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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43회 시우주시낭송회특강/시품과 인품-고명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8. 4. 23:06

□■□ 특 강


시품과 인품
- 시에 관한 몇 가지 상념들 -


고 명 수(시인, 동원대 교수)



1. 글쓰기와 문화, 혹은 정신의 질서화

인간에게는 형상화의 충동이 있다. 자기표현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방충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은 그 해소과정이라 할 모방행위와 자기표현 행위를 통해서 성취감과 함께 모종의 쾌감을 느끼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한 자기 내면의 세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시인은 이 형상화과정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재정립하게 된다. 무정형의 존재가 정제된 언어에 의해 질서화되는 과정을 형상화라 한다면, 이 형상화과정이야말로 존재가 자기를 정립해 가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언어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므로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말은 타당한 것이 된다. 그러나 한 시인의 말처럼, ‘정신적 깊이와 시적 투시력에 기초하지 않은’ 형상화란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 한 인간의 전체적 인격의 구현이면서, 운명의 한 순간 혹은 영혼의 한 순간을 반영하는 시에 있어서 언어의 밀도는 곧 삶의 밀도, 즉 삶에 대한 시인의 진정성의 정도와 비례한다. 시는 시인을 닮는다. 예로부터 시품(詩品)은 곧 인품(人品)에서 나온다 했다. “인품은 정성스럽고 충성스러운 것을 으뜸으로 하며, 초연하고 높은 절개를 지닌 것을 다음으로 친다. 분주하게 다니면서 세속의 부귀를 좇는 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고 유희재(劉熙載)는 말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등급에 따라 시의 등급도 결정된다. 글은 곧 그 사람이므로 우리는 시를 통해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이룬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이란 미완성의 존재이며 가소성(可塑性)의 존재이다. 아폴로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길항하는 가운데에 새로운 형상의 창조에 이르려는 것이 서구문화사한 과정이라고 니체가 말한 바 있지만, 개인의 내부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다소 허황하고 미정형인 채로 파동(波動)을 치는 내적 충동이 기호화과정을 거치며 고정되고 정제되어 하나의 미적 정서를 빚어낸다. 이때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예지인(Homo Sapiens)인 동시에 공작인(Homo Faber)인 인간의 이러한 의식적인 제작의식에 의해 자연은 문화로 가공된다. 자연의 상태에 인위적인 작용을 가하여 만들어진 인간세상의 모든 산물을 문화라 한다면, 시인에게도 인위적인 제작의식은 필요한 법이다.
만해 한용운이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기름이나 고추나 깨와 같다’고 대답했듯이, 우리가 문화라고 하는 것도 자연을 가공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한 방편이므로 하나의 문화생산품으로서 시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것도 무료한 생활에 기름이 되고 고추나 깨와 같은 생활의 양념이 되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것은 곧 문화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므로 문화도 먹고살아야 하는 것인데, 문화향수자인 우리가 시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발표한 시를 읽고 누리는 기쁨은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거나 시가 주는 하나의 정서적 기쁨일 것이다. 즉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주는 기쁨이다. 이때 그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은 그 발견의 지평이다.


2. 시인의 계산과 도박

모든 예술품은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유희본능이든 흡인본능이든 자기표현본능이든 그것은 생명체의 절대적인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종자 때부터 내부법칙에 의하여 생물의 미래 형상이 정해지듯이, 거기에는 강력하면서도 확고부동한 종의 자율법칙이 작용한다. 로제 카이유와Roger Caillois 의 적절한 비유처럼, 진정한 예술가는 물맞이게류나 비단고둥처럼 혹은 집을 짓는 새처럼 시작 행위에 임해야 한다. 이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무엇인가를 추가하고자 하는 야망을 보이는 희귀생물들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진정한 하나의 예술가라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에 새로운 아름다움과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증보자(增補者)가 되어야 한다. 생생한 천연미가 있으면서도 독창적인 오브제의 창조자로서 시인에게는 말하는 방식에서나 형상화하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움이 요구된다. 새로운 상상력, 어법, 리듬, 세계관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예술의 계산과 도박도 시작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키이츠의 관점이나, 󰡐미는 모험이다󰡑라는 화이트헤드의 관점 혹은 󰡐형식은 내용의 연장󰡑이라는 크릴리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거기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혼과 형상화에 있어서의 대담성이 요구된다. 위와 같은 시의 제반 요소들에 있어서 독창성을 확보할 때 비로소 예술품으로서의 시는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가치 판단에는 막스 자콥의 이른바 엄격함의 심연󰡑을 통과한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만이 갖는 언어의 밀도가 전제조건으로 요구된다.


