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188] 모릉구용(摸稜苟容)
"사람을 살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형상을 살피지 않고, 그림자만 살피면 된다. 겉모습에 힘을 쏟는 것이 형상이고, 참된 정에서 드러난 것이 그림자다. 능히 만종(萬鍾)의 녹을 사양하다가도 콩국 앞에 낯빛을 잃는다. 입으로는 백이(伯夷)를 말하지만 마음속에는 도척(盜跖)이 들어앉았다. 공손히 꿇어 충성을 바치면서도 속으로는 속임수를 쓴다. 겉보기엔 어진 이를 좋아하는 듯하나 속에는 독사를 품었다. 이 밖에 모서리를 어루만지며 구차하게 넘어가려는 술책, 뜻에 영합해서 총애를 취하려는 자취, 겉으로 칭찬하고 속으로는 배척하는 형상, 간악하고 교묘하게 은혜와 원한을 되갚는 것 등등, 일상의 사이나 사물과 접촉하는 즈음에 드러나는 그림자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림자가 이와 같다면 형상은 굳이 볼 것도 없다. 이것이 군자가 사람을 살피는 방법이다."
이기(李墍·1522~1600)가 '간옹우묵(艮翁疣墨)'에서 한 말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을 논했다. 이 가운데 핵심을 피하는 대신 모서리를 어루만지며 구차하게 넘어가려는 모릉구용(摸稜苟容)의 술책은 당나라 때 재상 소미도(蘇味道)에게서 나온 말이다. 그는 측천무후의 섭정기에 전후로 세 차례에 걸쳐 7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고 해박한 식견을 지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위의 눈치나 보고 아첨이나 하면서 특별히 한 일이 없었다.
'구당서(舊唐書)'의 소미도열전(蘇味道列傳)에는 그가 누군가에게 했다는 충고가 실려 있다. "일 처리는 명백하게 결단하려 하지 말게. 만약 착오라도 있게 되면 반드시 견책을 입어 쫓겨나게 되지. 그저 모서리를 문지르며 양쪽을 다 붙들고 있는 것이 좋다네."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혀 스스로 입지를 좁히지 말고, 양다리를 걸쳐놓고 상황에 따라 유리한 쪽을 잡는 것이 처세의 묘방이라고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당시 사람들이 이를 비꼬아 그에게 '소모릉(蘇摸稜)'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밖에 사람을 판단할 때 살펴 따져야 할 일이 많다. 인기에 영합해서 점수나 벌려는 행동, 겉과 속이 다른 처신, 말과 어긋나는 몸가짐 같은 데서 그림자의 실체가 언뜻언뜻 드러난다. 겉만 보면 안 된다. 모서리를 어루만지며 양다리 걸치는 사람을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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