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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악산비, 제5의 진흥왕 순수비? 한 글자가 역사교과서 바꾸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2. 25. 21:32

감악산비, 제5의 진흥왕 순수비? 한 글자가 역사교과서 바꾸나

중앙선데이

입력 2022.12.24 00:01

업데이트 2022.12.24 18:31

신라시대 탁본 글자 수수께끼

‘典(전)’. 비석의 이 한 글자는 무엇을 전하는가. 경기도 양주·연천·파주에 걸쳐 있는 감악산(675m) 정상에 있는 감악산비(碑)가 다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제5의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을 놓고서다. 박홍국 위덕대 양동문화연구소 연구교수(전 위덕대 박물관장)가 이달 말 한국목간학회에서 간행하는 등재학술지 『목간과 문자 연구』에 실을 예정인 보고서를 미리 입수했다. ‘典(전)’자 발견의 전말이다.

경기도 양주, 연천, 파주 경계에 있는 감악산(675m)은 관악산, 송악산, 운악산,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岳)으로 부른다. 정상에는 건립 시기와 주체를 알 수 없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최근 '典(전)''자가 발견됐다는 발표가 있었다. '典(전)'은 신라시대 다른 비석에 종종 등장하는 글자이고, 비석의 외형이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닮아 이 감악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순수비와 받침돌 등 외형 비슷

“거깁니다. 거기요.”

지난 20일. 영상통화 너머 박 교수는 감악산비에서 典(전)자를 발견한 곳을 가리켰다. “왼쪽 하단에서 위로 5㎝, 오른쪽으로 17㎝, 매끈해 보이는 곳입니다.” 알 듯 모를 듯, 자잘한 볼록과 오목의 연속일 뿐이었다.

 

박 교수는 “탁본을 해야 어느 정도 보인다”며 탁본 사진을 전송해 줬다. 비로소 그 매끈한 부분이 글자로 보이는 듯했다. 박 교수는 “典(전)·曲(곡)·興(흥)·與(여)로 보이기도 하는데, 曲(곡)으로 보기에는 글자의 가로가 넓고, 興(흥)으로 보자니 상부의 세로획이 위로 나와 있으며, 與(여)로 보려면 같은 신라시대 비석인 창녕 척경비와 포항 중성리비에는 약자 与(여)로 새겨져 있어 典(전)으로 판독했다”며 “감악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감악산비가 진흥왕 순수비라면 역사 교과서를 수정할 수밖에 없다.

진흥왕(재위 540~576)은 한강 이북에 북한산 순수비(북한산비)를 세웠는데, 35㎞로 가까운 감악산에 또 순수비를 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 있는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 봉우리를 연결한 둘레 603m의 산성이다. 임진강 중류의 남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관서지방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삼국시대에 많은 전투가 있었다. 감악산에서 서북쪽인 임진강을 바라본 모습이다. 사진 문화재청

감악산이 거느리고 있는 양주·연천·파주 일대는 관서와 한강유역을 연결한다. 감악산 정상에서 서북쪽 5.2㎞ 지점을 바라보면 칠중성(七重城)이 있다. 앞의 임진강 중류는 수심이 얕아 도하에 적격이었음을 옛사람도 알았다. 삼국사기가 전한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들어갔고, 대장군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싸워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신라본기·선덕여왕조).’ ‘660년. 신라의 칠중성 현령 필부가 고구려군에 맞서 20일간이나 성을 지켰다. 고구려군이 화공(火功)으로 공격했다…필부는 고구려군의 화살을 맞아…싸우다 죽었다(열전·필부전).’ 칠중성에는 고구려·백제 유물도 나왔지만, 신라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삼국 쟁탈전이 벌어진 성이지만 진흥왕 이후로는 꽤 오랫동안 점령해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는 감악산 서쪽 설마리에서 영국의 글로스터셔연대 1대대가 중공군을 맞아 싸웠다. 650명 중 30여명만이 살아남았다. 설마리 영국군전투비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99년 방한 때 찾은 곳이기도 하다. 이만큼 이곳은 ‘서부전선 요충지’다. 감악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에, 감악산 근처의 군사적 중요성이 한몫한다는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 있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 [사진 파주시]