3. 언어 세탁공의 꿈

파시스트적 속도로 치달려온 인류의 문명은 이제 한계에 부딪쳐 있다. 유하의 시 구절처럼, “쓸데없이 부지런한 욕망들이/코끼리의 영토를 망쳐놓았다”. 평원 위를 느리게 걸어가는 코끼리처럼 현대의 시인들은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산책가’처럼 거리를 배회한다. 그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들이 스치고 간 그 모든 것들에게” ‘생명의 잎사귀’를 달아주는 존재다.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새싹을 나누어주는 존재들”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들의 사명이자 임무이기도 한 것들이다. 그 코끼리들은 오늘도 ‘긴 코를 구부려’ 이 세상에 거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유하의 시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의 하나인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읽어보자.

내가 사는 동네 세탁소의 아가씨는
옷 수선을 아주 잘하죠
헐겁거나 꽉 조이는 바지들을
감쪽같은 맞춤복으로 고쳐놓지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음미하듯
나는 그 옷을 입어요

솔벤트 내음 가득한 세탁소에 가면
그녀는 살짝 하얀 치아를 보이며 말하곤 하죠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옷들에게
나는 많은 걸 배운답니다
그들에겐 새옷이 지닌 오만과 편견이 없지요
더러움의 끝에서 다시 순백의 빛을 보았으니까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그래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난 그녀의 손길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꿈꾸어요
어둠의 끝에서 다시금 흰눈처럼 빛나는
옷들의 영혼을 꿈꾸어요
- 유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전문

시인 유하가 위의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언어에의 꿈은 모든 시인들이 꿈꾸는 ‘이상태’(ideal state)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에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 ‘오만과 편견이 없는’ 올바른 문장과 더러움의 끝에서 ‘순백’의 빛을 보고, 어둠의 끝에서 흰눈처럼 빛나는 불굴의 문장을 지향하는 이 시인의 꿈이 잘 노래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밝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이 시에는 바람직한 시의 모습을 ‘세탁소’라는 공간을 통해서 보여준다. 시인 역시 일상어에 묻은 때를 말끔히 씻겨내고 새로운 옷으로 탈바꿈시키는 언어의 세탁공이 아닌가.


4. 비틀기와 에둘러 말하기로서의 시

시인은 대개 이미지를 통해서 말하고 사고한다. 이미지란 󰡐에둘러 말하기󰡑의 한 방법이므로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으로 보여줌으로써 보다 진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미지에 의한 사고의 비틀기는 인간의 사유를 보다 더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것은 창조적 직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쏟아놓고 보면 삶도 죽음도 한 깡통 속에 담겨 있었다

잠든 고요 속으로
겁탈하듯 슬그머니
손 집어넣다
물컹하고 쥐이는
숨어있는 사물의 팅팅한 육감에
소스라치게 놀란

어느 소리의 굳어있는 얼굴
온밤내 골목안
효수 대가리처럼 방범등이 짓궂게 걸려 있다

인근 갓난 풀들의 목구멍 속에는
삼키다 만
잔광 몇 도막
생선가시처럼 아프지 않게 박혀 있다
무심히 반짝거린다
― 홍신선, 「마음 經․19」 전문

시인이나 화가들은 독자나 미술애호가들이 즉각적으로 자신의 비밀을 꿰뚫어보는 즐거움을 나중에 느끼도록 지연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의미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장애물의 숫자를 늘리며 직설적인 표현과 충실한 실물모방을 피한다. 그러므로 진술과 묘사를 적절히 배합하여 최대한 에둘러 말한다. 시의 제목이 「마음 經」이다. 시인은 마음의 경전을 써 가는 기록자인지도 모른다. 다만 감각과 정신을 교차하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본의를 숨겨 놓는다. 메시지를 암호화한다. 독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코드를 해독한다. 화자는 객관적 시점에서 마음의 풍경을 진술한다. 그것은 󰡐소리󰡑의 이미지를 통해서 나타난다. 내면의 그 󰡐소리󰡑는 아주 생생하게 감각적․관능적으로 그려져 있다. 󰡐골목안󰡑의 세계엔 󰡐방범등󰡑이 󰡐효수 대가리처럼󰡑 걸려 있다. 음산한 세기말의 풍경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의 풍경 󰡐인근󰡑에는 새로운 생명의 󰡐갓난 풀들󰡑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잔광󰡑이 󰡐무심히󰡑 반짝거린다. 달관의 포즈가 느껴진다. 죽음의 골목안 비명소리와 무심히 반짝거리는 생명의 소리가 대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첫행의 에피그람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삶 속에도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도 삶이 있는 것이다. 󰡐쏟아놓고 보면󰡑 결국 생사란 하나의 󰡐깡통 속󰡑, 하나의 경계인 것이다.

