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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 아내 김현경 여사 별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5. 23. 14:45


[부음] 김수영 시인 아내 김현경 여사 별세

입력 2025.05.23. 00:51업데이트 2025.05.23. 12:41
 
 
 
남편 김수영 시인의 타계 50주기였던 2018년 당시 경기 용인 자택에서 김수영 시인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출강 시절 쓴 강의 노트를 펼쳐 보이는 김현경씨. 김씨는 “남편이 원고 준비부터 억양까지 연극 무대처럼 강의를 준비했다”고 했다. /조선일보 DB

시 ‘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을 쓴 김수영(1921~1968) 시인의 아내 김현경(98) 여사가 22일 별세했다. 고인은 시인 남편의 비평가이자 문학적 동반자였고, 김수영의 시를 세상에 널리 알린 주역이기도 했다.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에서 문학을 공부한 고인은 10대 문학 소녀 시절 김수영을 만나 연인이 된 뒤 1950년 결혼했다. 6·25전쟁통에 김수영이 인민군에 끌려가면서 서로 헤어졌다가 1954년 다시 만났다.

고인은 생전 본지 인터뷰에서 “시 한 편이 완성되면 남편은 ‘난산(難産)이다’라며 날 불렀고, 부엌에서 연탄불에 밥 짓다 말고 달려갔다”며 “남편이 작품을 읽어주면 내가 원고지에 또박또박 옮겨 적었다”고 했다. 김수영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시 ‘풀’의 초고를 원고지에 옮겨 적은 것도 고인이었다.

 

2013년 남편과의 추억을 풀어낸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 시인의 타계 50주년을 앞둔 2017년 문인 13명의 산문을 모은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를 펴냈다.

연희전문 영문과를 다니다 중퇴한 남편 대신 2018년 연세대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을 때는 본지에 “1966년 모교 특강을 맡고 그렇게 자랑하며 연극 무대 서듯 열심히 강의를 준비했다”고 회고했다.

유족은 아들 김우, 딸 김선주씨. 분당제생병원장례식장, 발인 24일 5시 30분.

[관련기사] “나는 김수영 詩의 첫 독자… ‘풀’ 읽었을 때 참 시원했다”

 

"나는 김수영 詩의 첫 독자… '풀' 읽었을 때 참 시원했다"

나는 김수영 詩의 첫 독자 풀 읽었을 때 참 시원했다 김수영 시인 아내 김현경씨, 문인 13명 산문 모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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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수영 詩의 첫 독자… '풀' 읽었을 때 참 시원했다"

김수영 시인 아내 김현경씨, 문인 13명 산문 모아 출간

용인=권상은 기자
입력 2017.11.22. 03:03
 

"시 한 편이 완성되면 남편은 '난산(難産)이다'라며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부엌에서 연탄불에 밥 짓다 말고 앞치마에 손을 닦고 달려가야 했습니다. 남편이 작품을 읽어주면 제가 원고지에 또박또박 옮겨 적었죠. 가끔은 '내가 시를 혼자 쓰는 게 아니다'라며 다독거리기도 했습니다."

'자유와 저항의 시인' 김수영(1921~ 1968)은 내년에 타계 50년을 맞는다. 그의 아내 김현경(90·사진) 여사는 아직도 그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15번 넘게 이사 다니면서도 원고, 서적, 강의 노트 등 남편 손때가 묻은 유품을 고이 간직했다. 7년째 혼자 거주하는 경기 용인의 아파트 방 한 칸을 김 시인의 체취가 살아나는 서재로 꾸며두고 있다.

김 여사는 책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출판기념회를 24일 용인시청에서 연다. 김 시인의 작품을 사랑해 김 여사와 인연을 맺은 문인 13명이 쓴 산문을 모았다. 제목은 김 시인의 대표작 '거대한 뿌리'('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에서 따왔다.

지난 20일 자택에서 만난 김 여사는 고령이지만 자세가 꼿꼿하고 기억도 또렷했다. 김 시인 작품을 읽은 첫 독자이기에 창작 시기도 꿰고 있다. 김 시인은 한 해에 시 10~13편 정도를 썼다고 한다. 유작이 된 대표작 '풀'에 대해 "교통사고 당하기 한 달 전인 1968년 5월에 쓴 작품인데, 처음 읽었을 때 참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김 시인은 원고지에 초고를 쓰지 않았다. 외국에서 보내온 잡지 봉투 뒷면 등에 좋아하는 군청색 잉크로 깨알처럼 써내려갔다. 여기저기 줄을 긋고 고친 작품을 아내에게 정서하도록 했다. 점 하나, 띄어쓰기 하나라도 틀리면 다시 써야 할 정도로 까탈스러웠다. 김 여사는 "문학에 대한 열정과 경건함이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긍지가 강했고, 시대와도 불화했던 김 시인에 대해 김 여사는 "나를 조종하는 마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며 "자기를 연마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품성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김 여사는 곡절 많았던 남편을 잃고서도 씩씩하게 살았다. 1974년부터 동부이촌동에서 양장점을 10년 동안 운영했고 미술 컬렉터로도 활동했다. 요즘도 김 시인 작품을 매일 되새긴다. 전집 곳곳에 메모와 책갈피가 꽂혀 있다. 김 시인이 외국 원서를 정성 들여 베낀 노트를 보며 남편을 떠올린다. 문인들을 초대해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김 시인의 시를 낭송하는 모임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