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칠라취급주의 - 이상하
[2025 신춘문예]
- 문화일보
- 입력 2025-01-02 09:20
- 업데이트 2025-01-02 10:13
■ 2025 신춘문예 - 소설
“누니가 하은이를 힘들게 한대”
현서에게 들은 하은 씨는 제게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무 말이나 쉽게 뱉는 사람.
현서는 하은 씨를 사랑으로 견디며 달래는 사람.
“가만 보면 임여진, 너도 하은이랑 비슷한 데가 있어”
현서가 재간이 좋거든요. 자주 가출했던 현서는 항상 거부할 수 없는 말로 저를 찾았죠.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그만두어야겠다고 이미 다짐했는지도 몰라요. 오늘 낮에 지인으로부터 친칠라에 대한 말을 들어서겠죠. 하은 씨라고, 과장님께 말한 적은 없을 거예요. 하은 씨와 마주했던 두 시간 남짓을 되짚어보며 저는 집 현관문 앞에 섰습니다. 도어록 번호를 누르고 손잡이를 잡았는데,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어요.
가만히 서서 에어컨을 켜 놓은 집 안과 케이지 속 친칠라를 상상했어요. 친칠라는 제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유였어요. 하지만 친칠라를 위해 에어컨을 켜고 나온 저도 웃기죠. 에어컨을 켜놓은 이유요? 친칠라가 높은 온도에 취약하거든요. 지금 여기,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이 사무실 정도면 친칠라에게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과장님, 친칠라 아시죠? 햄스터와 토끼를 합쳐놓은 것처럼 생긴, 몸집이 한 뼘 조금 넘는 설치류 말이에요.
한 달 전쯤에 현서가 친칠라를 돌봐달라며 저한테 맡겼어요. 네, 제가 자주 말했던 그 멋있는 친구요. 현서의 친칠라는 하얀 털을 가지고 있어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을 때는 눈송이 같아 보이죠. 그래서 이름이 누니, 라나요.
여하튼, 현관문 앞에 선 저는 집 아닌 어딘가라도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죠. 문 너머는 제 공간이고, 그 안의 누니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사실 누니보다는 저를 노려볼 현서가 더 마음에 걸리더군요. 왜 누니를 혼자 두었냐고 짜증 낼 현서가 떠올랐죠.
집에 들어가자마자 옷방에 놓인 케이지를 살폈어요. 누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어컨 리모컨은 꺼진 채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고요. 거실에도 누니가 없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제가 사는 1.5룸은 거실이 큰 편이기는 해도 가구가 테이블과 침대밖에 없어서 숨을 데가 없다시피 하거든요. 설마 하는 마음에 화장실 문을 열어봤습니다. 전등을 켰는데, 화장실 선반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선반에 올려놓은 제 실내복과 속옷 위에 누니가 앉아있더군요.
누니는 저와 눈이 마주치고서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죠. 집을 나설 때 화장실 문을 닫았었는데, 누니를 케이지 안에 가둔 채로 나왔었는데, 어떻게 누니가 화장실 안에 있었을까요. 저는 집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에어컨도 다시 켜두지 않은 채로요. 집 안 온도가 많이 높아졌겠죠?
그나저나 과장님이 지시하신 대로 이번 P종합병원 홍보 영상도 편집했는데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네요. 병원 관계자들은 뭐라고 했을지도 궁금하고요. 그 홍보 영상이 제가 만든 마지막 영상일 텐데 말이죠. 혹시 과장님, 제가 영상 편집자 일을 더는 못 하겠다고 찾아와놓고선 이유를 말하기는커녕 뜬금없는 말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래도 누니에 대해서는 말씀드려야 할 것만 같아요.
저는 현서와 하루에 한두 번은 통화하곤 했어요. 집에서 혼자 영상을 편집하면 제가 어디 있는지 헷갈리곤 하거든요. 방구석도 아니고 모니터 속도 아닌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느낌. 그때 현서 목소리를 들으면 현실에 있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중학생 때부터 이십 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함께했으니 그럴 만도 하죠. 과장님도 얼마나 각별할지 짐작 간다고 하셨던가요.
그런 날이 이어지다가도 제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사이가 데면데면해지기도 해요. 현서와 통화하는 날이 쌓일수록 피곤해지거든요. 현서는 사회 이슈들을 제게 설명해줘요. 주말 봉사활동에도 가자고 설득하고요. 사회운동가나 다름없지요. 언제나 정의롭고 올곧은.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똑똑한. 현서의 말을 들으면 저는 더욱 아무 데도 나가고 싶지 않아져요. 집에서 컴퓨터만 보는 제가 너무 바보 같달까요. 그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현서를 만나게 되지만요. 현서와의 대화가 유익했고 좋았으니까요.
현서가 저에게 누니를 맡겨도 되겠냐고 물었을 당시는 현서와의 연락이 뜸하던 때였어요. 제가 전화를 받지 않자 현서는 일이 생겼다고, 통화할 수 있냐고 메시지를 남기더군요. 제가 결국 전활 걸었죠. 현서니까 또 마음을 굽혀버렸어요.
현서는 누니를 돌봐줄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간절한 목소리였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어요. 현서가 저는 집에만 있으니까 누니를 돌보기에 어렵지 않을 거라고 그랬거든요. 제가 집에서 놀고만 있는 게 아니라 일을 하는데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기분이 나빴죠. 그러나 누니가 앞으로 현서 집에서 혼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알겠다고 답했어요. 원래는 현서가 발달센터에서 근무하는 시간 동안 누니가 하은 씨네에서 지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거든요.
