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설 뒤 갑작스런 한파주의보 속에도 꿈틀거리는 우리의 봄 기미
고향 마을 당산나무는 여전하겠지요! 고향 집 어머니 아버지 뵙고 돌아오셨을 설날, 잘 보내셨지요. 세상 떠나신 어머니 아버지의 넋이 묻힌 고운 동산은 어떠하던가요?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달라졌나요? 아니면 그때와는 눈에 띄게 달라졌던가요? 모두가 좀 달라졌다 해도 어릴 적 뛰놀던 마을 어귀의 그 큰 나무만큼은 여전하지 않던가요! 고향이랄 마을이 따로 있지도 않고, 어머니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살아본 적도 없는지라, 가야 할 곳도 오라는 곳도 없는 처지이지만 명절 때라면 경험해 보지 않은 고향 마을을 그려보게 됩니다. 가보지 않은 곳을 그리워한 누구처럼 마음 속의 고향 마을을 떠올려 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뒤이어 유난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설 명절 오기 전 며칠 동안 햇볕 따스한 남쪽 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아무 목적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내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온갖 어지러운 심사를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긴 했습니다만, 별 생각 없이 떠났습니다. 이곳과 다른 햇살, 다른 구름, 다른 바람이 살랑이는 곳이라면 부질없이 이어지는 불편한 생각들을 잠시나마 잊고 편안한 잠에 들 수 있지 싶었습니다. 나무를 찾아 길 위에 오른 지난 이십오 년을 통틀어 돌아보건대 어쩌면 ‘노동의 강박’ 없이 보낼 수 있었던 날들은 처음이었던 듯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따뜻한 바람 맞으며 한 주일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바람 찬 이곳에 돌아와 올 겨울 들어 가장 찬 바람이 불어온다는 ‘한파주의보’를 맞이합니다.
옷깃을 스미는 바람이 몹시도 차갑습니다. 손목 시계에 표시된 기온은 영하 십칠 도입니다. 열대 수련을 공들여 키우는 나라의 근사한 식물원에서 찾아본 수련 꽃 사진이 도무지 이 아침의 《나무편지》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매서운 바람입니다. 불그스름하게 밝아오는 먼 산을 바라보다가 뉴스를 살펴보니, 남녘의 고로쇠나무 수액 채취 소식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땅에 어김없이 봄의 기미가 스미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람 매워도 다시 이 땅의 큰 나무들과 함께 봄을 채비해야 할 시간입니다.
제가끔 자기 자리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낸 설 명절의 기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새해엔 더 아름답고 충만한 날 이루시기 바랍니다.
토끼해 새해에는 더 좋은 일 많이 이루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설 쇠고 하루 지난 2023년 1월 25일 아침에 …… 솔숲에서 고규홍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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