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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0Km 폐교로드

"이웃끼리 원수 됐다"…묻지도 않고 학교 통폐합, 싸움만 키웠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3. 30. 18:04

"이웃끼리 원수 됐다"…묻지도 않고 학교 통폐합, 싸움만 키웠다 [4500km 폐교로드⑧]

중앙일보

입력 2023.01.23 15:01

업데이트 2023.01.2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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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보은군 성주리에 있는 보은정보고등학교. 1979년 문을 연 이 학교는 2025년까지 신입생을 받지 못한다. 약 2km 떨어진 충북생명산업고와 통폐합(2026년)이 지난해 결정됐기 때문이다. 충북에서 고교가 통합되는 첫 사례다.

충북 보은군 성주리에 있는 보은정보고는 2026년 인근 충북생명고와 통폐합된다. 김태윤 기자

 

충북에서 처음으로 고교 통폐합 결정 

보은군은 10여 년 전부터 고교 재배치 문제로 시끄러웠다. 당시 도 교육청은 학생 수 감소를 이유로 보은정보고와 보은여고를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보은정보고 동문과 학부모들이 거세게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10년 새 상황은 바뀌었다. 당시 6학급이던 보은정보고는 현재 각 학년 당 1개 학급으로 줄었다. 학생 수는 32명에 불과하다. 1학년은 7명이다.

충북 보은군 송죽초등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지난해 3월 판동초 분교장으로 편입됐다. 김태윤 기자

결국 지난해 5월 통합 설문에서 보은정보고 학부모 대부분은 통합 찬성에 손을 들었다. 더는 학교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날 보은정보고 앞에서 만난 고3 남학생은 “학교가 없어지는 것은 싫지만, 완전 폐교가 아니라 통합이라서 그나마 낫다고 생각한다”며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대부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내 3곳의 초등학교가 통폐합해 2019년 개교한 합천가야초등학교. 김태윤 기자.

세 곳 합친 합천가야초는 활기 돌지만 

지방에서 학교 통폐합은 흔한 일이다. 서너 곳이 하나로 합쳐지는 경우도 있다. 지난 11월 중순 찾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합천가야초등학교. 이 학교는 가야면에 있는 가산‧숭산‧해인초를 통폐합해 2019년 개교했다. 2350㎡(약 710평) 부지에 지방에서 보기 힘든 최신식 시설을 갖춘 이 학교에는 현재 68명의 학생이 다닌다. 점심시간 찾은 학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통합으로 문을 닫은 세 학교와 인근 마을 사정은 달랐다.

 

2019년 통폐합 후 문을 닫은 합천 해인초등학교 전경. 김태윤 기자

통폐합된 해인초·가산초 역사 속으로 

같은 날 찾은 합천 해인사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하지만 해인사 경내에 있는 해인초 주변은 썰렁했다. 한 관광객은 “절 안에 학교가 있는지 몰랐다”며 운동장을 둘러봤다.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운동장엔 찢어진 낡은 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합천가야초와의 통폐합으로 문을 닫은 해인초는 현재 해인사 스님들의 방사 등으로 활용한다. 학교 옆 가게에서 김장하던 70대 노인은 “옛날에 학생들이 억수로 많았는데, 하나둘 줄더니 결국 문을 닫았다”고 했다.

2019년 통폐합 후 문을 닫은 합천 가산초등학교. 김태윤 기자

합천가야초에서 2km 떨어진 가산초는 수풀만 무성한 채 방치됐고, 약 6km 거리인 숭산초는 독서체험관과 캠핑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산초 앞에서 만난 한 60대 주민은 “아이들만 생각하면 통합된 게 잘된 일이지만, 저렇게 버려진 학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영월중학교. 김태윤 기자

 

“지역민 의견 수렴 없이 통폐합 결정" 

학교 통합이 지역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강원도교육청은 2021년 영월읍에 있는 영월중과 봉래중을 통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학생 수가 50여 명인 봉래중을 폐교하고 영월중(229명)과 통폐합한 뒤 봉래중 자리로 이전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부지와 교명을 놓고 두 학교 동문 간, 지역민과 도 교육청 간 갈등이 2년 넘게 지속하며 현재 유보 상태다.

인근 영월중과 통폐합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봉래중학교. 김태윤 기자

영월읍에서 만난 영월중·공고 동문회 관계자는 “도 교육청이 지역민 의견 수렴 없이 제멋대로 통합 계획을 발표하면서 두 학교 동문끼리 앙숙이 됐다”고 토로했다. 이와 관련,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관계자는 “그동안 교육부와 지방 교육청은 학생 수가 줄면 통폐합이라는 칼로 쪼개고 붙여 해결하려 했다”며 “많은 지역에서 작은 학교 살리기에 나서고 있는 만큼 정책의 대전환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