내 마음 마당 한켠
쐐기풀이 자란다.
피해다니다 맨살에 닿으면
송충이에게 쏘인 것과 같은 아픔을 준다.
아리한 것이 한참을 간다
넘어져 쐐기풀 숲에 몸을 굴렸다 하면
108마리 송충이 일시에 쏘는 아픔이 있다.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아픈 곳으로 몸이 오무려진다.
시인으로 태어나 건달로 사는 이의 아픔이 이럴까?
시퍼렇게 갈아야 한다, 시퍼런 낫으로 한바탕
쐐기풀을 베어내야 한다.
못할 것도 없다.
마음 한번 돌리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그래 자꾸 아프게 해라.
지나치면 처방을 할밖에 없다.
― 김병환, 「回心」 전문

위의 시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관념적 세계를 유기적으로 문맥화되어 있는 이미저리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고양의 원리와 전개의 원리에 의해 이미지들은 확장되거나 축약되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미저리를 통하여 시인은 자신의 내면의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에둘러 말하기에 의한 사상의 외면화라 할 수 있다. 온갖 번뇌가 자라고 있는 마음의 마당 한 켠에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온갖 󰡐쐐기풀󰡑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란다. 때로 화자는 그것에 쏘이기도 하고 그 숲에 쓰러지기도 하며 아픔을 느낀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높은 경지에서 노닐며 인간정신의 고양을 맡아야 할 시인의 사명을 앞에 두고도 삼독(三毒)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로 살아야 하는 모순 앞에서 시인은 번민한다. 비록 사바세계의 한가운데 거처를 두고 있지만, 거기에 주저앉을 수 없는 것이 시인된 자의 갈 길이 아니던가.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 한 귀퉁이 조그만 원 안에서
수화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다

수화란 어떤 말의 번역이 아니라
미처 할 수 없었던 말의 번역이 아닐까

문득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거나 급선회하는 새들
느닷없이 피어 있는 길가의 꽃
급박하게 휘어진 조그만 길목
그리고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당신의 이야기