 

이상훈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는 “임진강 유역은 한강 못지않게 삼국이 쟁탈전을 벌인 지역”이라며 “고구려로서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남하의 거점으로, 신라로서는 한강을 넘어 북진의 교두보가 되는 곳이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한국전쟁에서도 영국군이 필사적으로 저지에 나선 이유가 임진강 유역이 무너지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 유역 전체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감악산비와 진흥왕 순수비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북한산과 창녕·황초령·마운령도 요충지다. 창녕 척경비(창녕비) 근처 화왕산성은 낙동강 남쪽 의령과 함안을 잇는 길목을, 마운령 순수비(마운령비) 인근 운시산성은 청진과 함흥을 사이의 통로를, 황초령 순수비(황초령비)의 중령진은 강계와 함흥을 연결하는 길을 지킨 ‘요새’다. 조선 숙종 때 현재 모습으로 축조됐지만,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북한산성은 개성과 서울의 길목을 지켰고, 그곳에 북한산비가 세워졌다.

감악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은 40년 전부터 제기돼 왔다. 1982년 6월 동국대 조사단은 이 비석을 ‘발견(당시 많은 언론이 이 표현을 썼다)’하고 삼국시대의 것으로 판정했다. 그러면서 조사단은 북한산비와 외형이 흡사하다고 밝혔다. 당시 중앙일보(1982년 6월 24일 자 11면)는 ‘학자들은 이 비석의 양식과 위치로 보아 진흥왕 순수비의 하나로 추정하면서 앞으로 더 조사 연구해봐야겠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박 교수는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고갯길 옆에 있어 접근이 쉬운 편”이라며 “북한산비와 감악산비는 각각 해발 560m, 675m의 봉우리에 있다는 공통점 외에도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폈다는 순수(巡狩)와 하늘에 고하는 제단의 성격도 함께 지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산비와 감악산비의 유사성은 군사적 중요성, 위치 외에 외형에도 있다는 의견도 밝혔다. 황초령비·마운령비가 가로세로 약 1:3 정도로 홀쭉한 반면 북한산비와 감악산비는 약 1:2 정도로 넙데데하다. 게다가 감악산비는 맞배지붕 형태의 비갓(개석)과 2단으로 조각된 비좌(받침돌)를 갖추고 있어 북한산비(비갓은 현재 없음)와 비슷한 외관을 보인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신라시대 비석 중 개석이 있고 4개 면을 가공했으며, 받침돌을 갖춘 것은 황초령비·마운령비·북한산비와 감악산비 4기뿐”이라며 “감악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고 말했다.

박홍국 위덕대 교수가 지난 10월 감악산비 하단에서 '典(전)'자를 발견했다고 밝혔다.일각에서는 '典(전)'자가 아니라 황초령비의 眞興太王(진흥태왕, 작은 네모 사진)의 興(흥)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김홍준 기자,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감악산비는 원래 글씨가 있었으나 마멸로 사라진 몰자비(沒字碑)다. 글자가 없어 정보가 부족하다. 이미 허목(1596~1682)이 1666년 감악산에 올라 감악산비에 대해 ‘오래돼 글자가 없어졌다’고 『기언』에 남겼고, 신유한(1681~1752)도 1745년 ‘쓰다듬고 만져봤으나 한 글자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청천집』에 밝혔다. 그런데 270여 년이 흐른 지난 10월 박 교수는 ‘典(전)’자를 발견했다고 알려왔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개석 밑이 아니라, 받침돌에서 빗물이 튀어 올라 가장 먼저 손상되는 비석 하단에서였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비석과 받침돌 사이에 자리 잡은 풀이 조금이라도 햇빛과 빗물이 튀어 오르는 것을 막아준 것 같다”며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박 교수가 발견한 ‘典(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글자는 진흥왕 순수비와 무슨 관계인가.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대학 교수는 “전(典)은 책을 뜻하다가 제도·법규의 의미도 가졌고 관직에 붙은 글자이기도 했다”며 “특히 신라시대에는 尻驛典(고역전)·平珍音典(평진음전)·奈夫通典(나부통전)·及伐斬典(급벌참전) 등의 여러 벼슬 이름에 典(전)이 붙었다”고 밝혔다.

