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편지] 동백나무 숲에서 이뤄지는 아슬아슬한 거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동백나무인 ‘나주 송죽리 동백나무’의 줄기.
조슈아트리가 사라진 거대 땅늘보를 기다리며 수만 년의 고독을 견디고 있다는 이야기가 지난 번 《나무편지》였습니다. 지난 주에 조슈아트리와 비슷한 처지에 처한 우리 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겠다고 했지만,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을 실제로 함께 답사하자는 안내문을 먼저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의 나무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꽃가루받이 과정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예전의 공진화 과정을 이어가는 조슈아트리를 이야기하다가 떠오른 우리 나무는 바로 이즈음 우리 땅 곳곳에서 한창 화려하게 피어나는 동백나무입니다.

‘금사정’이라는 작은 정자 앞에 선 ‘나주 송죽리 동백나무’.
지역에 따라 벌써 피었다 시들어 떨어지기도 했지만, 많은 곳의 동백나무는 아직 꽃봉오리만 여문 채일 겁니다. 남부 지방에서는 이미 피고 지기를 반복했지만, 내륙의 많은 지역에서는 3월 말 지나야 비로소 붉은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우리의 동백나무가 처한 사정은 조슈아트리와 전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비슷한 처지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클라멘이나 유카를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동백나무에 대해서도 꽃가루받이 단계인 ‘꽃가루받이(수분)증후군’과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 ‘씨앗산포증후군’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하늘 향해 솟아오른 ‘나주 송죽리 동백나무’의 줄기.
겨울에 꽃 피우는 동백나무는 조슈아트리에게 유카나방이 꽃가루받이를 이뤄주는 것처럼 분명한 충성 고객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잘 아시는 ‘동박새’입니다. 더 자세한 관찰과 연구에 따르면 동박새 외에도 직박구리도 동백나무 꽃의 꽃가루받이를 돕는다고 합니다. 때로는 햇살 좋은 날에는 겨울에 활동하는 몇 종류의 곤충들도 동백나무 꽃을 찾아와 꽃가루받이를 돕는다고 하지만 그건 대부분 우연적인 결과에 불과합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해도 대개의 경우에 동박새가 동백꽃의 꽃가루받이를 이뤄줍니다. 충성 파트너는 동박새라는 게 변함없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동백나무 품종의 화려한 꽃송이.
그렇다면 조슈아트리를 이야기할 때와 똑같은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다. 동박새에 방문에 의해 동백나무는 꽃가루받이 단계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꽃가루받이로 맺은 씨앗을 멀리 퍼뜨릴 중요한 다음 단계의 일이 남았습니다. 이른바 씨앗산포 단계는 어떻게 진행할지, 그 파트너는 누구일지 궁금해집니다. 동백나무는 이 중요한 작업에 누구를 길들였을까요? 동백나무의 ‘씨앗산포 증후군’ 과정은 ‘수분 증후군’, 즉 동백나무와 동박새와의 관계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동백나무 씨앗을 옮겨주는 그 누군가의 작업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씨앗산포는 꽃가루받이 과정 못지않게 중요합니다만 그 사정을 짚어보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리 많지 않은 편입니다.

동백나무 품종의 화려한 꽃송이.
조용조용 눈에 띄지 않고 씨앗을 옮겨주는 그 파트너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먼저 동백나무 열매와 씨앗의 구조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백나무 씨앗의 생김새와 구조에 비밀을 밝힐 실마리가 들어있을지 모릅니다. 동백나무는 가을 깊어지면 꽃 진 자리에 둥글고 단단한 열매를 맺습니다. 생뚱맞다 싶을 만큼 두툼한 껍질에 둘러싸인 열매입니다. 처음에 물기를 머금고 초록 빛이었던 이 열매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갈색으로 변하면서 나무토막처럼 바짝 마르고 딱딱해집니다. 안쪽의 물기도 함께 마르면서 열매 껍질에 난 세 개의 선을 따라 두툼한 껍질은 갈라지면서 벌어집니다. 때로는 네 개로 갈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셋으로 갈라집니다. 이 과정을 식물학에서는 ‘열개(裂開)’라고 표현합니다.

‘순천 이곡리 동백나무’의 늠름한 자태.
껍질이 벌어지면 그 안에서 흑진주처럼 반질반질하고 묵직한 암갈색의 씨앗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지요. 꽤 무거운 편이어서 바람에 날아갈 수 없는 씨앗입니다. 중력에 순응하여 어미나무의 그늘 아래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씨앗에게 ‘빛이 닿지 않는 죽음의 구역’일 수 있습니다. 햇살 닿지 않는 이 자리에서 살아남아 새싹을 틔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거든요. 씨앗이 어미의 품을 벗어나 새로운 영토로 나아가려면 누군가의 다리가 필요합니다. 이 사정을 생태학자 대니얼 얀젠(Daniel Hunt Janzen, 1939)과 조지프 코넬(Joseph Hurd Connell, 1923~2020)은 ‘얀젠-코넬 효과’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사실입니다. 얀젠-코넬 가설은 앞으로도 씨앗산포를 이야기하면서 더 이야기해야 할텐데요. 따로 자리를 마련하게 될 겁니다.