네, 오늘 카페에서 만난 그 하은 씨요. 현서 애인인 하은 씨는 집에서 뜨개질로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해요. 핸드메이드 제품 판매 플랫폼이나 에스엔에스를 통해서요. 그 덕분에 낮 동안 현서가 편하게 하은 씨에게 누니를 맡겨 왔었죠.
“누니가 하은이를 힘들게 한대.”
휴대폰 스피커 너머로 현서 목소리가 물에 잠긴 듯이 들렸어요. 하은 씨와 현서는 자주 다투니까, 현서는 그때마다 제게 울면서 전화를 하니까, 으레 둘이 언쟁을 벌였나 보다 여겼죠.
“하은이의 말이 사실이 아니란 건 알지만 데려올 수밖에 없었어.”
이 년 가까이 만난 둘이 이번에는 정말 헤어지려나 싶었지만 별말 하지 않았어요. 현서가 말하길 하은 씨는 헤어지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대요. 현서에게 들은 하은 씨는 제게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무 말이나 쉽게 뱉는 사람. 현서는 하은 씨를 사랑으로 견디며 달래는 사람.
저희 집이 현서가 매일 들르기 애매한 거리에 있어서 주중에는 제가 누니와 함께 있기로 정해졌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이렇게 과장님을 만나서 일을 관두겠다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죠. 홍보 영상 편집을 맡은 P종합병원 탓은 아녜요. 큰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요. 다만, 끝낼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 이제야 섰을 뿐이에요.
통화한 주 일요일에 현서는 제가 사는 빌라에 찾아왔어요. 내려가 보니 차 뒷좌석에 제 허리 높이까지 오는 친칠라 케이지가 놓여 있었죠. 이렇게 클 줄 몰랐다고 한마디 하려는데, 현서 품속의 누니가 보였어요. 현서 집에서만 마주했던 누니를 바깥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죠. 누니를 안아봐도 되냐고 물었어요. 현서가 미소 지으며 누니를 건넸습니다. 누니가 제 파자마에 몸을 비비더군요.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요.
과장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P종합병원 의사들이 말하는 질병 소개나 자가진단법 등의 영상을 전담 제작하게 됐잖아요. 디자이너분이 만들어주신 통계자료나 일러스트도 삽입하기는 하지만, 주로 의사가 말을 고르는 모습이나 습관적 행동 등을 삭제하고 최대한 그들이 전문적으로 보이게 만들죠. 집 겸 작업실에 앉아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편집 영상 속 의사들이 실재하지 않고 제가 만든 캐릭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집에서 혼자 작업하면 쓸쓸하겠다며 저를 걱정해주던 현서 말도 떠오르죠. 만나는 사람이라곤 현서와 과장님밖에 없는 나는 외로운 건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요. 그러니 누니가 저를 찾아온 것이, 현서가 저에게 누니를 맡긴 게 일상에 터닝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현서만 해도 삼 년 전부터 누니와 지내면서 활력이 생겼거든요.
누니 케이지는 에어컨이 설치된 옷방에 두었답니다. 친칠라에게 중요한 건 다른 무엇보다 이십오도 이하로 유지해야 하는 실내 온도라고 현서가 강조했거든요. 현서는 바닥에 친칠라 용품을 두고 집 안을 둘러봤어요. 누니가 살만한 공간인지 살피는 것만 같았죠. 누니도 새로 지낼 곳이 궁금한지 사방을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옷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랜 시간 옷방에 머물더군요. 그 모습에 저는 누니가 단지 케이지가 놓인 그 공간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만 여겼었어요.
짐을 다 옮기고 현서와 수제비를 배달시켜 먹었어요. 환경문제로 비건이 된 현서를 위해 미리 찾아놓은 비건음식점에서요. 누니는 케이지에서 평온하게 졸고 있었어요. 일 인분씩 포장된 두 개의 용기를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았습니다. 한참 식사하고 있는데 현서가 그러는 거예요.
“이 인분 용은 없었어?”
현서가 굳은 표정으로 갸우뚱거렸어요. 언짢음을 나타내는 행동이었죠. 예전부터 살짝 꺾인 현서의 고개를 볼 때마다 저는 왠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서 불안해지곤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어요.
“아니 같이 먹을 건데 일 인분씩 두 개 시키는 건 좀 웃기잖아.”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니까 아무것도 안 변하는 거야. 쓰레기도 많이 생기고.”
현서가 떨떠름한 얼굴로 잔소리하더군요. 순간, 이 인분 용을 주문했는데 개별 포장되어서 배달온 것이라고 거짓말할까 고민했어요. 하지만 솔직하게 얘기했죠. 이 인분 용도 있었는데 각자 먹을 음식을 따로 담아주는 게 더 좋아서 이렇게 주문했다고요. 그렇게 한 게 잘못은 아니니까요.
“가만 보면 임여진, 너도 하은이랑 비슷한 데가 있어.”
그건 또 무슨 소리냐며 제가 기분 나쁜 티를 냈어요. 저랑 하은 씨랑 비슷하다니요. 하은 씨가 이상하다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자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한 현서를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현서의 살짝 숙인 고개, 빨개진 두 귀, 눈가를 만지는 손. 그리고 둘이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제 목소리까지. 그 모든 게 다 떠올라서 불쾌했죠.