박홍국 위덕대 교수가 감악산비 하단에서 발견한 '典(전)'자(붉은 색 점선 안).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이를 興(흥)이라고 봤고, 좌측에도 글씨가 보인다고 밝혔다.[사진 박홍국]

 

진흥왕이 순수할 때 수가(隨駕·왕의 거동 때 따라가는 일)한 인물 중에 근시(近侍·왕을 가까이 모심)직으로 奈夫通典(나부통전)·及伐斬典(급벌참전) 등이 있었다. 나부통전과 급벌참전은 마운령비에서 나온 글자다. 진흥왕은 순수를 하며, 자신의 영토 확장 업적을 남기고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도 새겨 넣었던 것이다. ‘典(전)’자는 황초령비에서도 후반에 나온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런데 왜 감악산비의 글자는 다른 순수비와 달리 사라졌을까. 박 교수는 “이번 조사에서 진흥왕의 비석은 모두 시간에 쫓긴 듯 새겨진 글자 획의 깊이가 비교적 얕았다는 공통점을 찾았다”며 "진흥왕이 순수를 하는 현장에서 비석문을 새겨 글자가 얕았고, 그로 인해 눈과 비바람에 약하지 않았을까 본다"고 덧붙였다. 조사에 동행한 문화재보존처리 업체인 서진문화유산 김선덕 대표는 “북한산 순수비의 경우 비교적 입자가 작은 세립질화강암인데, 감악산비는 석영·장석·흑운모의 입자가 커서 비바람 등에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3D스캐너로도 글자 판독 못해” 주장도

 

현재 학계에서는 3D정밀스캔 등의 첨단 기법을 동원해 비문을 찾고 있다. 향후 감악산비에서 추가로 글자 확인이 가능할까.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2020년 논문에서 “감악산비 표면의 요철이 심해 3D스캐너 등의 기자재로도 성과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된다”며 “이 비에서 글자나 글자의 흔적을 찾았다는 주장들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2019년 서예가 손환일 박사가 감악산비에서 ‘光(광)’ ‘伐(벌)’ ‘人(인)’ 세 글자를 확인했다고 한 언론사에 밝히기도 했다. 감악산비에서의 위치는 밝히지 않았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은 “감악산비에서 글자를 발견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다만 典(전)자가 아니라 興(흥)자로 보이고 그 좌측에도 글자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고 연구위원은 2019년 3D스캔 등 첨단 기법을 활용해 충주고구려비에서 ‘397년(광개토대왕 영락 7년)’을 의미하는 연호(영락 7년) 등 8자를 판독한 바 있다. 그는 “사진으로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황초령비에 새겨진 ‘眞興太王(진흥태왕)’의 興(흥)과 판박이”라고 말했다. 순수비일 가능성에 관해서는 “감악산비는 북한산비처럼 받침대가 한 통의 계단식인 점에서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을 높인다”면서도 “감악산비는 양식상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고, 접경 지역에 위치한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가 세웠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반면 하일식 교수는 2020년 논문에서 “감악산비 받침대처럼 제법 정교하게 멋을 부린 경우는 북한산 순수비보다 뒤의 시기에 해당하리라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밝혔다. 고 연구위원은 “감악산비의 경우 마멸 정도가 심해 3D스캔으로도 판독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좀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기 직전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모습. 비석 위에는 개석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고 받침돌은 암석을 이용해 한 통의 계단식으로 만들었다. [중앙포토]

학계에서는 이번 ‘典(전)’자 발견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몰자비에서 유자비(有字碑)로 탈바꿈시킨, 망망대해에서 건진 큰 수확(K대 L교수)”과 “외형과 한 글자로 순수비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Y대 L교수)”로 갈린다. 한 역사학자는 “(감악산비의 진흥왕 순수비 감식이) 이제 시작일 수도 있고, (더는 글자를 발견할 수 없어)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게, ‘典(전)’자 한 글자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