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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겨울과 봄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살아있는 변증의 생명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 16. 15:00

[나무편지]

겨울과 봄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살아있는 변증의 생명

  겨울 숲은 오묘합니다. 겨울은 숲에 담긴 생명의 신비로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계절입니다. 겨울과 봄의 아슬아슬한 경계, 그건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 생명의 변증이 살아있는 경계라 할 수 있습니다. 겨울 숲에는 다 익은 열매를 떨구는 나무와 다가오는 봄을 채비하며 꽃봉오리를 피워내는 나무가 함께 있습니다. 다른 생명의 힘을 빌려 열매를 널리 퍼뜨려 다음 세대의 번성을 꿈꾸는 나무가 남은 힘을 다 하는가 하면, 그 곁에는 다시 또 새 생명을 키우려 안간힘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삶과 죽음, 혹은 떠남과 만남의 변증이 오묘하게 어우러진 계절이 이 즈음입니다. 겨울 숲을 느끼기 위해 월든 호숫가 숲으로 들어갈 결심을 했다는 소로의 생각이 읽힐 수도 있을 겁니다.

  겨울 바람 차가운 숲의 한켠에는 어느 계절에도 나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새빨간 빛깔로 농익은 열매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지난 계절까지 애면글면 이어온 광합성을 중단한 나무는 긴 겨울잠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무는 쉬지 않습니다.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중입니다. 애써 맺은 열매를 배고픈 새들의 눈에 띄게 하려고 나무는 제 몸에 남은 에너지를 씨앗에 모았습니다. 새들의 먹이에 알맞춤한 모양으로 동그랗게, 또 새들의 눈에 더 잘 뜨이기 위해 더 빨갛게 익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다른 뭇짐승들의 힘을 빌려 더 멀리 씨앗을 퍼뜨려야 하니까요.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잠시도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겨울 오기 전에 이미 열매를 떠나보낸 나무들은 다시 더 건강한 후손을 키우기 위해 벌써부터 꽃 피울 채비에 나섰습니다. 옷깃 스미는 바람은 차갑지만 나무는 꽃봉오리를 피워올렸습니다. 꼼꼼히 공들여 살펴보아야 겨우 가녀린 꽃봉오리의 섬세한 안간힘이 보일 듯 말 듯 피어났습니다. 겨울 숲에서 생명의 신비를 한가득 담고 피어난 풍년화 꽃봉오리입니다. 여느 봄꽃에 비해 서둘러 일찍 피어나는 꽃이어서 꽃봉오리도 누구보다 서둘러 올라왔습니다. 매운 겨울 바람을 이겨내려 작디작은 꽃봉오리를 감싼 솜털이 앙증맞습니다. 어쩌면 이 겨울을 보내는 생존 전략이 놀랍습니다.

  지난 해 봄에 꽃송이를 내려놓으며 곧바로 피워올린 목련 꽃봉오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합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꽃봉오리의 튼실한 몸매가 탐스럽습니다. 눈길만으로도 솜털의 보솜한 느낌이 다가옵니다. 한껏 부푼 꽃봉오리 안에서 꼬물거리며 새 봄을 기다리는 꽃잎, 꽃술이 아련하게 그려집니다. 이 꽃봉오리 열리고 순백의 목련 꽃이 피어날 때까지 나무에게는 견디기 힘든 찬바람도 찾아올 테고, 여린 꽃봉오리 껍질 위에는 찬 눈 쌓이기도 할 겁니다. 다 이겨내야 합니다. 아직 이 땅에 따뜻한 봄바람 불어오기까지 나무와 함께 우리가 스쳐 보내야 할 추운 날은 적잖이 이어지겠지요. 다시 이 숲에 온갖 꽃들이 무성한 화창한 봄날 올 때까지는 차분하게 옷깃 여며야 합니다.

  오늘은 《나무편지》 드리는 여느 날과 달리 일요일입니다.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한 엿새 쯤 전화기를 끄고 따뜻한 곳에 다녀오려고 평안하실 일요일 아침에 《나무편지》 띄워 올립니다. 며칠 동안 이상할 만큼 온화했던 날씨가 다시 차가워진답니다.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건강 주의하세요.

  고맙습니다.

- 2023년 1월 15일 일요일 아침에 …… 솔숲에서 고규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