현서가 그러더군요. 실은 하은 씨가 잘못한 일이 더 있다고. 둘이 수제버거집에 갔었대요. 그곳에서 현서는 머시룸버거를 골랐습니다. 하은 씨는 뜬금없이 토마토를 안 먹겠다며 수제 토마토 소스가 올라가는 감자튀김인데, 소스와 감자튀김을 따로 담아달라고 직원에게 생떼를 부렸대요. 현서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은 씨는 자신이 토마토를 싫어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더는 토마토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죠. 그 전날에 하은 씨는 현서가 사다 준 방울토마토를 먹었었대요. 그래서 현서에게 하은 씨 말이 더 갑작스럽게 느껴졌다죠. 그때부터 현서가 하은 씨를 타일렀대요. 알레르기도 아니고 단지 먹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여태 계속 먹어왔던 토마토를 데이트 자리에서까지 거부해야겠느냐고요.
하은 씨는 조용히 포크와 나이프만 만지작거렸어요. 그러다 헤어지자고, 누니도 데려가라고, 누니가 자신을 너무 힘들게 만든다고, 또 쉽게 말을 뱉었답니다. 현서가 보기에 하은 씨는 헤어지자는 말로 현서를 당황하게 만들려는 것뿐이었어요. 이미 자신이 우위에 있는 그 연애에서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요. 여느 때처럼 현서는 또 삐져서 헤어지자는 것이냐고, 헤어지자는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마 하은 씨는 현서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현서가 재간이 좋거든요. 중학생 때도 그랬어요. 자주 가출했던 현서는 항상 거부할 수 없는 말로 저를 찾았죠. 이런 적도 있었어요. 중3 당시 집을 나온 현서는 지방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게 매일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다 오토바이에 부딪히는 사고가 났다고 울면서 연락했죠.
영상을 클릭하자 의사가 카메라를 빤히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만들어봤자 싸구려 환자만 더 늘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다른 병원에서 못 살린 놈이나 가망 없는 새끼들만 오겠죠 뭐.”
현서는 오히려 누니가 저를 물었을까 봐 걱정했다고 말했어요.
현서를 보니 마음이 금세 조금 풀려버렸어요.
이번에 맡은 영상 제작이 쉽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다고,
짜증 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너밖에 날 도와줄 사람이 없어. 여기로 좀 와주면 안 돼?”
저는 학원을 빼먹고 시외버스를 탔어요. 버스터미널에서 절 발견한 현서가 절뚝거리며 걸어왔어요. 제게 도로에 쓸린 무릎과 팔을 보여주었어요. 아스팔트 조각들이 상처에 그대로 붙어 있었죠. 왜 병원에 가지 않았냐 묻자 돈이 다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막차를 타고 저희 집으로 가자고 했어요. 현서는 자기 부모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했죠. 전 알겠다며 현서를 안심시켰어요.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현서가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곁에 평생 있자.”
저는 현서의 손을 잡았습니다. 따뜻했던 손바닥. 당시 같이 다니던 무리로부터 비난당한 후 내쳐졌던 탓인지,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듯했어요. 제가 그 시절을 찬란히 대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때 현서도 제 손을 꽈악 쥐었다고 기억해요. 저희 집에 있는 동안 현서는 가출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등교하듯 교복을 입고 아침에 저와 함께 집을 나섰어요. 학교에 가지 않던 현서는 밖에서 오후 네 시까지 저를 기다렸어요. 하교 때 현서를 만나면, 현서의 교복 셔츠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걸 볼 수 있었죠. 현서는 끝까지 제게 돈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젖은 셔츠를 흔들며 학교는 시원했겠다며 말했을 뿐이에요. 결국 제가 먼저 돈을 주며 피씨방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현서는 제 발로 자기 집에 돌아갔어요. 그 후에도 비슷한 일이 몇 차례 더 있었고요.
그래도 현서는 크게 엇나가지 않고 자랐습니다. 아동 발달치료 센터에서 운동 치료사로 근무하면서 현서의 처세술은 더 좋아졌어요. 아이들이 자기 말을 잘 따르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나요. 이를테면 아이의 양손을 잡고, 네가 잘못한 거야, 이런 이유로 네가 선생님을 속상하게 만들었어, 라고 확실하게 말했대요. 현서는 마지막에 아이들을 오래 안아준다더군요. 잘못을 인정하는 아이는 멋진 사람이라면서요. 부모들은 현서가 인성이 좋은 치료사 같다며 현서를 점점 더 좋아했어요. 물론 아이들도 홀린 듯 현서를 잘 따랐고요.
여하튼 데이트 자리에서 현서가 타이르자 하은 씨는 꽤 오랫동안 감자튀김을 손으로 주물럭거렸습니다. 손이 기름으로 반들반들해진 채로 현서에게 미안하다고, 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사과했대요. 곧 하은 씨는 모든 감자튀김을 토마토 소스에 찍어 먹었다더군요. 현서의 말을 듣고 저는 하은 씨를 헐뜯었어요. 그날도 현서와의 수다가 마냥 재밌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와 하은 씨가 닮았다고 여기는 이유는 듣지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현서는 누니를 소중히 다루라고 신신당부했어요. 친칠라는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한다면서요. 저는 누니를 열심히 케어했습니다. 현서는 제가 못 미더웠는지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더라고요. 누니 깸? 누니 밥 먹을 시간. 똥? 사진 보내봐. 누니 답답할 테니까 케이지 밖에 꺼내둬 등등. 이런 메시지도 받았어요.
-나 어제 누니 다치는 꿈 꿨어.
저는 현서가 보낸 메시지에 게임 퀘스트 깨듯 하나씩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걱정되면 데려가든가, 라고 메시지를 작성했다가 지우기도 했죠. 애인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누니 덕분에 무료하던 생활도 나름 활기를 찾아서 누니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기도 했고요. 현서가 누니를 케이지 밖으로 꺼내두라고 일러주기도 전에, 이미 누니를 집 안에 풀어주고는 같이 생활했거든요. 누니가 얼마나 애처롭게 저를 바라봤는지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죠.
