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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편지] 길 잃은 씨앗들 ‘보호’에 막힌 '녹색 감옥’의 역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6. 3. 16. 14:05

[나무편지] 길 잃은 씨앗들 ‘보호’에 막힌 '녹색 감옥’의 역설

★ 1,331번째 《나무편지》 ★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

   지난 주의 《나무편지》 내용이 좀 복잡했지요. 그래서 먼저 그 내용을 타임라인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① 동백나무에 꽃이 피면 동박새가 찾아옵니다. ② 동백나무는 꽃가루받이를 이루고 열매를 맺습니다. ③ 그 씨앗을 노리는 곤충이 있습니다. 동백밤바구미였지요. ④ 동백밤바구미는 긴 주둥이로 열매 껍질을 뚫고 씨앗 위에 알을 낳습니다. 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들은 씨앗을 양분으로 자랍니다. ⑥ 그래서 동백나무는 열매 껍질을 동백밤바구미의 주둥이 길이만큼 두껍게 무장합니다. ⑦ 동백나무는 얼마 뒤 두꺼운 껍질을 열고, 잘 여문 씨앗을 땅바닥에 떨어뜨립니다. ⑧ 들쥐 종류들은 씨앗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가져가 고이 묻습니다. ⑨ 들쥐들이 먹고 남은 씨앗은 살아남아 새싹을 틔우고 큰 나무로 자랍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번 《나무편지》의 이야기였습니다.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의 동백나무 노거수에서 피어난 동백꽃.

   지난 번 《나무편지》의 끝 부분에서 소개했던 일본인 과학자들의 논문 내용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동백나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일본의 생태학자인 도호쿠 대학교 생명과학연구과 아베 하루에(阿部晴恵, Abe Harue) 교수 연구팀이 2013년에 국제 학술지 《PLOS ONE》 제8권 제4호에 발표한 흥미로운 논문입니다. “화산섬 생태계에 드러난 식물–새 상호작용의 회복탄력성: 동박새가 꽃가루받이를 매개하는 동백나무(Resilient Plant–Bird Interactions in a Volcanic Island Ecosystem: Pollination of Japanese Camellia Mediated by the Japanese White-Eye)”라는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서 아베는 화산이 터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동백나무와 동박새의 관계가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걸 증명합니다.

옛 사람살이의 자취를 품고 살아있는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80킬로미터 떨어진 일본 미야케지마 섬에서의 관찰 연구 결과입니다. 이 섬에서는 지난 2000년에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섬 전체가 잿더미가 됐지요. 연구진들은 여기에서 동백나무의 생태 변화를 관찰했어요. 잿더미 속에서 동백나무가 어떻게 생존력을 회복하느냐에 대한 연구였지요. 이 연구에서 확인된 결과는 놀랍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화산재에 의해 극심하게 망가진 지역일수록 동백나무의 회복력이 더 빨랐으며, 유전자 다양성이 훨씬 효과적으로 늘어났다는 겁니다.

천연기념물인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의 동백나무 거목.

   동박새 덕분인 거죠. 동백나무 꽃의 꿀을 가장 중요한 식량으로 삼는 동박새는 폐허 지역에서 몇 그루 남지 않은 동백나무의 꿀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더 멀리까지 날아다녀야 했다는 겁니다. 가까이에 많은 동백나무가 있을 때에 비하면 더 멀리 날아가 유전적으로 차이가 있는 동백나무까지 찾아가야 했다는 거죠. 먹고 살기 위한 절박한 이유였던 겁니다. 결과적으로 화산 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지역의 동백나무가 맺은 씨앗에서 오히려 유전적 다양성이 증가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 연구 결과는 매개동물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멀리 이동할 수 있는 조건이 식물의 꽃가루받이를 더 활성화하고, 유전자의 다양성을 높여서 그 숲 생태계의 건강성을 높인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의 동백정 오르는 길.

   여기에서부터 이제 우리 동백나무의 상황을 돌아보게 됩니다. 동백나무는 주로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 살지만, 사람들이 워낙 좋아해서 아름다운 군락지의 상당 부분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의 동백나무 군락지는 생태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동백나무가 자연 상태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가장 북쪽 지역이 우리나라인 거죠. 보호할 가치는 넘칩니다.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에서 ‘제주 위미 동백나무군락’에 이르기까지 많은 군락지가 천연기념물 지방기념물 등의 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물론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지 않은 동백나무 군락지도 적지 않습니다. 남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니, 자연 상태의 동백나무 군락지를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을 지키는 또 하나의 동백나무 거목.

