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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의 명재상 허조 삼대의 삶과 죽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3. 7. 16:26


폭력 앞에 굽히지 않았으나 군주에 따라 삼대 운명 엇갈려
중앙일보 입력 2025.03.07 00:20

세종조의 명재상 허조 삼대의 삶과 죽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천도(天道)란 가득 차면 비우는 법, 별 공덕이 없는 내가 신하 중에 제일 높은 지위를 차지했는데 아들 또한 요직에 오르니 걱정이구나.” 세종대의 명재상 허조(許稠, 1369~1439)는 아들 허후(許詡)의 승진을 축하하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근심 어린 빛을 띄웠다. 관직 생활 50년 노대신(老大臣)의 인생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황희와 함께 세종 치세 이룬 허조
원칙 고수하며 자신 관리에 엄격

목민심서 인용된 선정 베푼 허후
백성들이 관찰사 교체 반대 상소

허조는 태종·세종 총애 받았으나
아들·손자는 포악한 정치에 희생

                                           허조 초상(금호서원, 경산시). [사진 이숙인, 경산시]

허조는 황희(1363~1452)와 함께 세종의 치세(治世)를 가능케 한 재상이다. 세종 이도(李裪, 1397~1450)는 자신보다 28세, 34세가 많은 두 재상을 주축으로 원탁을 연상하는 국정 회의를 하는데, 셋이 함께한 기록만 해도 220여 회나 된다. 그 외 각자가 따로 참석한 국정 회의는 허조가 500여 회, 황희가 600여 회에 이른다. 그들은 세종의 좌우 날개로 각자의 삶이 다할 때까지 국정에 복무했는데, 그 기간은 허조가 21년, 황희가 32년이다. 훗날 조광조는 “세종께서 일세(一世)의 다스림을 이룬 것은 황희·허조를 정승으로 삼은 때문”이라고 했고, 정조(正祖)는 “세종의 황희와 허조는 당 태종의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라고 하였다.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당 태종의 정관지치(貞觀之治)가 ‘방두(房杜)’의 보좌로 가능했던 것을 빗댄 것이다. 이처럼 ‘황허(黃許)’ 두 재상의 능력과 품격은 갑을을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황희가 추천한 ‘쓸만한 사람’

황희가 조화와 균형의 정치가라면 허조는 교육과 예악 등 국가의 규범적 표준을 마련한 실무가였다. 조선 개국 2년 전 고려의 과거를 통해 관료계에 입문한 허조는 태종조에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되는데, 먼저 발탁된 황희가 ‘쓸만한 사람’ 허조를 추천한 것이다. 왕은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지 않는 허조를 못마땅해 하며 추천인 황희를 타박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왕이 허조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허조는 권세에 아부하거나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고전(古典)과 고제(古制)에 근거한 정통 예악 제도를 수립고자 했다. 당시의 예악(禮樂)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통치 수단이었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자리에서 태종은 허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가 진실로 재상이고, 나의 주석(柱石)이다.” 예제(禮制) 수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도맡은 허조, 이러한 책임 때문인지 개인 성향인지 그는 유독 자신과 가족 관리에 엄격했다. 때론 왕으로부터 ‘고집불통’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며, 국정을 논할 때는 원칙을 갖고 스스로에게 진실되며 다른 사람의 비평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허공(許公)은 음양에 대한 일을 알지 못한다”고 놀렸다. 허조는 웃으며 “내가 음양의 일을 모르면 내 아들 후(詡)와 눌(訥)은 어디에서 생겼을까”라고 응수했다. 그는 몸이 여위고 파리하여 여윈 매라는 뜻으로 ‘수응재상(瘦鷹宰相)’이라 불리기도 했다. 궤장(几杖,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내리는 최고의 예우)을 받은 후 좌의정으로 은퇴하면서 스스로를 평한 짧은 글을 남겼다.

“태평세에 태어나 태평세에 죽으니 천지 간에 굽어보고 올려보아도 부끄러운 것은 없다. 내 나이 70이 넘었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니 임금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行)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허조 졸기』)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가족들이 차례로 들어와 유언을 듣고자 했지만 온화한 빛으로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황희와 환상의 복식조를 이루었던 허조, 그에 대한 연구나 대중적 인식은 황희에 비해 대단히 미약하다. 여기서 그의 슬픈 가족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세종 앞에서 통곡해 백성 굶주림 해결

                                              하양 부호리 금호서원. [사진 이숙인, 경산시]