저는 거실 테이블에서 작업해요. 한참 영상을 들여다보다가 미닫이문을 열어놓은 옷방으로 가곤 하죠. 그리고 누니의 부드러운 털을 만집니다. 제가 쓰다듬으면 누니는 제게 몸을 기대요. 누니야, 라고 부르면 귀를 쫑긋거리기도 하고요. 그렇게 누니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과장님이 보내준 홍보 영상 스토리보드가 떠올랐어요. 병원에서의 진료부터 입원, 진료 회의, 수술, 퇴원까지의 긴 과정을 담아야 하는데 그때는 걸맞은 영상 소스를 몇 개 찾지 못했었죠. 조급함에 저는 다시 거실로 나갔습니다. 누니는 더 놀고 싶은지 앞발로 제 다리를 건드렸어요. 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누니를 다시 케이지에 넣었죠.
그 후에 다시 일에 집중하는 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리곤 해요. 그럴 때 저는 테이블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메신저 친구 목록을 살펴보는데, 그중에는 하은 씨도 있죠. 자기 애인과 절친이 서로 연락처도 몰라서야 되겠냐며, 제가 길거리에서 현서와 하은 씨를 마주쳤을 때 현서가 반강제로 하은 씨와 연락처를 주고받게 했었거든요.
언젠가부터 하은 씨의 프로필 사진은 꼭 한 번씩 눌러보았어요. 함께 찍은 실루엣 사진으로 되어있는 현서의 것과 다르게 하은 씨의 프로필은 언제나 현서와는 관련 없는 사진이었죠. 하은 씨의 프로필 사진을 볼 때마다 저는 현서가 그 관계에서 을은커녕 갑·을·병·정·무·기·경·신, 신쯤이 아닐까 싶었어요. 현서가 더 많이 하은 씨를 사랑한 거죠. 사랑하기에 더 많이 신경 쓰고, 사랑하기에 더 많이 상대방을 걱정하고, 사랑하기에 상대방이 좋은 방향으로 가도록 돕고.
문제의 그날도 저는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어요. 홍보 영상에서, 의사가 만족하며 웃는 장면을 위한 클립 폴더를 열었어요. 여러 각도의 촬영 영상을 모아둔 다른 폴더와 다르게 거기에는 영상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P종합병원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가 주인공이었죠. 저도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그 의사를 본 적이 있어요. 의사는 본인을 환자를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다정한 사람 같았어요. 포털사이트 카페 게시글에 저런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다는 댓글이 꽤 많이 달릴 정도로요. 영상을 클릭하자 의사가 카메라를 빤히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카메라 밖에 있는 피디님이 최대한 밝게 웃어달라고 말했죠.
“웃긴 일이 없는데 어떻게 혼자 웃어요? 미친 사람도 아니고.”
의사는 양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그렇게 말하더군요. 한동안 사운드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영상에 피디님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저는 피디님이 당황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의사가 운을 뗐습니다. 이거 만들어봤자 싸구려 환자만 더 늘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보겠다고 말하는 피디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의사가 피식 웃었어요.
“다른 병원에서 못 살린 놈이나 가망 없는 새끼들만 오겠죠 뭐.”
대사를 못 외워놓고선 괜히 화를 내거나 반말을 찍찍 하는 식의 싸가지 없는 의사는 봤어도, 환자를 비하하는 의사를 본 건 처음이었어요. 환자를 가족으로 여긴다는 말이나 못 하면. 그때는 이딴 인간을 위해 일해야만 하는 저 자신이 조금 싫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제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기술은 영상 편집뿐이니 돈을 벌기 위해서는 더럽고 치사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죠. 어쨌든 그 의사가 갑이잖아요. 이제 와서 그 의사 실체를 폭로하겠다고 사무실에 온 것이냐고요?
예전에 제가 과장님께 세상엔 별의별 의사들이 있는 것 같다고, 과장님은 이상한 고객사에 가면 어떻게 행동했었냐고 묻긴 했었죠. 그때 과장님은 이렇게 대꾸하셨어요. 왜 그런 걸 일일이 생각하냐고, 잘 모르겠다고, 넘어가라고. 어쨌든, 과장님이 걱정하시는 일을 벌이겠다고 선언하려 이곳에 온 건 아녜요. 과장님과 얘기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뮤트를 하고 다시 병원 홍보 영상을 보았습니다. 영상이 끝날 때까지 아주 단정한 미소를 짓는 의사의 모습만 화면에 가득했어요. 여느 때처럼 저는 진면모는 보지 못했다는 듯이 영상을 깔끔하게 편집했습니다. 편집하니 홍보 영상으로 쓰기에 아주 적합한 장면이 되었죠. 그러다 어떤 기척을 느꼈어요. 옷방에서 꿀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누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죠. 저는 옷방으로 달려갔습니다. 현서가 낮에는 케이지 밖에 두라고 했어서 옷방에 누니를 풀어놓았었는데, 누니가 보이지 않았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행거 앞에 세워둔 케이지를 봤지만 비어있더군요. 행거에 걸린 옷을 확인하면서 누니가 있는지 봤어요. 거기에도 없었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내복을 보관하는 플라스틱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누니가 토하고 있더군요. 작은 몸을 꿀렁이면서요. 근데 놀라운 건, 누니 토 안에 색색깔의 천조각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던 저는 누니 주변에 있는 옷들을 살폈습니다. 파자마, 집에 입는 티셔츠, 속옷 같은 것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나 있더군요. 심지어 찢어진 것도 있었죠. 토를 다 한 누니는 다시 옷을 갉아먹었어요.
