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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우리시의 향방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8. 14. 21:13
 

 

   2000년대의 우리시의 경향을 탐색한다는 것은 지나온 시대의 경향을 돌이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움이란 그 새로움의 전제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활성화에 따른 새로운 세계의 출현은 전통적인 시관을 압박하면서 문학의 위기, 또는 시의 위기를 담론화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러한 담론은 문학에 있어서 세계적인 조류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모더니즘이라든지,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이 외부로부터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온 조류와는 별개의 문학 또는 시적 토대가 주어져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1990년대에 중요한 담론으로 이끌었던 시의 세 가지 얼굴, 서정시와 여성시와 노동시를 중심으로 2000년대 이후의 시의 양상을 예견해 보는 것은 새로운 시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평자에 따라서 지난 90년대의 시의 양상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 양상은 다른 해석들을 포섭할 수 있는 외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서정시

 

 1990년대에 가장 활발한 담론 중의 하나가 서정시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리얼리즘을 표방한 시들이 서정성과 결합함으로써 따뜻한 서정은 대중성과 상업성을 동반하게 된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거품처럼 사그라진 민중시와 난해하다는 이유로 대중들로부터 유리된 모더니즘 시의 공백을 이러한 유형의 시들이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위안을 주는 이러한 시들은  각종 생태주의 담론에 덧붙여져 힘이 실리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시의 경향에 대해서 대중성과 상업성을 경계하는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위안의 기능 역시 문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지만, 그것만이 시라거나 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만이 진정한 시라거나 시적인 것의 본질에 가깝다고 볼수만은 없다. 따뜻한 위안의 기능은 또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현실이 위태롭고 불안한데, 불편함이 아니라 편안함만을 주는 시가 더 이상 위안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마치 인공화되지 않은 자연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데, 아니, 도시의 일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데, 여전히 낭만적인 상상력으로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현대시에 올수록 노래의 측면이 점점 더 약해지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시의 활로는 새롭게 열리지 않을까?.

  새로운 서정시의 영역은 생태나, 자연에 대한 탐미, 음유, 종교적 비의에 기댄 영토를 벗어나 디지털의 시대에 점차 왜소해가면서 익명성의 나락에 빠지는 인간과 인간 간의 유대감의 회복을 꿈꾸는 통로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2. 여성시의 미래

   이미 페미니즘의 막강한 힘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 위력을 더하고 있다. 1990년대는 여성시의 약진이 돋보이는 시대였다. 체념적이고 감상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깨뜨리고, 단지 성적 정체성에 한정되지 않는 ‘여성성’의 의미를 발견한 시대이기도 했다. 90년대의 대표적 담론 중 하나인 ‘몸’을 둘러싼 담론이 여성성의 의미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90년대의 여성시는 분신과 파괴의 전략에서 일단 성공적이었다. 탈중심적이고 탈근대적인 상상력은 여성의 몸과 성 담론을 중심으로 중심의 해체에 기여해 왔다. 여성시의 상징적 의미를 변화시키고 세기말의 시적 담론의 주축을 이끌어 왔다는 점에서도 1990년대의 우리나라의 여성시는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제 해체의 전략 ‘너머’를 고민해야할 때이다. 파괴의 전략은 파괴를 위한 파괴, 혹은 자기 파괴에 머물 위험을 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극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이제 여성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과제 앞에 서 있다. 수다, 신세 타령 따위의 ‘여성의 글쓰기’를 하나의 시적 문체로 끌어들였듯이, 지칠 줄 모르는 자기 갱신을 통해 여성시는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여성 시인과 여성시는 그들의 삶의 지반이나 시적 정체성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자유로운 위치에 서 있다. 기반의 부재, 혹은 약화야말로 이들의 목소리에 새로운 가능성을 실어줄 것이다. ‘시적인 것’의 경계를 끊임없이 허무는 개성적인 시선을 확보하고 있을 때, 이들의 시는 ‘여성성’을 넘어서서 개성으로부터 출발한 보편성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가 여성시를 담론화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상당수의 여성 시인들이 저마다 개성적인 방식으로 ‘이전의 시’를 거부하며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며. 이들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시는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한 촉각과 감성으로 인간과 자연의 보편성을 십도있게 노래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노동시

 

 90년대와 함께 시작된 거대 담론의 붕괴는 90년대의 수많은 시인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시인들은 역시 박노해, 백무산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시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80년대 이후의 민주, 민족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기층민인 노동자(농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그들을 계몽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현장의 급격한 변화는 정치, 사회적 변화와 혁명을 요구하던 참여시로서의 노동시의 영역을 축소시켜 버렸다.  

 2000년대 이후에 노동 현장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은 거대 담론의 그림자로부터 훨씬 자유롭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몸놀림의 가벼움이 이들이 한결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노동시’ 혹은 ‘노동자 시인’이라는 명명이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90년대 후반에 나온 첫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에 이어 2001년에 출간된 이대흠의 두 번째 시집 『상처가 나를 살린다』에는 더 이상 ‘노동자 시인이 쓴 시’라는

분류에 포섭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시에는 여전히 위반과 전복의 상상력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향은 많이 달라졌다. 그는 위반과 전복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새로운 언술의 전략을 실험하고 있다.

 오히려 노동자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좀더 강하게 지닌 시인으로는 최종천이 있다. 첫 시집 『눈물은 푸르다』(2002)로 시단의 주목을 받은 최종천은 밀도 있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시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 밀착해 있으면서도 무게를 덜어내 가벼워졌고. 과장되지 않은 노동자의 세계관을 형상화해 낸다. 냉소적인 가운데서 촌철살인이 빛나는 문명비판적인 시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서정시, 여성시, 노동시의 과거와 현재의 양상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 사색과 성찰의 성과물로서 시를 만들어내는데 의의를 둔다. 이 세 영역은 시인에게 있어서 별도의 영역일 수도 있으며,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자유로운 거주지 일 수도 있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세계관은 집을 짓기 위한 주춧돌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따라 시의 양상은 다양하게 변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 속에는 서정성, 여성성,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시인에게는 이것들을 새로운 구조물로 만들어내어야 할 권리와 의무가 같이 주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