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편지] 유령과의 입맞춤 - 진화의 엇박자 앞에 선 유카

천리포수목원에서 심어 키우는 유카 종류.
설, 잘 보내셨지요. 이제 드디어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오늘은 설 인사와 함께 미리 말씀드렸던 찰스 다윈이 ‘가장 극적인 꽃가루받이 사례’로 감탄했던 유카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우선 이름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순서겠지요. 유카의 학명을 처음 지은 건 린네였습니다. 린네는 이 식물에 ‘유카(Yucca)’라는 학명을 붙였습니다. ‘유카(Yuca)’라는 말은 원래 카리브해 원주민들이 식용 작물로 이용하던 카사바를 가리키는 이름에서 흘러왔고, 오래전 유럽인들이 두 식물을 뒤섞어 부르던 흔적이 린네의 학명 ‘Yucca’로 남은 겁니다. 정작 빵을 만들어 먹던 카리브해 원주민들의 유카는 ‘마니호트’라는 다른 이름을 얻게 됩니다. 린네가 명명한 유카는 원래의 ‘유카’가 아니지만, 이제 아메리카 대륙의 건조한 풍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다양한 품종의 유카 모두 펼친 잎만으로도 관상용 가치가 높다.
유카는 모래 자갈 바위틈 같은 척박한 곳에서 뿌리를 넓게 뻗어 비를 모으고, 때가 되면 긴 꽃대를 올려 어두워지면 하얀 꽃을 무더기로 피웁니다. 유카의 종류로는 높이 자라서 사막의 숲을 이루는 조슈아트리(Yucca brevifolia Engelm.)를 비롯해 정원에서 흔히 보는 낮은 키의 관목형까지 세계적으로 약 50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실유카(Yucca filamentosa L.)’ 종류를 많이 심어 키우는 상황입니다. 대개의 유카는 밤에 꽃을 피우지만 실유카는 한낮에도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유카는 잎 가장자리에 실 같은 섬유질이 풀려나오는 것이 특징이어서 ‘실’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진 겁니다. 유카 종류 중에 가장 극적인 생김새를 보여주는 건 미국 모하비 사막의 ‘조슈아트리’일 겁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심어 키우는 실유카의 꽃.
생태학에서 유카에 주목하는 관심은 무엇보다 유카나방과의 기이하고도 절대적인 공생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북미 지역에서 유럽으로 옮겨간 유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합니다. 원산지에서 열매를 잘 맺던 유카가, 유럽에만 오면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수수께끼를 푼 건 미국의 식물학자 조지 엥겔만(George Engelmann, 1809~1884)과 곤충학자 찰스 라일리(Charles Valentine Riley, 1843~1895)였습니다. 그들은 유카의 파트너로 ‘유카나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유카의 번식에는 유카나방이 필수 존재라는 가설을 세웠지요. 이게 1872~1873년인데요, 당시로서는 식물과 곤충의 관계를 ‘먹이와 꽃가루받이 도움’이라는 우연적 상호작용으로 보던 학계에 충격적인 가설이었어요. 이는 곧 식물과 곤충의 ‘절대 공생’ 관계를 밝히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찰스 발렌타인 라일리가 그의 논문에 수록한 유카 꽃과 유카나방.
출처: Popular Science Monthly Volume 41 June 1892
라일리는 유카나방 암컷이 유카 꽃의 수술에서 꽃가루를 긁어모아 턱 밑에 둥근 공 모양으로 뭉치는 행동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카나방은 꽃가루를 먹지 않았습니다. 나방은 꽃가루뭉치를 턱에 낀 채 다른 유카 꽃으로 날아가, 암술머리의 구멍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꽃의 씨방에 알을 낳았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 보였지요. 유카의 씨앗을 잘 맺게 해서 그 씨앗의 일부를 애벌레의 먹이가 되게 한다는 겁니다. 나방은 유카의 번식을 돕고, 유카는 나방의 애벌레에게 씨앗의 일부를 ‘양육비’로 제공하는 겁니다. 라일리는 마침내 유카와 유카나방이 서로를 위해 형태와 행동을 맞추어 진화한 ‘경이로운 공생의 파트너’임을 입증합니다.

유카 꽃 위의 유카나방.
출처: Photy by Alan Cressler, U.S. Department of Agriculture.