저는 황급히 누니를 옷에서 떼어냈습니다. 누니는 빠른 속도로 뛰어가 다시 옷을 이빨로 찢어 먹었죠. 제게 다시 넘겨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였어요. 저는 누니를 케이지 안에 넣고 거실로 옮겼습니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땐 누니가 귀신에 씐 것만 같아 보였어요.
케이지를 거실로 옮겨놓았음에도 누니는 에어컨 때문에 열어둔 옷방으로 뛰어가서 옷을 갉아먹었어요. 커튼이나 이불 같은 건 안 먹더라고요. 누니 습성을 알게 된 이후로 저는 구멍 난 실내복을 누니에게 줬어요. 그래, 네놈의 버릇이 옷을 먹는 것이라면 차라리 못 입게 된 걸 먹어라, 이런 마음이었죠. 근데 정말 웃기는 게 무엇인 줄 아세요? 누니는 한 번 구멍 난 옷은 절대 다시 먹지 않아요. 어떻게 구분하는지 멀끔한 옷만 먹어요. 그것도 아주 사납게.
어느새 모든 속옷과 실내복에 다 구멍이 생겼죠. 저는 구멍이 난 팬티와 파자마를 입었어요. 옷을 입다가 실수로 구멍에 팔과 다리를 넣기도 했어요. 구멍은 점점 커졌습니다. 구멍 난 실내복을 입으면 헐벗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그래서 외출복을 집에서도 입게 되었고요. 누니는 그 외출복도 실내복이라 여겼는지 다 뜯어버렸어요. 결국엔 실내복뿐만 아니라 외출복에도 구멍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현서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그런 누니를 핸드폰으로 촬영하려고만 하면 누니는 옷을 뱉고는 다시 온순한 친칠라가 되어버렸어요. 제가 지켜보거나 안아도 계속 옷을 먹어대는데, 강제로 뺏고 케이지에 가둬야만 멈추는데 말이죠. 멀리서 확대해서 촬영하려 해도 마찬가지예요. 어찌 아는지 옷 갉아먹기를 멈춰요. 저는 현서가 금요일 밤에 누니를 데리러 왔을 때 누니가 먹어버린 옷을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멀쩡한 옷은 서랍장에 숨겨두었습니다. 킁킁거리며 서랍장 주위를 맴도는 누니를 거실로 데려왔죠. 누니는 재빨리 다시 옷방을 향해 뛰어갔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씨름을 하는데도, 몸이 지쳐 편집 도중 졸게 되었는데도, 살랑이는 꼬리를 가진 둥근 누니가 귀여워서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놀아줄 땐 또 얼마나 순하고 사랑스러운 친칠라인지. 과장님이 상상하시는 모습 이상일 거예요.
현서가 프로틴바를 사 들고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제가 편집하느라 바쁠 때 끼니 대신 우유와 프로틴바를 먹는다고 말한 것이 떠올라서 사 왔다고 하더군요. 현서에게 따질 생각만 했던 저는 부끄러워졌죠. 옷방으로 간 현서는 구멍 난 속옷과 파자마, 집에서 입는 티셔츠, 그리고 몇몇 외출복까지 하나씩 들춰보았습니다.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어요. 현서는 누니가 그런 게 확실하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없는 일을 꾸며낼 이유가 없지 않냐고 되받아쳤어요.
“그냥 한 말이지. 뭘 그렇게 화내.”
현서가 제 어깨를 토닥였어요. 그래도 못 입을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라더군요. 어차피 집에서 입는 옷이니 구멍이 있든 없든 상관없지 않냐면서요. 외출복의 구멍도 멀리서 보면 티가 안 날 것 같다고 했죠. 현서는 오히려 누니가 저를 물었을까 봐 걱정했다고 말했어요. 누니가 현서를 물어서 피가 난 적이 있었다나 봐요. 걱정해주는 현서를 보니 마음이 금세 조금 풀려버렸어요. 저는 누니를 돌보느라 조금 날카로워졌나 보다고, 이번에 맡은 영상 제작이 쉽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다고, 짜증 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친칠라가 사회성이 좋은 동물이라서 반려인 심리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현서가 설명했어요. 제가 예민해졌기 때문에 누니도 예민해졌고 그로 인해 옷을 물어뜯은 것 같대요. 저는 그 말에 동의하는 대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네가 자꾸 누니 잘 지내냐고 물어본 탓에 제게 스트레스가 쌓인 것일 수도 있다 했죠. 현서가 저를 싸늘하게 바라봤어요. 그럼 자신이 누니를 맡긴 사람으로서, 친구로서 그런 말도 못 꺼내냐고 묻더군요. 저도 현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하얗고 둥근 얼굴, 짙은 눈동자. 그리고 질문했죠.
“근데 누니가 네 옷은 안 갉아먹어?”
“그게 왜 궁금해?”
그 뒤로 현서는 저와 말을 섞지 않더군요. 밥을 먹을 것이냐고, 말 좀 해보라고, 어쩔 것이냐고 재촉해도 묵묵부답이었어요. 그저 거실 테이블 옆에 있는 침대에 누워서 누니를 쓰다듬었죠. 그 지겹고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든 끝내야만 했어요. 저는 현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현서는 입을 뗐어요. 정말 미안한 게 맞냐고 묻더라고요. 미안해. 제가 다시 한 번 사과했습니다.