허조의 장자 허후(許詡 1398~1453)는 세종 8년에 문과에 오른 후 12여 년을 아버지와 같은 조정에서 근무했다. 이 때 허조는 피혐(避嫌, 혐의를 피함)에 신경을 쓰며 조심스러워 했다. 허후 역시 부친을 이어 받아 나랏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경기도 관찰사 시절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세종 26년(1444) 경기 일대에 큰 흉년이 들어 풀 한 포기도 없이 백성들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도내 수령들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관찰사 허후는 왕에게 달려가 경창(京倉)의 곡식을 풀어 구휼해 줄 것을 애원한다. 왕이 윤허하지 않자 궐정(闕庭)에 엎드려 통곡하는데, 얼마나 처절했으면 주변 사람들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경창의 곡식을 풀려면 먼저 관찰사가 호조에 보고하고, 호조는 왕에게 알려 윤허를 얻는 절차가 있어야 했다. 허후의 뜻은 발급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굶어 죽는 백성들이 수백을 헤아릴 것이니 먼저 창고를 열어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자는 것이다. 결국 세종이 허후의 요청을 들어주면서 경기 도내의 다급한 목숨들을 건지게 되었다. 이 일화는 4세기 후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인용되었다. 즉 “조령(詔令)을 기다리지 않고 형편에 따라 창고를 열어 곡식을 방출하게 한” 허후의 사례를 높이 산 것이다. 허후의 관찰사 임기가 다가오던 이듬해에는 수원·안산 등에 사는 주민 1034인이 허후의 교체를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다.(세종 27년 5월 12일)

단종 보필, 수양대군 반대편 서

                            허조를 모신 하양서원에 정조가 내린 편액(1790년). [사진 이숙인, 경산시]

그 후 허후는 부친의 ‘전공(專攻)’을 계승이라도 한 듯 대부분을 예조의 책임자로 근무했다. 그러는 사이 국왕은 세종에서 문종으로, 단종으로 바뀌었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그는 김종서, 황보인 등과 어린 임금 단종을 보필하게 되었다. 당시 허후는 자신보다 43세가 적은 손자뻘 단종의 경연관이 되어 『논어』를 진강하는데, 왕이 묻고 허후가 답하는 방식이었다. “정직한 사람은 친하기 어렵고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은 합하기 쉬우니, 밝게 살피시어 군자는 나오게 하고 소인은 물러가게 하소서.”(단종 즉위년)

단종 1년 10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인 후 승리의 축하연을 벌이는데, 허후도 불려 들어갔다. 술을 돌리고 풍악이 울리자 재상 정인지와 한확 등은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 홀로 어두운 표정이 된 허후는 고기를 입에 대지 못하는데, 수양대군이 그 까닭을 묻자 재일(齋日)이라고 둘러댔다. 짚이는 게 있었지만 수양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후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저잣거리에 효시(梟示)하고 그 자손을 죽이라고 명하자 허후가 울부짖었다.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인이라고 목을 베어 내걸고 모든 가족을 죽인단 말입니까. 김종서는 저와 교유가 소원하여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하지만, 황보인이라면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모반할 리가 없습니다.” 수양대군이 말했다. “그대가 고기를 먹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군요.” 허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조정 원로들이 한날에 모두 죽었습니다. 저는 살아 있는 것으로도 족하거늘 어찌 차마 고기를 먹겠습니까.” 그 길로 허후는 거제로 유배되었고, 한 달 만에 교형에 처해졌다.(『추강집, 허후전』)

허후의 죽음으로 조정은 술렁거렸고 백성들 사이에는 소란한 헛소문이 떠돌았다. 일상을 살던 사람들을 증언대에 올리고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적당(賊黨)으로 처단하는 폭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가족도 무사하지 못해 16세 이상의 남자는 베어 죽이고 15세 이하는 성장을 기다려 외진 곳의 관노로 보내졌다. 여자들은 세상을 탈취한 무리의 종으로 배급되었는데, 허후의 처 금장(今莊)은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손자는 사육신에 연루돼 삶 마감

폭력 앞에서 자기 진실성에 충실했던 허후, 사실은 그의 부친 허조도 그런 사람이었다. 허조는 자신을 과거 급제로 이끌어 준 시관(試官) 염정수(廉廷秀)가 여말선초의 혁명세력에 의해 사형당하는 것을 목도한다. 서슬 퍼런 상황이다 보니 평소 돈독했던 문생(門生)과 옛 부하들 그 누구도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허조 홀로 달려가 시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관곽을 준비하여 장사를 지냈다.(『허조 졸기』) 부자의 다른 점이라면 아버지는 훌륭한 군주를 만났고, 아들은 거짓과 복종을 강요하는 잔인한 도적을 만난 것이다.

태종과 세종이 애지중지한 현신(賢臣)이자 황희와 쌍벽을 이루며 정치를 예술로 이끌었던 허조. 아들 허후는 계유정난에서 희생당하고 손자(慥)는 사육신에 연루되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허조의 직계 가족은 멸문의 화를 당했지만 역사는 그들의 행적과 정신을 잊지 않았다. 정조 임금은 하양서원(河陽書院)에 ‘금호(琴湖)’라고 사액(賜額)하고, 허조 3대의 영령에 머리를 숙였다.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8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