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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세계화? 변형 않고 우리 것 그대로 밥상 차리는 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3. 30. 14:25

“한식 세계화? 변형 않고 우리 것 그대로 밥상 차리는 것”

중앙선데이

입력 2024.03.30 00:01

 
 
 
 
 

‘한식의 대모’ 조희숙 셰프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영국에 본사를 둔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은 전 세계 미식업계 역사를 만들어 온 숨은 영웅들로 5명의 여성 셰프를 발표하고 경의를 표했다. 그 중 한 명이 ‘한식의 대모’로 불리는 조희숙 셰프(64)다. 그는 2020년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어워드-아시아 최고의 여성 셰프’, ‘2021 미쉐린 가이드-멘토 셰프’, 2022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한 ‘50세 이상 성공한 아시아 여성 50인’에도 선정된 바 있다.

이 화려한 수식어들에는 한국 전통 요리법과 기술을 보존하는 데 바친 40년 세월이 담겼다. 사범대학 졸업 후 학교에서 가정 교과 선생님을 하던 그는 대학 선배의 우연한 제안으로 1983년 세종호텔 한식조리부에 들어간다. 새로운 진로를 고민하던 중 맞닥뜨린 한식조리의 세계는 맏딸로서 부엌일이 낯설지 않았던 그에게 “내가 더 잘 할 수 있고, 잘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력은 화려하다. 조 셰프는 노보텔 앰버서더 서울 강남,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신라호텔 등을 거쳐 주미 한국 대사관저 총주방장으로 일했다.

‘한식의 대모’라 불리는 조희숙 셰프는 현재 개인 연구소 ‘한식공방’을 운영하면서 ‘한국의집’ 조리 고문을 맡고 있다. 최영재 기자

옛날엔 지금보다 외식 업장 주방 일이 더 힘들었겠죠.
 
“아침에 눈 뜨면 집을 나와 밤이 어둑해지면 돌아올 만큼 하루 종일 일만 했죠. 지금처럼 요리사에 대한 인식이 좋을 때도 아니었으니 맘고생도 있었고요. 요리사라는 걸 주변에 숨긴 동료들도 있었으니까요.”
 
‘일하는 엄마’였으니 고충은 더 컸겠지요.
 
“7남매의 맏며느리로 제사·명절·차례상을 꼬박꼬박 차려야 했어요. 출산·육아 휴직도 딱 30일 뿐이라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길게 활용하려고 아이가 나오기 직전까지 일했죠. 다행인지, 제 고집인지 두 아이가 비번 날 태어났어요.(웃음) 사실 휴직 기간에도 맘은 불편했어요. ‘나는 애 낳고 사흘 누웠다가 부엌에 나가 일했다’는 시어머니 앞에서 편히 누워 있을 수 없더라고요.”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 ‘영웅 5인’ 선정

조희숙 셰프의 대표메뉴 ‘부각탕수’. [중앙포토]

2015년 개인 연구소인 ‘한식공방’을 차리고 프리랜서가 됐다. “나만의 생각대로 내가 해 보고 싶은 요리를 구현해 보자”는 계획이었고, 이후 프리랜서로 다양한 기업과 업장의 컨설팅 활동을 병행했다. 강단에 서면서 아예 대학에 적을 둘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매번 현장으로 돌아왔다. “내가 더 좋아하고, 실력을 더 발휘할 수 있는 쪽이 현장”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개인 공방을 운영하는 동시에 “셰프 커리어의 마지막 경험은 식당 운영”이라는 생각으로 2019년 컨설팅하던 서울 원서동의 레스토랑 ‘한식공간’을 인수해 오너 셰프가 됐다. 한식공간은 2019년 ‘미쉐린 가이드’에서 1스타를 받았고, 2020년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43위에 올랐을 만큼 미식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인 2021년 9월 문을 닫았다.

레스토랑 ‘한식공간’ 폐업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습니다.
 
“팬데믹 영향으로 운영도 힘들었지만 더 큰 이유는 숫자와 씨름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요리 연구와 경영을 같이 하려니 벅차더라고요. 대신 국내외 미식가들의 입맛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으니 잃은 건 없죠.(웃음)”
 
‘한식공간’에서 선보인 부각 요리로 ‘부각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죠.
 
“부각 4~5종과 부각탕수를 선보였는데 내·외국인 모두 반응이 좋았어요. 개인적인 성취와 공적 사명감이 맞물린 경우죠. 같은 호텔에서 일식은 사시미 한 접시에 20만원을 받고, 한식은 상 한 번 차릴 때마다 주방 전체가 뒤집어질 만큼 손이 많이 가는데 가격은 훨씬 낮게 받는 게 안타까웠어요. 한식의 본류를 지키면서도 경제적으로 효율성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현장에 있는 내 몫이라고 생각했죠. 부각은 우리가 예부터 먹어왔지만 어느새 묻혀 버린 음식이죠. ‘바삭함’은 전 세계인이 좋아하는 맛이잖아요. 우리만의 독창적인 튀김인 부각을 요즘 세대에 맞게 잘 접목하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겠다 확신했죠.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자’ 한 건데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고, 모던 한식이 추구해야 할 변형의 모티브가 된 것 같아요.”