현서는 괜찮다는 대답 대신 저번에 먹었던 비건 수제비집에 저녁을 주문하자고 하더군요. 그때는 이 인분 용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따로 먹는 것이 좋았지만, 덜어 먹기 위해 그릇을 어지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현서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고요.
누니와 보내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어요. 현서한테 누니 안부를 묻는 문자가 오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보고하게 되었죠. 누니 방금 잠들었음. 여덟 시 기상. 누니 쾌변. 모래 샤워 중. 현서는 답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누니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물음표 하나를 보내더군요. 그 물음표를 받지 않기 위해 저는 열심히 현서에게 누니가 어찌 지내는지 알려줬습니다.
누니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일상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저는 제가 잘 지내는 줄 알았어요. 홍보 영상도 그럭저럭 완성되고 있었고요. 작업하는 동안 저는 구멍 뚫린 옷과 더는 안 입는 옷 몇 개를 거실에 깔아두고 누니를 풀어놓았어요. 새로 산 옷은 먹지 못하게 더워도 옷방의 미닫이문을 굳게 닫아놓았죠. 누니가 새 옷에까지 구멍 내면 제겐 입을 옷이 하나도 없게 되잖아요.
전 정말 그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과장님이 저희 동네에 들를 일이 있으니 티타임을 갖자고 했을 때 좋다고 답한 거예요. 잠깐 누니를 혼자 둬도 괜찮겠지 싶었어요. 옷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는데도 과장님에게서는 나오라는 연락이 없었죠. 저는 침대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메시지 수신음을 듣고 일어나기 위해 핸드폰 볼륨을 최대로 높이고요.
하지만 핸드폰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여름 낮의 강한 햇살 때문은 아니었어요. 처음엔 어깨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고, 귓가에 이빨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 눈을 떴는데, 눈을 뜨자마자 제 오른쪽 어깨에 앉아있는 누니의 눈과, 흰자 없이 검은자로만 가득한 그 눈과, 제 눈이 마주쳤어요.
제가 소리를 질렀고 누니를, 그 까만 눈을 제 몸에서 떼어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옷을 살폈죠. 제가 입고 있는 청바지와 리넨 반소매셔츠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어요. 심지어 브래지어에도 구멍이 났죠. 저는 집 안을 둘러보았어요. 누니가 머리로 힘주어 밀었는지 옷방 미닫이문이 열려 있었어요. 숨겨놓은 옷들이 튀어나와 있는 서랍장도 보였고요.
결국 과장님께 못 나갈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작업을 다 끝내지 못했다고 둘러댔을 뿐, 그 이유를 솔직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과장님이 제게 했던 말 때문이었어요. 미팅 끝나고 가진 식사 자리에서였을 거예요. 과장님이 제게 현서, 그 멋있는 친구는 잘 지내냐고 물으셨죠. 제가 현서와 유기동물 보호소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말한 이후로 과장님은 종종 제게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제가 그렇다고 답하자 과장님은 엄지를 치켜세우셨어요.
과장님이 하셨던 말 기억하시나요. 주변에 그런 멋진 친구 있으면 좋은 영향 많이 받겠어요, 였어요. 평소엔 무심하기만 한 과장님의 확신 가득 찬 말을 들으니, 정말 현서와 있으면서 늘 많이 배웠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저는 고개를 오래 끄덕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과장님께 현서가 놓고 간 친칠라가 저를 괴롭게 해서, 제 외출복을 갉아먹어서 나갈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겠어요.
입고 있던 옷까지 누니에게 먹혀버리자 제 손이 마구 떨렸어요. 저는 누니를 현관문 밖에 내놓아버렸습니다. 누니가 앞발로 문을 벅벅 긁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랑곳하지 않고 친칠라에 대해 검색했습니다. 친칠라 옷 먹어, 친칠라 옷 구멍, 친칠라 이갈이 옷 등 검색어를 바꿔가면서요. 하지만 누니와 같은 경우는 보이지 않았어요. 친칠라 인터넷 카페와 오픈채팅방에도 들어가 누니 같이 옷만 먹는 친칠라가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어떻게 대처할지를 물었어요.
하은 씨가 제 상황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현서는, 그러니까
제가 아는 현서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제가 받은 답변은 오직 한 개입니다. 그마저도 누니가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사람과 놀고자 하는 마음에 옷을 물어뜯고 먹는 것 같다는 말이었어요. 제가 지금보다 더 열과 성을 다해서 신경을 써주면 괜찮아질 거래요. 친칠라는 본래 천성이 착한 동물이니까요. 현서가 제게 했던 조언과 다르지 않았죠. 창밖으로 노을 진 하늘이 보이더군요. 그제야 저는 문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누니와 잠깐만 떨어져 있으려 했는데, 검색에 집중하다 보니 누니를 아예 버려두다시피 한 거예요.
급히 집 밖을 살폈지만 누니는 보이지 않았어요. 빌라 건물을 샅샅이 뒤져본 후 제가 사는 층을 향해 계단을 올랐습니다. 현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다짐하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어요.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죠. 과장님께만 하는 말인데, 누니가 없어진 게 사실 후련하기까지 했어요. 액정을 살피다 말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집 앞에서 누군가 절 지켜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거든요. 자세히 살펴보니, 흰 털뭉치가, 그러니까 저희 집 문고리에 걸린 우유보랭백 밖으로 머리만 빼놓고 있는 누니가, 까만 눈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더군요.
