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 39
-곰 잡으러 가자
문을 열고 나가니 아직 퇴각하지 못한 구석기 이전의 어둠이 내 앞에 서 있다
막막한 아침의 배꼽을 향해 휘휘 손을 내저으며 몽환 속에 들어설 때
나는 맛이 없는 외로운 짐승일 뿐
따먹어야 할 열매는 이미 흙으로 돌아가고
투박한 돌도끼 대신 휘청거리는 볼펜 한 자루 쥐고 두리번거리는 화면의 미망에
망연하다
빙하기가 다시 오려는지 저 멀리서 쿵쿵거리며 울리는 발자국 소리
나는 거역할 수 없는 거인을 공손히 기다린다
희망은 공포를 가득 안은 막차
자꾸 수만 년 전 동굴 속으로 몸을 구겨넣는다
이럴 때 미련한 곰은 위대한 신화의 주인공이다
불교문예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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