‘순천 이곡리 동백나무’의 뜸직한 줄기.
동백나무의 씨앗을 옮겨주는 누군가를 찾기 전에 의문 하나를 더 풀어야 합니다. 나뭇가지 위에 달려있던 열매의 껍질도 두꺼웠지만, 껍질 안의 씨앗의 껍질도 왜 그리 단단한가 하는 이유입니다. 열매 껍질이 두꺼운 건, 동백나무의 씨앗을 지키기 위한 동백나무의 전략입니다. 동백나무의 씨앗을 노리는 곤충이 있거든요. 동백밤바구미(Curculio camelliae)가 그 곤충입니다. 동백밤바구미는 주둥이로 열매 껍질을 뚫고 동백나무의 씨앗 위에 알을 낳는데요. 그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가 씨앗을 파먹으며 자라거든요. 그걸 막기 위해 동백나무는 열매 껍질을 두껍게 키운 겁니다. 동백밤바구미의 주둥이가 긴 지역에서는 동백나무 열매 껍질도 그만큼 두껍고, 동백밤바구미의 주둥이가 짧은 곳에서는 꼭 그 길이 만큼 얇게 발달한다는 겁니다. 동백밤바구미의 주둥이 길이가 동백나무 열매의 껍질 두께인 겁니다.

‘순천 이곡리 동백나무’.
그러면 씨앗의 껍질은 왜 이리 단단할까요. 물론 거의 모든 씨앗의 껍질은 단단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장치인 거죠. 그래서 씨앗마다 그 껍질을 벗기고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동물은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백나무의 씨앗을 노리는 건 누구일까요? 꽃가루받이 파트너인 동박새는 그걸 먹을 수 없습니다. 몸 길이가 1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동박새가 삼키기에 동백나무 씨앗은 너무 큽니다. 게다가 동박새의 부리로는 깨뜨릴 수 없을 만큼 껍질이 딱딱합니다. 못 먹습니다. 동박새는 동백나무 꽃의 꿀을 먹는 걸로 만족합니다. 씨앗에 관심 가져야 소용에 닿지 않습니다. 또 열매 껍질이 벌어져 씨앗이 동박새의 눈에 띈다 해도 땅에 떨어진 씨앗을 일부러 찾아야 할 만큼 이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남도의 어느 절집 요사채 한켠에 서 있는 동백나무.
그렇다면 누가 이 씨앗을 먹을까요? 동백나무의 기름진 씨앗을 노리는 고객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이 단단한 껍질을 갉아낼 수 있는 강력한 앞니를 가진 들쥐 종류의 설치류입니다. 하지만 들쥐들도 이 껍질을 단박에 갉아내지 못합니다. 그래도 씨앗 안에 든 영양분을 포기하기가 아까운 들쥐들은 동백나무 씨앗을 천천히 갉아먹기로 하고 우선 자신의 보금자리로 가져갑니다. 다람쥐와 청설모가 도토리를 모으는 사정과 똑같습니다. 들쥐들은 다른 동물에게 먹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만 아는 땅 속에 고이 숨겨둡니다. 그걸 동백나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 동백나무의 씨앗은 어미나무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 씨앗 가운데 상당 부분은 들쥐의 겨울 식량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중에 일부는 남게 되어 새 봄에 싹을 틔우고 한 그루의 동백나무로 자라나게 됩니다.

제주도 동백동산.
이야기가 길어져서 동백나무 씨앗 산포 전략은 다음 《나무편지》에서 더 이어가겠습니다. 아직 조슈아트리와 비슷한 동백나무의 안타까운 처지 이야기는 시작도 못 했습니다. 이 과정에는 일본의 생태학자 아베 하루에(阿部晴恵, Abe Harue) 연구팀이 2013년에 국제 학술지 《PLOS ONE》 제8권 제4호에 발표한 흥미로운 논문을 함께 이야기하면 더 재미있을 겁니다. “화산섬 생태계에서 드러난 식물–새 상호작용의 회복탄력성: 동박새가 꽃가루받이를 매개하는 동백나무(Resilient Plant–Bird Interactions in a Volcanic Island Ecosystem: Pollination of Japanese Camellia Mediated by the Japanese White-Eye)”라는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서 아베는 화산이 터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동백나무와 동박새의 관계가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걸 증명합니다. 그 악조건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거 확인한 관찰 연구 결과입니다.
이 희망적인 결과가 우리 땅, 우리 숲의 동백나무에게도 유효할지를 살펴보는 과정에 조슈아트리와 비슷한 처지가 떠오르게 되었던 겁니다. 다음 《나무편지》에서는 이 논문이 밝혀낸 뜻밖의 결과와 함께 우리 동백나무의 사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월요일 아침쯤에는 어쩌면 곳곳의 동백나무 꽃봉오리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동백나무의 씨앗 껍질 속에 감춰진 비극을 함께 마주하시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어질 동백나무의 씨앗산포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 3월 9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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