   그런데 보호구역이라는 보호막이 동백나무의 건강성을 높이는 데에 잔인한 ‘사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1996년에 발표한 연구 논문, 〈알로자임 연구에 기반한 한국 천연기념물 동백나무 집단의 유전적 평가(Evaluations of the natural monument populations of Camellia japonica (Theaceae) in Korea based on allozyme studies)가 있습니다. 남부의 동백나무 군락지를 대상으로 식물유전학자인 경상국립대학교 생명과학부 정명기 교수 팀이 진행한 연구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동백나무 군락지 안의 나무들끼리는 유전적으로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유전자 다양성이 낮은 편이라는 거죠. 꽃가루받이 과정도 그렇고, 씨앗 산포 과정도 그 숲 바깥으로 뻗어 나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건 앞에서 일본의 동백나무 연구팀이 화산섬에서 진행한 연구 결과를 돌아보면 더 명백해집니다.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로 지정한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동박새가 숲 바깥으로 멀리 이동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생겼을 때, 그 숲의 동백나무들에게는 유전자를 더 다양하게 확대할 기회가 생깁니다. 물론 일본의 연구는 꽃가루받이 단계의 연구이고, 지금 이야기하는 건 씨앗 산포 과정 이야기이니,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원리는 똑같습니다. 동박새는 이동성이 높은 새여서 이동해야 할 상황만 생긴다면 숲 바깥을 오가며 동백나무의 다양한 유전자를 옮겨줍니다. 그러나 이미 유전자를 담은 씨앗을 맺은 동백나무의 유전자를 옮겨줄 들쥐들의 이동은 사람들이 쳐놓은 보호구역 울타리에 의해 철저히 차단돼 있습니다. 게다가 들쥐는 원래부터 이동거리가 크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보호 군락지에서는 구획화한 바깥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유전자 다양화의 기본 조건인 ‘장거리 산포’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명확한 징후입니다.

법당 뒤로 펼쳐지는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9곳과 그렇지 않은 8곳을 비교 연구한 정명기 연구팀의 연구에 따르면 “유전적 변이는 향후 적응적 변화나 진화를 위한 필수 전제 조건”임을 바탕으로 “유전적 변이가 낮은 지역의 동백나무들은 유전적 변이가 풍부한 동백나무 개체군보다 멸종 위험이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고 결론에서 이야기하면서,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전남 신안군 홍도와 전북 고창군 아산면의 군락지가 가장 우려되는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동백나무는 현재 “높은 수준의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연 서식지 파괴 증가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직은 보호구역의 동백나무가 절박한 생존 위기에 처한 건 아니라고 결론은 내렸지만, 진행 중인 다른 연구 과정도 세심하게 살펴볼 것을 주장했습니다.

신라 때에 활동한 도선국사가 조성했다고 전하는 ‘광양 옥룡사터 동백나무 숲’.

   여기에 지금 우리의 동백나무가 겪고 있는 생태적 한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울타리와 구획은 씨앗을 입에 문 작은 짐승들이 숲 밖으로 나가는 길까지 원천적으로 봉쇄한 겁니다. 보호구역 안의 동백나무들이 생태적으로 고립되어 가는 상황인 거죠.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한 씨앗들은 어미나무 밑에서 햇빛 경쟁에 밀려 말라 죽거나,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채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요. 선의로 설치한 ‘녹색 사슬’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씨앗의 자유를 옥죄고 있는 겁니다. 섬이 아닌 육지에 살면서도, 섬처럼 고립되어 갇혀버린 상태가 된 거죠. 동백나무를 사랑해서 지키고자 했던 우리가 오히려 동백나무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동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게 됩니다.

‘광양 옥룡사터 동백나무 숲’에서 피어난 동백나무 꽃.

   우리나라의 동백나무 군락지는 대부분 파편화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닙니다. 자연유산으로 지정한 보호구역은 물론이고 대개의 동백나무 군락지 바로 바깥으로는 도로와 농경지 등으로 차단돼 있습니다. 씨앗을 문 들쥐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기후 변화까지 군락지의 동백나무를 위협합니다. 갈수록 더워지는 날씨를 따라 동백나무는 북쪽으로 이동해야 하지만, 군락지 주변의 차단막에 갇힌 동백나무는 이동할 수 없습니다. 보호구역이라는 차단막은 ‘죽음의 벽’입니다. 이동은 불가능합니다. 보호군락 안에 들어있는 동백나무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서 나무가 살아가는 게 처음부터 위협이 아닐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고맙습니다.

- 3월 16일 아침에 고규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