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사라진 ‘유령’이 그리워 부르는 나무의 슬픈 연가

한낮의 볕이 따스합니다. 봄 깊어갑니다. 오늘의 《나무편지》에서는 다시 또 유령 찾기에 나섭니다. 그동안 말씀드린 유령 이야기가 적지 않았습니다. 돈나무 팔손이 진다이개미취를 거쳐 아프리칸바이올렛 시클라멘 유카 조슈아트리까지 이어왔지만, 아직 찾아야 할 ‘진화의 유령’은 많이 남았습니다. 오늘은 지난 번 동백나무에 이어 우리에게 친숙한 은행나무의 유령 이야기입니다. 동백나무와 은행나무가 처한 상황은 차원이 다릅니다. 동백나무는 보호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기는 해도 동박새라는 파트너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파트너를 잃었습니다. 영영 사라져 버렸습니다. 동백나무의 문제가 공간이었다면 은행나무는 시간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할 이야기가 많기로 은행나무만큼 많은 나무가 없겠지만, 오늘은 ‘진화의 유령’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떠올리기가 그닥 탐탁지 않은 은행나무의 씨앗이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을 은행나무는 두 가지 정반대 되는 느낌이 도시인들을 휘감습니다. 은행나무 잎이 펼치는 형광빛의 샛노란 황금빛 축제에 시각이 즐거워지지만, 씨앗의 고약한 냄새는 은행나무를 피하게 합니다. 걷기도 불편해집니다. 이 악취는 장구한 시간을 건너온 ‘진화의 유령’이 보내는 절박한 신호입니다. '생태적 시대착오(Ecological Anachronism)'라는 개념에 닿아있는 신호라는 이야기이지요. 사라져 버린 과거 생태계에 맞춘 유령같은 형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나무에서 어쩌자고 이리 고약한 냄새가 나오는지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은행나무 씨앗의 겉껍질이 터지고 뭉개지면서 뿜어내는 이 냄새는 한 마디로 극심한 ‘똥 냄새’입니다. ‘구토 냄새'라고도 하지요. 워낙 독한 이 냄새는 신발에 슬쩍 스치기만 해도 하루 종일 신발을 벗어둔 현관을 통해 스민 냄새가 방안 공기를 고약하게 합니다. 그래서 걸음에 조심해야 합니다. 부탄산(Butyric acid)과 헵탄산(Heptanoic acid)이 섞인 이 냄새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습니다. 더구나 빌로볼(Bilobol)과 은행산(Ginkgolic acid)처럼 피부염증을 유발하는 독성 물질까지 포함돼 있어서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은행나무는 왜 하필이면 이런 끔찍한 냄새를 번식 전략으로 선택했을까 궁금해집니다. 그냥 씨앗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전략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좀 넘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요. 자연의 모든 형질에는 생존을 위한 이유가 있다는 다윈의 이야기처럼 분명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우리가 피해 다니는 그 고약한 냄새가, 누군가를 불러들이기 위한 유혹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 고약한 냄새는 썩은 고기 냄새를 모방한 ’사체(死體) 의태‘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동물에게는 ’잘 숙성된 단백질 고기의 향기‘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 도시를 떠도는 유령을 찾으려면 바로 이 냄새에 주목해야 합니다. 은행나무 종류는 지구상에 가장 먼저 나타난 나무입니다. 은행나무목에 속하는 나무가 여러 종류 있었지만, 모두 멸종하고 은행나무만 독하게 살아남은 거죠. 지금 우리 곁에 살아있는 은행나무는 화석 자료로 보아 2억 7천만 년 전 페름기에 처음 나타나 우리가 살 땅을 일구고 이어서 지금까지 우리 곁을 지켜온 겁니다. 공룡이 쥐라기의 숲을 호령하던 시절에도, 신생대의 거대 포유류가 땅을 울리던 시절에도 은행나무는 있었다는 거죠. 은행나무는 수나무의 수꽃에서 피는 꽃가루를 암나무의 암꽃까지 가져가는 데에 별다른 파트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나무들이 그랬듯이 바람을 이용해 수분 수정을 이룹니다. 그러나 씨앗이 문제입니다.

