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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만에 단편집 ‘툰드라’ 낸 강석경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20. 14:20

“인생은 얼어붙은 ‘툰드라’지만… 그래도 희망 찾아 걸어가야죠”

37년만에 단편집 ‘툰드라’ 낸 강석경

입력 2023.02.20 03:00
 
 
 
 
 
 
소설가 강석경은 “겨울의 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비로소 제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주=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6일 경주시에 위치한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 소설가 강석경(72)이 앙상한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줄곧 여기에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 말을 하지 않아요.” 밤마다 숲을 산책하고 싶었다. 불가능해도 그 꿈을 말하고 다녔다. 연고 없는 경주에 자리 잡은 지 약 30년. 강석경은 경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유교가 자리 잡기 이전인 신라 시대의 자유로움에 매료됐으나, 실제 경주는 그렇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전히 신라는 정신적 고향이지만, 그동안 제가 환상에 살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강석경의 깨달음 뒤엔 2014년 몽골 여행이 있다. 노을 진 저녁, 고지대에 오르니 광활한 대지 위로 수십 마리 말과 새 떼가 지나가는 풍경이 보였다. 그 모습이 수년 동안 그의 머리에 맴돌았다. “천상의 풍경이었습니다. 완전한 자연 상태의 풍경은 ‘해탈’이었어요. 인간은 그곳에 이를 수 없지만, 모자란 대로 기나긴 길을 걸어갈 수밖에요.” 그는 ‘번뇌즉보리’를 깨달았다고 했다. 괴로움과 깨달음이 다르지 않다는 뜻.

소설가 강석경/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강석경은 자신의 대표작 ‘숲속의 방’(1986) 속 여대생 ‘소영’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괴로웠다.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화됐던 당시 사회에 어울리지 못한 ‘소영’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야기. 그는 자신이 한국에 속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고 세계를 떠돌았다. 약 30개 국가를 다녔다. 1990년대 초 인도에서 ‘깨닫기 위해 산다’는 것을 배웠다. 경주에서 신라에 대해 탐구했으나 마음 한편이 공허했다. 인간 관계, 자신의 느린 글쓰기 속도가 그를 힘들게 했다. “인연과 글에 대한 집착을 버렸어요. 괴롭지만 하루하루 희망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소설집 ‘툰드라’(강 출판사)에는 인간의 실존과 구도를 탐색하는 강석경 문학의 정수가 담겼다. ‘숲속의 방’처럼 당대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회의를 품는 인물들을 그리나, 그 인물들은 지금의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고통을 인내하며 또 하루를 살아간다. 그동안 강석경이 고통을 인내하며 살아온 시간이 담긴 듯하다.

 

과작의 작가답게 ‘숲속의 방’ 이후 37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 1987년 발표한 단편 ‘석양꽃’부터 작년 발표한 표제작까지 8편의 작품을 묶었다. 표제작은 불륜 관계를 끝내기 위해 몽골 여행을 떠난 ‘주영’과 ‘승민’의 이야기다. 승민은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몽골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뒤 공항으로 돌아간다. 혼자 여행을 하루 더 하게 된 주영은 작가가 고지대에서 본 그 광경을 마주한다. “생은 인연의 허무가 대기하고 있는 정류장들의 노선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소설가 강석경/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강석경은 자신의 책이 “사랑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사회 소설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제 오랜 화두였습니다. 우리는 결혼을 비롯해 제도에 대한 집착이 강해요. 경직된 우리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사랑의 형태를 통해 제도와 인습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 아닐까요.”

 

책의 제목인 ‘툰드라’는 작가가 평생 걸어온 길이다. 짧은 여름 동안 자라는 풀과 이끼가 주된 먹이가 되는 척박한 땅. “책을 내며 저의 지난 30여 년을 되돌아봤습니다. 저는 저와 맞지 않는 토양에 잘못 떨어진 씨앗 같았어요. 동물들은 양식이 없으면 괴롭듯이, 저는 정신적 양식이 떨어질 때마다 어떻게 살아남을까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뇌’를 원동력 삼아 글을 써 나간다고 한다. “20대 때 해인사의 한 스님에게 ‘업은 어디서 생기는 건가요’라고 물었어요. 스님은 ‘업은 자기가 만든다’고 답했습니다. 업을 제가 어떻게 만들었지 생각하는 게 평생의 화두가 됐습니다. 깨달으며 사는 과정이 좋았고, 무엇보다 제게 필요했습니다.”

 

내년은 작가가 등단한 지 50년이 되는 해다. ‘툰드라’를 마지막 단편소설로 삼고, 장편소설 등에 주력할 계획이다. 툰드라가 인간에게 주어진 길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툰드라에 듬성듬성 난 이끼와 풀 찾아 계속해서 길을 떠나는 순록처럼요. 그 길은 고통스럽겠지만, 또 하나의 희망을 찾아 걸어가는 거죠. 저는 지금도 툰드라를 걷고 있고 죽는 순간까지 걸어가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