 

조희숙 셰프의 대표메뉴 ‘명란낙지계란찜밥’. [중앙포토]

최근 글로벌에서 K푸드 인기를 견인하고 있는 모던 한식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양식 베이스에 한식의 요소를 넣거나, 전통음식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거나. 조 셰프의 경우는 후자다. 궁중요리, 반가음식, 향토음식을 비롯해 고(古) 조리서에 기록된 음식들까지 폭 넓게 연구해 온 그는 이를 현대인의 입맛과 정서에 맞게 풀어내고 있다. 젊은 유학파 셰프들이 한식에 새롭게 눈 뜨면서 그를 ‘셰프들의 스승’이라 부르며 배움을 청하는 이유기도 하다.

“밥 없이 반찬만 먹어야 하니 간 슴슴해져”

한식 세계화는 꽤 오래된 숙제입니다.
 
“처음 정부 주도로 ‘한식 세계화’를 시작했을 때는 강제로 떠밀리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서양요리를 공부한 셰프들은 숙제를 풀기 위해 익숙한 한식을 어설프게 접목할 수밖에 없었죠. 한식을 깊이 고민할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우리 스스로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서양식 문화에 맞춰 간 감도 없지 않아요. 한상차림으로 차려내는 공간전개형 한식이 언제부턴가 서양식 시간전개형 코스로 나가게 된 것도 그렇죠. 제일 아쉬운 건 한식인데 식탁에서 ‘밥’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한식의 고유한 특징은 밥과 반찬으로 구성됐다는 점인데, 모던 한식당 대부분 밥 없이 메인 요리라는 이름으로 반찬만 제공하고 있죠. 이제 서양식에 맞춰 바꾸거나 변형하지 말고, 우리 것 그대로 밥상을 차릴 때라고 생각해요. 이미 외국 셰프들은 한글 그대로 ‘밥(Bop)’과 ‘반찬(Banchan)’을 인식하고 있어요.”
 
‘밥과 반찬이 어우러진 밥상’이 한식 세계화의 미래라는 거군요.
 
“발효를 기본으로 한 간장·된장·고추장 등의 전통 양념을 이용해 담백한 맛부터 맵고 짜고 단 맛까지 다양한 손맛을 내는 게 한식인데, ‘발효음식’이라는 간판만 남고 정작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양념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밥  없이 반찬만 먹어야 하니까 간을 슴슴하게 할 수밖에요. 식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식에선 다양한 양념의 조화가 중요하고, 그 양념은 발효를 근간으로 하죠. 이 기본만 확실히 알면 이후에는 고정관념을 깨는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해도 흔들리지 않죠.”

오너셰프로 운영했던 레스토랑 ‘한식공간’에서 코스 마지막에 차려냈던 반상 차림. [중앙포토]

“밥이야말로 우리 식문화의 주인공”이라는 철학은 조 셰프가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다. 2020년에는 사진작가 강진주씨, 농부 전대경씨와 함께 공저한 책 『쌀을 닮다』가 미식 책 분야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구르망 월드 쿡북 어워드’ 쌀 부문 1위를 수상했다. 조 셰프는 다양한 쌀 요리와 이에 어울리는 반찬 레시피를 소개했다.

인터뷰 전날인 27일에도 그는 ‘한국의집’에서 국제 미식 행사 ‘50 베스트 시그니처 세션’을 개최하면서 맛있는 밥을 선보여 박수를 받았다. 매년 아시아 최고의 레스토랑 50곳을 발표하는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2024’ 시상식이 올해 서울에서 열린 것을 기념하는 미식 행사로 조 셰프를 비롯해 싱가포르·태국 출신 역대 아시아 최고 여성 셰프 수상자들이 협업한 저녁 만찬 행사였다. 4명의 셰프는 코스 별로 따로 또 같이 각각의 메뉴를 선보였는데 마지막 메인 ‘밥상’만큼은 함께 차렸다.

 다른 국적의 셰프들이 함께 차린 밥상이 궁금합니다.
 
“모두 아시아인들이라 쌀의 중요성에 공감하더군요. 메인을 반상으로 하자 제안했고, 내가 밥을 맡았어요. 우보 농장에서 가져온 토종쌀에 베트남 현미 두 종류를 섞었는데, 한국의 찰기 있는 쌀과 날아다니는 베트남 쌀이 조화를 잘 이뤘다고 다들 좋아했어요. 맛도 좋지만 아시아의 화합을 제대로 보여줬다고.(웃음)”
 식당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밥상 회복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사 먹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일반 가정 식탁에서도 반찬이 사라지고 있어요. 이러다 아예 반찬 만드는 법을 다 잊어버릴 것 같아요. 한두 가지라도 가족의 입맛대로 만든 반찬과 밥을 놓고 다 같이 둘러앉은 풍경이 필요하지 않을까. 치킨·햄버거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밥맛을 알려주는 것도 어른들의 몫이죠.”
 
한식이 발전하려면 소비자의 태도도 달라져야겠죠.
 
“요즘처럼 인건비·재료비가 상승할 때 나물 한 접시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손님들은 반찬 리필 안 해준다고 별점 테러하고, 추가 반찬을 남기기 일쑤죠. 그렇게 남아서 버려지는 반찬은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장인의 불거진 손마디를 존중할 줄 아는 사회가 외식 시장을 키우고, 사라질지 모르는 밥상문화를 지킬 힘을 갖는다고 믿어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