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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치모랍언 (梔貌蠟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7. 9. 17:32

[정민의 世說新語]

[187] 치모랍언 (梔貌蠟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2.12.04. 23:30
 
 
 
 
 

시장에서 말 채찍을 파는 자가 있었다. 50전이면 충분할 물건을 5만전의 값으로 불렀다. 값을 낮춰 부르면 마구 성을 냈다. 지나가던 부자가 장사꾼의 말에 혹해 5만전에 선뜻 그 채찍을 샀다. 부자가 친구에게 새로 산 채찍 자랑을 했다. 살펴보니 특별할 것도 없고 성능도 시원찮은 하품이었다. "이런 것을 어찌 5만전이나 주고 샀소?" "이 황금빛과 자르르한 광택을 보시구려. 게다가 장사꾼의 말에 따르면 이 채찍은…." 그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친구는 하인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래서 그 채찍을 담갔다. 그러자 금세 비틀어지더니 황금빛도 희게 변해버렸다. 노란 빛깔은 치자 물을 들인 것이었고, 광택은 밀랍을 먹인 것이었다. 부자가 불쾌해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도 들인 돈이 아까워 그 채찍을 3년이나 더 지니고 다녔다. 한번은 교외에 나갔다가 반대편에서 오던 수레와 길 다툼이 일어나 말이 서로 엉겼다. 부자는 화가 나서 아끼던 채찍을 들어 상대편 말을 후려쳤다. 그러자 채찍은 그만 대여섯 도막이 나서 땅에 떨어지고, 맞은 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쪽을 살펴보니 텅 비었고, 결은 썩은 흙과 같았다.

유종원(柳宗元)이 말했다. "오늘날 그 외모를 치자로 물들이고, 그 말에 번드르하게 밀랍 칠을 해서[梔貌蠟言] 나라에 자신의 기예를 팔려는 자가, 제 그릇에 맞게 대접하면 '내가 어찌 공경(公卿)인들 될 수가 없겠는가?'하고 성을 발칵 낸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공경이 된 자도 많다. 아무 일 없이 3년이 지나면 괜찮겠는데, 막상 일이 생겨 처리를 맡기면 속은 텅 비고 알맹이는 없어, 채찍을 휘둘러봤자 도막도막 끊어져 땅에 떨어지고 말 테니 이 노릇을 어찌하겠는가?" 당나라 때 유종원의 '편고(鞭賈)'에 나오는 이야기다.

황금빛은 치자 물을 들인 것에 불과했고, 반짝반짝하는 광택은 밀랍 칠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장사꾼의 채찍처럼 제 모습을 치장하고, 제 말을 그럴 듯하게 꾸며서 교언영색의 감언이설로 세상을 속이는 자가 많다. 장사꾼도 나쁘지만 그 말에 현혹되어 5만전을 주고 사는 주인이 더 문제다. 세상 일은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채찍을 휘둘러 엉겨붙었던 말이 놀라 비켜서지 않고, 채찍만 맥없이 동강 난다면, 그 민망한 노릇을 어찌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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