그것이 수화인 줄도 몰랐던
조그만 손짓들

지금은 까마득하기만 한,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 류시원, 「수화」, 전문

5. 사건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서의 시


1966년 가드너 박사는 1년생 야생 침팬지 워슈washoe에게 아메슬란Ameslan이란 수화를 가르쳤다. 그 결과 10년 만에 어휘 160개와 二語文 300개 이상을 습득케 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이에 앞서 있었던 비키vicki란 침팬지에게 영어 단어를 가르쳤던 결과와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비키의 경우는 겨우 네 단어를 구사하는데 그쳤었다고 한다(󰡔과학과 철학󰡕5집 참조). 이로 보면 손짓언어가 음성언어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언어였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손을 일컬어 ‘움직이는 뇌의 일부’(칸트), 혹은 ‘정신의 칼날’(부르노프스키)이라 했던 것처럼, 갑작스런 지각변동으로 밀림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초원에 남게 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직립한 이래로 앞발이 이동기능에서 해방되면서 손은 도구를 사용하고 나아가 도구를 제작하게 되었으며 도구의 제작은 뇌의 발달을 가져와 의식을 탄생시켰고 의식의 발달이 결국은 언어를 탄생시키게 되었던 진화론적 설명을 참조할 때, 손가락은 최초의 알파벳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손으로 하는 언어표현, 즉 수화의 발생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류시원의 시는 수화 뉴스를 소재로 하여 수화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가하고 있어 읽는 재미를 준다.
먼저 수화란 ‘어떤 말의 번역이 아니라/미처 할 수 없었던 말의 번역이 아닐까’ 라는 새로운 의미 부여이다. 시란 평범한 일상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아닌가?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언어란 참으로 불완전한 것이다. 숱한 오해들과 싸움들이 처음에는 말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자크 라캉이 말한 것처럼 시니피앙은 끊임없이 시니피에로부터 미끄러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떠도는 시니피앙’들로 가득하며 하나의 약속의 체계, 관계와 관계의 기호체계에 불과한 언어에 의해 우리의 주체가 형성된다고 볼 때, 불변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관계들의 그물망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존하고 있던 이 거대한 기호체계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엄청난 억압을 받으며 죽을 때까지 이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를 지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언어를 배우는 순간부터 인간은 충만한 행복으로 가득했던 어머니와의 원초적인 시간에서 쫓겨난 소외되고 마는 것이며 이러한 소외를 받아들일 때에만 사회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불완전한 언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미처 할 수 없었던 말’ 들이 많은 것이다. 어쩌면 시란 바로 이 ‘미처 할 수 없었던 말’들을 마저 하려는 인간의 순수한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보다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려는 눈물겨운 노력들이 시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잃어버린 꿈과 억압된 현실 사이의 틈새에서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문득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거나 급선회하는 새들’이나 ‘느닷없이 피어 있는 길가의 꽃’들은 있는 것이며, 그러한 ‘생의 약동’ 의 순간은 원초적인 언어인 수화 즉 시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불완전한 언어체계와 그러한 언어의 논리와 법칙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시니피에의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시니피앙들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인의 언어뿐이 아니겠는가. 탄탄대로의 랑그의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오는 시니피에의 세계, 의식의 세계로부터 쉼 없이 미끄러지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 그 생의 ‘급박하게 휘어진 조그만 골목’들을 포착할 수 있는 것도 또한 시의 ‘충만한 말’parole pleine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이데거는 공식적인 언어의 법칙 그러니까 랑그의 체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발화를 ‘담론Rede’이라 하고, 그러한 공식적인 담론의 체계에 갇힌 억압된 자아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내부의 틈새를 채우는 또 다른 발화행위를 ‘잡담Gerede’이라 했다. 어쩌면 시란 ‘잡담’의 세계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명제는 이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라캉적 명제로 전환되면서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확고하게 믿어왔던 자아란 것도 결국은 다양한 관계들의 그물망에 의해 유동적으로 형성되는 ‘과정 중의 주체’에 불과한 것이라는 데에 생각에 이르면 그러한 서구문명의 자아중심 관념이 얼마나 중대한 착각이었는지, 얼마나 커다란 幻 Maya이었는지를 알게 되고 이러한 생각은 이미 2500년 전에 붓다께서 이미 설파한 진리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모든 존재는 어떤 인연 즉 관계의 그물망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항구불변의 실체는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는 데서 모든 아집과 번뇌와 갈등이 생겨나는 것임을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수화는 어쩌면 ‘그것이 수화인 줄도 몰랐던/조그만 손짓들’ 즉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놓쳐버렸던 수많은 관계들과 말씀들, ‘지금은 까마득하기만 한’ 숱한 생의 기미들이며,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의 비밀의 암시가 되는 것이다. 음성언어보다 더 원초적인 손짓언어인 수화를 통해서 시인은 결국 잃어버린 인간의 꿈과 소망을 복원해내고 싶은 근원적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공식적인 담론체계 속의 한 단어에 불과했던 말이 다양한 시니피에의 의미망으로 읽혀지는 것, 삭막하고도 메마른 소통체계의 시녀에 불과하던 하나의 말이 보다 ‘충만한 말’로 읽혀질 때 독자 자신의 결핍도 어느 정도 메꿔질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시를 읽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수화’라는 모국어의 한 단어가 지닌 새로운 의미를 만났고 보다 풍요로운 모국어 하나를 더 얻어 가지게 된 것이다.

누나라는 말 속에는
밭이 있고, 언덕이 있고, 돌담이 있습니다.
그러한 풍경 속에는 또
서귀포라는 아름다운 항구도 있습니다.

오늘 나는 서귀포의 돌담길을 거닐다가
누나라는 말에 너무나 어울리는 풍경이다 싶어
누나! 하고 한번 불러 봤습니다.
내게 없는 누나가
저 돌담의 오랜지밭 한가운데서 오렌지를 따다가
광주리를 팽개치고 달려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지요.
그러면, 내 누나는 밭가에서
놀란 눈으로 나의 가방을 받아들이겠지요?
네 색씨는? 네 아이들은? 아버님은? 하며
뒤가 없는 질문도 연방 던져오겠지요?
그러다가 눈 주위가 갑자기 붉은 귤밭이 될 누나.

