연예는 연예에 맡기고 싶다는 것이지요. 연예가 넓어져서 내가 설 영토가 없다면 나는 좁은 영토로 밀려나서, 변두리에 밀려나서 맥주를 마시고 싶어요. 그냥 시인으로서."

-74년 창립, 시인이 초대 대표를 맡았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이름을 거쳐 지난해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작가회의는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바가 큰 단체였는데 민주·개혁 정권이 들어선 이후 역할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거기에 너무 과분한 짐을 주지 말아야 해요. 문학 운동을 해온 단체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창조적인 구성이에요. 실제로 74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이어지는 것이 우리 문학사에 없었어요. 재미있잖아요. 이게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몰라요. 지금의 얼굴을 가지고 모레나 글피의 얼굴을 말하지 말라는 거죠. 지금 움츠리고 있는 게 언제 두 팔 벌리고 일어나 포효할지 그건 모르지요. 이 시대에 그들이 뭔가 해야 될 때 안하는 것에 대한 불만, 그게 다음에는 만족될 겁니다. 오늘로 모든 것을 합산하지 말아요. 합산은 늘 영구미제예요."

-요즘은 이념이든 정치 문제든, 문인끼리 예전만큼 뜨겁게 논쟁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싸우지 않는 대신 친하지도 않아요. 문단이 이익 사회가 됐어요. 50년대를 즐겁게 생각하는 건 뭐냐 하면 그땐 이익이 없으니까. 생사만 있었거든요. 살아남은 자들의 기쁨. 굶주리고 술값도 없고 상거지의 옷인데도 만나면 기뻤거든요. 지독한 난치병을 남몰래 앓는 사람끼리의 동지애 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그때는 몸을 바칠 수도 있었어요. 지금은 없어요. 그런 놈이 있다면 아주 유물이지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때로는 사막일 수 있고, 오아시스일 수 있는데 사막이 많이 보이지요."

-시인은 소설도 쓰고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꿈꾸고 있는 다른 일이 있습니까.

"시외엔 할 게 없어요. 그 전에 소설도 썼는데 소설은 예술적 단계에서 하급입니다. 시에 미치지 못해요. 나의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문학계에 강요하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의 문학 체험 속에서 얘기하자면 시는 우주와 늘 교섭하는 행위거든요. 소설은 인간 굴레에서 노는 것 아닙니까. 이것 가지고는 가당치 않지요. 시를 많이 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