한동안 누니를 케이지 밖으로 꺼내주지 않았어요. 새로 주문한 옷까지 뺏길 수는 없잖아요. 누니는 케이지 문을 열심히 이빨로 물어뜯었습니다. 성질이 났는지 케이지 내부 층계 중 가장 높은 곳에서 일부러 떨어지기도 했어요. 마치 자해 공갈범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저는 쿵쿵거리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케이지 문을 열었습니다. 현서와 사람들이 제가 더 잘해주면 누니가 옷 먹는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속는 셈 치고 그 말을 따라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모든 옷을 화장실에 두고, 화장실 문을 닫아두는 방안을 고안했죠. 아무리 누니가 미닫이문을 힘주어 밀 수 있어도, 바닥에 가까운 서랍부터 열어서 서랍장을 다 뒤질 수 있어도, 여닫이문의 문고리까지 돌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화장실에 몇 시간씩 두어서 눅눅해진 옷을 만질 때마다 어쩐지 비참했어요. 보송보송한 옷을 입었던 이전 일상은 사라진 것만 같았죠. 아무리 누니의 부드러운 흰털이 제 곁에 있어도 옷에서 풍기는 화장실 냄새까지는 참을 수 없더군요.
그럴 때 순진한 얼굴을 한 누니를 보면, 우유보랭백에서 애처롭게 저를 바라봤던 누니가 떠오르면서, 아직은 헤어질 때가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저는 누니를 쓰다듬었습니다. 누니랑 함께하며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어떤 관계에서든 그 정도 시련쯤은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제가 아니면 누가 누니를 이해해주겠나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누니에게 정이 생겨버린 거겠죠.
오늘도 화장실에 옷을 넣어두고 누니를 케이지에서 풀어줬습니다. 누니 사진을 찍어 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누니는 자기가 집주인인 양 집 안을 당당하게 활보했어요. 화장실에 옷이 있는 걸 아는 듯이 그 근처를 맴돌기도 했죠. 그즈음 저는 홍보 영상을 최종 확인했어요. 그 시간이 제일 좋아요. 제가 받아본 원본 영상과의 차이를 실감해서겠죠. 편집된 영상을 보는 사람은 원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거예요. 저와 P종합병원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기억하겠죠.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간주하겠고요.
집중해서 영상을 보는데 피씨 메신저 창이 화면에 떴어요. 하은 씨였어요. 하은 씨가 오늘 잠깐 만날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곧 두 개의 메시지가 더 왔어요.
-요즘 누니와 함께 지내신다면서요.
-신경 쓰여서 연락드렸어요.
고민하다가 저는 점심시간 후에 볼 수 있다고 답장했습니다. 그 뒤 영상 완성본을 과장님께 보냈죠. 누니는 케이지에 가두고, 화장실 여닫이문을 굳게 닫은 채 집을 나섰어요.
하은 씨와는 처음으로 단둘이 만난 거였어요. 하은 씨는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어요.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는 말없이 앉아있었어요. 하은 씨가 선물 줄 게 있다며 쇼핑백을 제게 건네더군요. 그 안에는 연두색 도트무늬 니트 양말이 들어있었죠. 직접 만들었다고, 외출할 때 신기 적당할 거라고 하은 씨가 말하더군요.
“누니가 실내복은 갉아먹잖아요.”
그 말을 듣고 놀랐어요. 저만 겪었다고 생각한 일을 하은 씨도 경험했다니요. 저는 섣불리 하은 씨 말에 동의하지 않고 양말만을 바라봤습니다. 하은 씨가 이상하다고 말했던 현서를 더 신뢰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은 씨는 조심스럽게 제게 누니에 대해서 말했어요.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니를 돌봤다고 했습니다. 누니를 맡아주고 석 달쯤 지났을 때 하은 씨는 누니가 앉아있던 옷에 생긴 구멍을 발견했어요. 누니가 구멍을 낸 것만 같았대요. 하은 씨가 자신이 본 광경을 현서에게 전달했지만 현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옷에 원래 구멍이 나 있었는데 하은 씨가 보지 못한 것 아니냐고 웃으면서 말할 뿐이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은 씨는 누니가 옷을 먹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걸 말하니 현서는 그 정도도 감수하지 못하냐고 따졌고요. 누니가 자신을 따라주는 모습이 예쁘기에 옷을 먹는 것쯤은 여태 자기한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서요. 그러니까, 누니가 현서 옷도 먹고 있었던 건 거죠! 현서 말을 듣고 하은 씨는 본인이 유난히 누니에게 엄격했나 싶었대요. 누니가 하은 씨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는 했으니까요.
누니는 실내복 갉아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실내복이 된 외출복도 다 망가뜨려 놨어요. 네가 어느 정도까지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겠다는 듯이 더 열심히 옷에 구멍을 내는 것만 같았대요. 하은 씨는 그 모든 행동을 받아주려 했다고 전했습니다. 현서는 멋진 애인이니까, 자신은 현서를 사랑하니까, 현서가 자신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리 없을 테니까.
하은 씨는 뜨갯감으로 구멍 난 옷을 수선하기 시작했어요. 누니는 바느질로 구멍을 꿰맨 옷과 달리, 뜨갯감을 덧댄 옷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듯 바라보기만 하고 먹지 않았다더군요. 이전의 하은 씨는 한 번도 뜨갯감을 사용해 옷을 수선해본 적이 없었답니다. 단지 액세서리, 그러니까 이어폰 케이스, 키링, 장갑, 목도리 등만을 뜨개질해 팔았어요. 그리고 자신도 그 정도의 것들만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고요. 마침내 하은 씨는 뜨갯감을 덧댄 옷들을 입으며 생활했습니다. 편안했고 패치워크 디자인도 괜찮아 보였대요. 그 이후로 하은 씨는 이런 패치워크 디자인의 옷을 사이트에 올려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배현서는 별로인 것 같다고 비웃더군요. 가뜩이나 적은 고객이 더 줄 거라면서요.”