지금 서귀포의 전망 좋은 찻집에 앉아서
그런 누날 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니,
서귀포의 골목, 돌담, 오렌지밭이 내게
그런 누나가 한없이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누나가 얼마나 아름답고 포근한 섬인지도.
- 김영남, 「서귀포는 ‘진’이 누나를 생각나게 한다」 전문

위의 시는 우리가 점점 잃어가는 고향의 모습이 누나에 대한 사랑과 결부되면서 아름다운 언어에의 몽상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 시는 낭만주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정지용이나 미당, 송수권 등으로 이어지는 누이콤플렉스 계열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시 역시 결핍된 자의 노래, 몽상과 그리움의 세계를 특정 지역공간을 배경으로 노래하고 있다. 온 지역으로 퍼져가는 그리움의 정체는 누군가를 몹시 사랑해 본 사람은 안다. 굳이 프로이드의 언명을 빌지 않더라도 모든 예술이란 것이 소망충족의 백일몽의 일종이라 한다면, 거친 세계에 내던져진 화자가 삶에 지친 중년에 접어들어 어쩌면 그 옛날, 잃어버린 모성적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한 그리움의 대상인 누이를 그리워하되, 그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제주도의 풍토를 배경으로 친근감 있게 불러본 목가적인 시다. 허망한 시적 기교에 탐닉하던 이 시인이 위와 같이 순연하게 마음을 열고 쉽게 풀어내는 진정성의 시가 왜 독자들에게 더 공감을 자아내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근자에 시들은 많이 쏟아져 나와 양적으로는 매우 풍요로운 것 같으나 오래도록 두고두고 반복해서 다시금 읽고 싶은 시는 많지 않다. 조지훈의 말처럼 귀에 쟁쟁 울리는 듯한 음악성을 가진 시, 눈에 선하게 그 장면이 떠오르는 투명한 그림이 있는 시,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아 감동을 주는 시가 그립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시, 언어예술로서의 시의 기품을 갖춘 시, 정신의 기율을 느낄 수 있는 시가, 그래서 즉각 암송하고 싶은 시가 더 많이 발표되기를 기대해 본다. 언어에 대한 고민이 없이 지나치게 안이한 일상어로 쉽게 씌어진 시는 별로 읽고 싶지 않다. 또 너무 교조적으로 흘러가는 시도 거부감이 온다. 또 지나치게 소아병적인 자아도취의 시들도 따분하다. 어느 선배시인의 충고처럼, 덜 익은 과일을 함부로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하지 말고 무르익어 터져 나오는 그런 충만한 언어의 열매들을 기다려보고 싶다. 무성의하게 내뱉는 경망스러운 시보다는 진실한 삶의 체험이 묻어나는 시,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영혼의 양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 푹 익어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는 한 잔의 술과도 같은 그런 시를 자주 그리고 많이 만나고 싶다.


6. 시인의 사명과 기쁨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면 우리는 지상의 모든 고뇌를 이겨낸 영원한 평화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지상에 내던져진 우리네 삶 자체가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것이기에 근원적으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면, 이 ‘자아’와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투쟁은 장엄한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비극적 운명 속에 인생의 영광도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비극적인 삶의 수레바퀴 위에서 그 이면에 숨은 비밀의 의미를 밝혀내고, 우리의 자아와 실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고정관념들, 습관들, 판에 박힌 단조로운 일상의 무관심과 무감동의 장벽을 꿰뚫고 들어가서 우리 내부에서 잊혀진 혹은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진실과 지식들을 일깨워내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라면 셸리의 말처럼 “세계를 가리고 있는 친숙의 베일을 벗겨내고, 벌거숭이로 잠자고 있는 아름다움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정의는 타당하다. 인생과 사물의 비극적 본질로부터 그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면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나와 삶을 꿰뚫고 흐르는 독류(毒流)를 황금물로 바꾸는” 연금술사의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식은 거대한 존재의 풍경을 내다보는 창이며 외부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온갖 진동과 감촉을 받아들이는 고감도 안테나와도 같다. 존 홀 휠록의 표현처럼 그것은 “끝없이 펼쳐지는 삼라만상의 파노라마가 모두 비치는 절묘한 거울”이며 우리의 인생은 “의식의 거울에 비친 삼라만상의 형태와 무늬를 엮어 짠 개인적인 환상의 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란 결국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신비로운 의미를 지니는 한 순간을 건져내어 시간을 초월한 형식에 가둠으로써 그 순간을 기록하여 영구히 보존하려는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 만들어낸 하나의 결실인 동시에 새로운 언어 질서를 통해서 기억에 남을 만한 그 특별한 경험을 타인들에게도 재현해 보여줌으로써 그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시인의 사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인으로서의 기쁨도 결국은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어떤 것, 우리가 알던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제 새롭게 발견하여 처음으로 그 의미가 완전히 밝혀진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의 기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에서 항상 문제는 매체인 언어의 문제다. 산문의 언어는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하지만, 시는 언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시는 아이디어나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단어(單語)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라르메의 말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만한 언명이다.