그 오래 전에 은행나무의 씨앗을 멀리 퍼뜨려줄 파트너는 누구였을까 궁금합니다. 확실한 결론은 내기 어렵지만, 분명 그때에는 은행나무는 그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씨앗에 이 고약한 냄새를 입혔을 겁니다. 그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지요. 씨앗을 감싼 물컹한 육질의 겉껍질과 강렬한 냄새, 심지어 피부염증을 유발하는 독성물질. 이것들을 작은 새들을 위해 준비한 건 분명 아닐 겁니다. 후각이 매우 둔감하거나 혹은 웬만한 악취는 '숙성된 발효의 향'으로 받아들이는 탐욕스러운 존재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배를 채워주고 씨앗을 어미나무 그늘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매머드나 땅늘보 같은 거대 초식동물,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의 초식 공룡들이 그 주인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멀리까지 퍼지는 이 고약한 냄새를 맡고 달려왔을 것입니다. 우적우적 열매를 씹어 먹고는, 먼 곳으로 이동하여 소화되지 않은 딱딱한 씨앗(우리가 볶아 먹는 그 은행 알)을 배설물과 함께 내놓았을 것입니다. 결국 은행나무에게 그들의 위장은 가장 안전한 발아실이었고, 그들의 다리는 가장 확실한 이동 수단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약 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며 이 거대한 파트너들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약속 장소에 나와야 할 손님들이 모조리 멸종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은행나무는 살아남았고, 번식이라는 생명의 본성을 이어가야 합니다. 은행나무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사라진 파트너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겁니다.

파트너는 사라졌지만, 은행나무는 살아있기에 번식을 이어가야 합니다. 바람에 꽃가루를 날려 씨앗을 맺는 순간부터 나무는 예전의 파트너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이 고약한 냄새와 독을 품은 씨앗을 옮겨주지 않을 겁니다. 찾아오지 않는 그를 향해 은행나무는 더 강하게 더 독하게 씨앗을 익혀갑니다. 진화 과정에서 ’유령‘이 되고 말았지만, 은행나무는 여전히 그 유령의 입맛에 꼭 맞춤한, 어쩌면 “더 독하고 더 고약한 식탁”을 차려놓고 오지 않는 그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결국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탓에 야생 상태의 은행나무 군락은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절멸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는 그래서 은행나무를 멸종위기 ’위기(EN, Endangered)‘ 등급으로 지정했습니다.

도심의 아스팔트 위에 으깨진 은행나무 씨앗의 악취는, 3억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사랑의 비가(悲歌)이자, 허공을 향해 쏘아 올리는 필사적인 구조 신호인 셈입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진화의 유령‘인 거죠. 은행나무에 담긴 그 유령의 신호를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씨앗을 없애버립니다. 씨앗 맺는 것조차 막기 위해 봄에 피어나는 꽃을 떨어뜨리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꾸준히 심어 키웁니다. 지금 세상의 거의 모든 은행나무는 사람이 일부러 심어 키운 겁니다. 가로수로 정원수 조경수로 심어주지 않았다면, 은행나무는 파트너를 따라 진작에 멸종했을지 모릅니다. 멸종한 유령을 대신해 은행나무의 멱살을 잡고 현세로 끌고 온 유일한 파트너는 바로 우리입니다.
올 가을에는 은행나무 씨앗 냄새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인간의 시간을 넘어서는 거대한 생명의 역사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림책 속의 공룡 그림을 보며 생명의 장엄한 역사를 생각했던 것처럼 은행 냄새 안에 담긴 고독한 '유령의 숨결'을 한번 더 느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3월 30일 아침에 고규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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