그 말을 했던 하은 씨의 씁쓸한 표정이 잊히질 않아요. 실제로 하은 씨는 그냥 현서에게 선물할 옷이나 만들자는 생각으로 뜨개질했대요. 현서와의 지난 시간을 반추하면서 패치워크 옷을 만들었죠. 하지만 그 옷을 현서에게 주지 않겠다 마음먹고, 핸드메이드 제품 플랫폼에 올렸답니다. 현서는 하은 씨가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고요.
실제로 패치워크 옷을 만들면서 모든 제품을 제작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배 가까이 늘었다더군요. 하지만 미리 공지한 덕인지, 컴플레인은 없었고 오히려 고객 수는 증가했대요. 하은 씨는 집 안을 둘러보며 누니만 없으면 행복하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자신이 낯설어서 누니한테 일부러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대요. 그러면 이전처럼 누니에게 애정이 생길 것 같았다나요.
그런데 끝내 누니가 패치워크 옷까지 먹어버린 거죠. 그때 하은 씨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더군요. 이전에 자신의 구멍 난 옷을 마주했을 때는 내가 부주의했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패치워크 옷까지 갉아먹은 걸 보곤 누니가 괴기하다고 확신했답니다. 자신이 토마토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무렵이고요.
“토마토 소스를 먹고 나서, 일주일 동안 열 몸살에 걸렸어요.”
회복 후 하은 씨는 현서에게 헤어지자고 다시 말했어요. 현서는 또 떼를 쓰는 거냐고, 너는 늘 이런 식이라고 말했대요. 하은 씨는 이번에는 진심이니 연락하지 말라고 답했습니다. 현서는 자기가 아니면 누가 너를 이해하겠냐고, 정신 차리라고, 네가 나를 잊지 못해 또 연락할 것을 안다고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더군요.
실제로 하은 씨는 현서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고 말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다고, 너 없이는 살 수 없었을 것 같다고 얘기하고 싶었대요. 하지만 하은 씨는 천과 뜨갯감이 뒤섞인 옷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더군요. 구멍 난 옷을 숨긴 채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서요.
하은 씨의 말을 들은 저는, 혼란스러웠어요. 뉴스나 커뮤니티에서만 보던 일이, 현서와 하은 씨 커플에게 일어났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었거든요. 혹여나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하은 씨가 현서에게 해코지하는 경우를 상상했지, 그 반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왜냐면 현서는 평판 좋은 운동 치료사고, 늘 약자 편에 섰고, 모두가 칭찬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누구보다 주변 시선을 엄청나게 의식하는 애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저도 현서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 봐왔잖아요. 현서가 솔직한 편이기는 해도 올바른 사람이라고 믿어왔었거든요. 현서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잖아요. 제게 사귀는 사람이 생기면 조심하라고,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께름칙한 기분이 들면 가장 먼저 자기에게 말하라고 늘 조언해줬어요. 근데 현서가 하은 씨한테 그러고 있었다니.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그럼에도 하은 씨가 겪은 일이 제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현서는, 그러니까 제가 아는 현서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진짜 현서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당장 전화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그 자리에서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고는 그러셨군요, 같은 애매한 대답을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테이블 밑으로 땀이 가득한 손바닥을 바지에 닦으면서요.
“여진 씨, 누니는 생각보다 훨씬 영리한 아이예요.”
하은 씨 말을 끝으로 카페에서 나왔어요. 저는 그 말을, 그 말을 한 하은 씨를 머릿속으로 계속 떠올리며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뒤로 집 화장실에 있는 누니를 보고 도망친 것이고요. 밖을 서성이다가 무더위에 아무 벤치에나 앉았어요. 현서에게 전화해봤지만 받지 않더군요. 하은 씨와 누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메시지를 남기곤 저는 행인을 구경했습니다. 그들의 속옷에도, 실내복에도 구멍이 났을까 알고 싶어졌어요. 그러다가 하은 씨가 떠준 양말을 신어봤어요. 여름인데도 답답하지 않고 포근했어요. 연두색 도트무늬도 제법 귀여웠죠. 네, 지금 신고 있는 이 양말이요.
과장님이 영상을 업로드했다며 보낸 메시지도 보았습니다. 평소였으면 뿌듯해하며 웹 페이지를 확인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어요. 다듬기 바빴던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는 벤치에서 일어나 이렇게 사무실에 왔습니다. 과장님과 만나기 위해서요. 오늘 이후로는 이곳에 올 일이 없겠네요.
삼 년 가까이 이 회사 소속으로 있으면서 제가 여러 병원 홍보 영상을 제작했더라고요. 왠지 삼 년보다 더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네요. 홍보 영상을 본 사람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요. 병원을 다녀온 후로 된통 속았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요 아니면 아직 그들이 본 영상이 진실이라 믿고 있으려나요.
과장님, 누니가 지금 집에서 무얼 하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역시 잘 모르겠다고만 하시네요. 옷을 다 갉아먹었을 수도 혹은 에어컨이 꺼진 탓에 쓰려져 있을 수도 있겠죠. 왜 그러세요, 과장님. 너무 불안해 마세요. 커뮤니티나 에스엔에스에 P종합병원 의사 얘기는 올리지 않도록 해볼게요. 정말이에요. 여태 저는 과장님께 깊은 신뢰를 주었던 직원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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