7. 존재의 고통과 사랑

존재의 본질은 고통이며 삶이란 한없는 그리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읽을 때마다 이 점을 떠올리게 된다.

나 너무 오래 잠 들었었네
풀잎 헤치고 얼굴 환히 내미네
포플라 나무 아래
다리뻗고 앉아있는 그대 보이네

저 햇빛들 눈이 시려
눈 감았다 눈 다시 뜨네
이렇게 뻔한 내 얼굴
그대 알아보지 못하네
그대 발치께로 다가가는 내 그림자
하얗게 짧아지네

저승을 건너온 이승
이곳에서도 내 꿈은 뻗어가네
저승이 내 뿌리이고 이승이 내 꽃잎이네

풀잎들 내 목을 받쳐주네
내 목이 점점 길어지네
그대 발치께에 앉은뱅이꽃으로 피어있네
- 이나명, 「술래잡기 2」 - 앉은뱅이꽃」 전문

이승과 저승을 윤회하는 화자에게 그리움은 끝이 없고 그러기에 ‘꿈’은 한없이 뻗어간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화자는 ‘풀잎을 헤치고’ 얼굴을 내민다. 그대 또한 삶에 지쳐서 ‘다리 뻗고 앉아’ 쉬고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대에게로 다가가지만 나는 결국 그대에게 안기지는 못한다. 술래잡기의 삶, 삶이란 어쩌면 술래잡기가 아닐까. 소월의 시대에도 ‘꽃’은 언제나 ‘저만치’ 홀로 피어 있었다. 이 시에서는 ‘저승이 내 뿌리이고 이승이 내 꽃잎이네’가 시의 눈이다. ‘저승을 건너온’ 화자에게 있어 이승은 꽃피워야 할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에게 도달해야 나는 활짝 꽃 피어날 수 있을 텐데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으므로 나는 한없이 ‘그대’를 기다리며 사슴처럼 길어지는 목을 가누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시인은 언제나 숨어있고 싶은 것일까(「술래잡기 1」). 이 시는 영물시(詠物詩) 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앉은뱅이꽃’이라는 사물에 기탁(寄托)하여 삶의 꿈과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기탁의 방법은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언외(言外)의 뜻을 품게 한다. 이 때 기탁이 두텁고 풍부할수록 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 위의 시에서는 인간존재의 숙명적 한계성을 앉은뱅이꽃에 이입시켜 삶의 조촐한 꿈을 표출하고 있다.
어느 시대이든 시는 인간의 영적 상황을 가장 친근하게 표현해 준다. 특히 현대로 오면서 인간은 수많은 환멸과 절망을 경험했다. 과학은 발달했으나 참된 삶으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더욱 심각해졌다. T.E.흄의 말처럼 “인간은 단지 비참한 동물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시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보게 되고 이러한 공동운명체로서의 동질감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인과의 사슬을 끌고 가는 꿈과 동경의 동물”이라면 우리는 보다 더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과 세계 사랑하고 시를 통하여 인정과 미덕과 지혜와 인내와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시인의 이름에 걸맞는 인품과 덕망과 예지를 갖추어야 할 것이며, 현미경의 눈과 아울러 망원경의 눈을 겸비한, 한 시대의 문화의 정수를 포착할 수 있는 포괄적인 안목을 갖춘 지식인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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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과정을 졸업(문학박사)했다. 시집으로는 『마스터 키』, 『금시조를 찾아서』 외 다수가 있고. 제 4회 <<문학과 창작>>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원대학 미디어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처 : 시우주 시낭송회
글쓴이 : 묘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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