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성스러운 영웅, 곧 성웅으로 불리운다. 충무공은 400여년전 인도와 중국, 조선을 집어삼키겠다는 망상에 젖었던 권력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지휘 아래 조선의 바다를 침공한 왜구의 수군을 숱한 전투에서 한번도 지지 않고 격멸시키며 호남과 조선을 지켰다.사후 그를 수호군신으로 섬기는 민중의 추모 열정은 각지에 추모단 건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산 현충사, 통영의 충렬사와 여수의 충민사를 비롯해 전국 각지 20곳 넘는 사당들이 충무공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증거한다.
지난 24일 이순신의 칼이 장도란 공식명칭으로 국보승격된 사실이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은 데서도 보이듯 충무공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여전하지만, 희한한 역설이 400년 이상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는 생전 그의 실제 얼굴과 자태가 어떠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난중일기’와 ‘징비록’을 위시한 숱한 기록으로 무공을 살필 수 있지만, 얼굴과 자태를 그린 당대와 가까운 시기의 초상화 영정은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용모를 묘사한 기록들이 있지만 정설을 찾기 어렵다. 최근 충무공 새 표준영정 제작을 놓고 구설이 잇따르는 배경이기도 하다.조선후기에도 왕실과 조정에서 정식으로 충무공 공신도나 영정을 그린 기록은 없다. 해전 중 황망히 전사한 탓에 화공이 지켜보고 그릴 기회는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하고 사후에도 선조임금이 충무공을 경계하며 좋게 보지 않았던 탓이란 설도 제기된다. 부산 동아대 박물관에 조선시대 작품으로 ‘충무공이순신상’이라고 명기된 무인풍 초상화가 있지만, 정본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양털로 모자와 군복을 만들었고 얼굴도 북방 유목민 용모를 하고 있어 조선 장수의 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순신의 영정은 민족의식이 싹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야 상상과 추정에 입각해 그려지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순신 영정은 1953년 월전 장우성이 그린 관복 입은 영정(충남 아산 현충사 소장)이다. 1973년 국가표준영정으로 채택된 뒤 100원 주화와 500원권 등에 쓰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충무공 영정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심전 안중식의 ‘한산 충무’(1918)다. 근대기 이후 세간에 처음 유명세를 얻은 건 1933년에 동아일보의 후원을 받아 그린 청전 이상범의 영정으로 월전의 작품과 달리 기세 당당한 수염달린 무인상의 자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표준영정에 채택되지 않으면서 잊혀졌고 현재는 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 뒤 일제강점기 화단 실력자였던 이당 김은호가 1952년 제작한 영정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1953년 장우성이 그린 영정(아산 현충사 소장)이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뒤에는 정형모 화가가 1978년 그린 영정이 나왔는데 현재 경남 통영 한산도 제승당 소장본이 되었다. 그외에 여수 영당에 봉안됐던 사진본과 일제강점기 신문 삽화 등이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동양고전연구자인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한국윷문화연구소장)가 의미심장한 영정 사료를 발굴해 공개했다. 1599년 통영의 민중들이 충무공을 기려 자발적으로 만든 착량묘라는 작은 사당(착량영당이라고도 한다)에 봉안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영정인데 그림 수준과 기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게 일부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 착량영당의 영정은 충무공 순국 뒤 장병과 어민들이 자발적으로 그려 봉안한 것으로, 정조때 전국의 충무공 자료를 조사 교감해서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에도 실린 조선시대 충무공 영정 유일본으로 평가된다. 임 교수가 한 지방 수장가한테서 입수한 이 영정은 ‘통영충무공영당봉안’이란 화제가 그림 왼쪽에 쓰여져 있고 중심부에 오른 주먹 움켜쥐고 왼손엔 칼을 쥔 채 적을 노려보는 당당한 모습을 채색을 입혀 표현해놓았다. 임 교수는 “그동안 전혀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충무공 영정으로 용모나 갑옷 양식 등에 대해 새로운 연구를 촉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착량묘 영정의 역사도 기구하다. 전란 직후부터 착량묘에 계속 봉안되다가 1877년 충무공 십대후손인 이규석 통제사에 의해 새로 영당을 신축해서 봉안하려고 밖으로 임시로 옮겨졌고 바로 다음해에 통제사가 경질되면서 영정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그렇게 150년간 묻혀있다가 이번에 추정본을 찾게 됐다는 게 임 교수의 주장이다. 여러 표준영정을 그린 전 동국대 미술사학과 손연칠 교수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불화양식으로 그려진 영정으로, 디테일이 섬세하게 표현된 수작”이란 평가도 내놨다. 임 교수가 공개한 착량묘 추정 영정은 전래경위나 출처가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조선 후기 영정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이태호 전 명지대 교수를 비롯한 일부 미술사가들은 민간 무신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내비친다. 기존 화가들이 그린 충무공 영정 또한 모두 명확한 근거가 없고 전래본도 경위가 확실치 않기는 매한가지여서 영정 사료의 추가공개가 논의에 새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된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영국 런던이나 미국 워싱턴의 국립초상화미술관 같은 별도의 수장 연구기관을 두거나 기존 국립박물관에 초상화부를 두어 역사적 위인의 관련 사료와 논란의 경위를 기록할 전담 부서를 둘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만시지탄이지만, 논란의 전말과 양상이라도 제대로 기록하고 알아야 가닥을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벌어지는 영정 논란들은 역사적 위인에 대한 진지한 기록과 사료 탐구에 무심한 채 눈앞 현상과 이익만 좇는 안일함에서 비롯된 후과에 다름 아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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