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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길동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2. 10. 14:30

산행, 길동무

배성희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북한산 자락의 대동문에 등산객들의 움직이는 창밖 풍경이 보일 때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종종 산행에 나서곤 했다.

어릴 적엔 산은 내게 생소한 단어였지만 중년의 문턱에서 연인을 그리워하듯 늘 허기진 모습으로 산을 사모하는 여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늘 정장만을 고집하고 주름 진 옷이나 땀에 젖은 옷은 상상도 못 할 만큼 깔끔했던나였다. 첫 산행할 때 입었던 헐렁한 등산복은 무거웠던 삶의 짐을 벗어 놓은 듯 편안하고 좋았다사춘기 소녀처럼 폴짝폴짝 뛰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느긋한 산 여인이 되게 했다.

사람에게 깊은 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을 동경하는 나의 사고思考는 아마도 어릴 적 학교 사택에서 살면서 자연과 더 가깝게 지냈던 향수 때문이 아닐 런지

뒤늦게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이제는 느긋하게 상대방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대인관계가 부족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걸어온 길과 또 어떤 사고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궁금했다. 늘 상대방의 말이 흥미롭고 신기하여 안 그런 척하면서도 마음이 쏠린다.

사회 경험한 것이라곤 나의 적성을 따라 선택했던 유아기관에서 철부지 아이들과의 생활이 전부였다,

그 아이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운 것과 책 속의 경험뿐이었다그 얄팍한 소견으로 냉철한 사회를 헤쳐나가면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했다.

그로 인한 잔잔한 아픔을 겪은 후론 요즘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럴 때 이렇게 하는 것이었구나뒤늦게 무릎을 칠 때도 있다다행히 면전에서 침 마른 칭찬보다 잘못을 지적할 때는 우선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상대방의 충고를 그냥 흘러버리지 않는 게 다행이 아닌가 싶다.

우연히 산행을 같이 하게 된 지인이 있었다도봉산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사찰이 보일 때마다 늘 합장을 했다.

불교인이세요?’ 내가 말을 건네면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절 문 앞에서 합장하는 것은 산을 오르게 되어 감사하다란 인사와 산행을 하는 모든 이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 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세상을 참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그가 쏟아내는 지난 과거는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게 아닌데도 마음에 욕심이 없어 보였다종교를 가졌느냐고 그가 내게 물었다기독교인이라고 하자 "어쩐지 불교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세요라며 의아해했다자신은 종교는 가지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보다 남을 위해서 기도하면 자신의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에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오랜 종교 생활을 해온 나는 아직도 나 자신만의 안일한 기도에만 연연한다그런 어린 신앙이 갑자기 부끄러웠다그분의 인생 경험을 듣고 또한 나의 서투른 인생 경험을 나누다 보니 그분은 오히려 내게 유순한 성격을 가졌다고 칭찬을 했다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정겨운 단어에 그만 픽웃고 말았다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바동거리고 사는 내 모습을 똬리 틀고 있는 뱀 같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쉬운 길만 택해 혼자 산행을 하다 그분의 인도로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며 힘든 코스를 택했다비록 힘들긴 했지만 그 땀방울 속에 나의 부끄러웠던 오물들이 씻긴 양 오히려 몸이 가벼워 왔다.

생활에 변화가 오고 그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약한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으로 산행을 하곤 했던 오늘의 나어제의 나에게서 탈피하고픈 몸부림이었기에 전신을 적시는 땀방울을 사랑하고 있는 나를 본다.

논어에는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智者樂水)라 하였다. 인간의 미덕과 지혜를 강조한 성어이다. 즉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은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아마 나도 이 산행의 길동무를 만나서 마음을 비운 건지 모르겠다.

문화 상징 사전에서 현대 서양 편을 보면 산은 천국을 상징하며 구제 구원을 상징한다고 한다강인한 생명력인 태양과 관련하여 산은 재생을 상징한다는 것이다중세 유럽에서는 왕관십자가계단 , 별 초생 달 삼각형에다 아이리스(붓꽃무지개 여신)를 붙여 '구제의 산'이라는 상징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그리고 보면 산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도 암울한 현실에서 탈피하고픈 구제의 길 그리고 광명의 빛을 찾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계간 가온 2024 겨울호

배성희

부산 출생, 수필가, 시인, 동화 구연가, 낭송가, 동작문협 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동작문인협회 부회장 역임, 동작문인협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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