찰스 다윈은 라일리의 연구 결과에 감동합니다. 다윈에게, 유카와 유카나방의 사례는 자연선택이 만들어낸 ‘가장 경이로운’ 사례였다고 했다는 건, 지난 《나무편지》에서 다윈의 육필 원문으로 보여드렸습니다. 다윈은 이 발견이 자신이 《종의 기원》을 통해 주장한 진화론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애벌레의 먹이를 확보한다는 분명한 이익을 위해 식물의 번식을 ‘적극적으로’ 돕는 유카나방의 행동이 곧 모든 생명은 홀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진화한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나타내는 사례로 보인 거죠. 그때만 해도 ‘공진화’라는 용어가 정립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유카와 유카나방의 관계는 ‘공진화’ 관련 논의의 고전적 사례로 남게 됐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드렸던 시클라멘과 유카는 ‘진화의 유령’ 관점에서 보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유카는 파트너인 유카나방이 살아 있습니다. ‘현재 진행형’인 공생-공진화를 살아간다고 볼 수 있지요. 꽃과 나방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진화의 톱니바퀴가 생생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클라멘은 원래의 파트너를 잃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나무편지》를 통해서 살펴봤잖아요. 시클라멘은 겨우 새로운 파트너를 길들이며 힘겹게 살아가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유카의 꽃에서는 ‘진화의 유령’이라는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시클라멘의 꽃술의 생김새는 언젠가 알 수 없는 시기에 사라진 파트너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꽃가루받이에 성공해 씨앗을 맺는다고 그의 생존 전략이 마무리되는 건 아닙니다. 씨앗을 멀리 날려보낼 일이 남았습니다. 이건 꽃가루받이 못지 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씨앗이 그저 여물어 어미 그늘 아래 떨어지는 게 전부라면 이건 사실상 실패에 가까운 결과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모든 식물은 자기의 씨앗을 멀리 보내려 갖가지 전략을 활용합니다. 꽃가루받이에서 파트너를 잃은 시클라멘은 그러나 개미를 이용해 씨앗을 퍼뜨리는 데에 일정하게 성공한다는 게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꽃 단계에서의 파트너는 잃었지만, 씨앗 단계의 파트너로 ‘개미’와의 관계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꽃 단계를 ‘수분증후군’이라고 이야기고, 씨앗단계는 ‘씨앗산포증후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오늘 이야기하는 유카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씨앗산포 단계에서 유카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기에서 유카와 시클라멘의 처지는 절묘하게 역전됩니다. 개미를 충성스러운 파트너로 길들인 시클라멘과 달리 유카는 씨앗을 퍼뜨려줄 원래의 파트너를 잃었습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조슈아트리를 비롯한 유카의 열매는 과거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거대한 몸집을 갖춘 땅늘보 종류의 먹이였을 것으로 추정하거든요. 그 거대한 몸집의 동물들은 유카 열매를 통째로 삼키고 먼 길을 옮겨간 뒤에 배설하여, 씨앗을 이동시켜 준 것으로 추정하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하지만 1만1천 년 전의 대멸종기에 이들은 멸종하고, 유카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유카에 담긴 '생태적 시대착오' ‘진화의 유령’의 비극입니다. 아무리 씨앗을 맺어도 그 씨앗을 옮겨줄 거대동물이 사라진 지금 유카의 씨앗은 기껏해야 어미 나무 그늘 아래 떨어지거나, 몇몇 설치류에 의해 겨우 몇 미터 옮겨질 뿐입니다. 결국 유카, 특히 조슈아트리와 같은 종류는 살아가는 지역을 더 넓게 펼치지 못하고, 일부 지역에 이룬 군락만 사람의 보호에 의해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멸종위기 관심대상(LC, Least Concern)으로 지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씨앗산포 단계에서 '진화의 유령'을 껴안고 사는 유카의 위기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의 식물을 이야기하다 보니, 체감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반도의 식물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오늘은 너무 길어져서 다음으로 넘겨야 하겠습니다.
간단히 다음 《나무편지》에 소개할 우리 나무를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꽃가루받이의 파트너와의 관계는 전혀 허물어지지 않고 생생하게 유지되지만, 씨앗산포 과정에서 위기를 겪는 우리 나무가 있습니다. 더 잘 보존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어쩌면 위기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우리 나무 이야기입니다. 다음 주에 흥미로운 그러나 애처로운 우리 나무 이야기로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2월 23일 아침에 고규홍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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